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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실종된지 두 달여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혜진양의 친구들이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실종된지 두 달여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혜진양의 친구들이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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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기자들은 왜 그래요? 혜진이 장례식 때 잠깐 눈물이 멈춰서 가만히 있으니까 마이크 들이대고 '너는 왜 안 우니? 눈물 안 나와?' 그래요. 그래서 울면, 갑자기 여러 군데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어요."

혜진이와 예슬이가 다니던 안양 명학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잔혹한 유괴범죄의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듯 했다. 엄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끌탕하며 교문 앞을 지켰지만, 애들은 친구들과 장난치며 한 손에는 종이컵 슬러시, 다른 한 손에는 신문종이에 싼 마른 오징어다리 열 개를 쥐고, 입속 가득 질겅질겅 씹고 다녔다.

혜진이·예슬이 얘기를 꺼내면 애들은 "슬퍼요" "보고 싶어요" 등등 재잘재잘 말도 잘했다.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철부지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경찰이 드나들고, 방송차량이 상주하며, 기자들이 왔다갔다 하는 게 마냥 신기한 눈치였다. 

"기자들 얘기 듣다가 안 울면 나쁜 아이 같아요"

동심에 젖은 아이들은 그저 장난하는 게 좋고, 그날그날 숙제가 버거우며, 학원 가기 싫으니, 날씨 좋은 봄날 놀이터에서 엄마 몰래 '땡땡이'를 칠 방법이 없을까 골몰하는 듯 했다. 그게 애들이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 "그런데요, 아줌마"라는 꼬리표를 달고 수십 가지 얘기를 쏟아내는 꼬마아이들은 친구의 허망한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과연 기자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 듯 하다.

고작 열두 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이지만, 그들의 눈에도 기자들의 유도질문과 연출된 화면은 '진실'과 거리가 멀어보였던 모양이다. TV뉴스나 신문 사진기자들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죽었잖아, 왜 안 울어?'라고 묻고, 그래도 멈칫 하면 '너는 울음 안 나오니?' 한 번 더 추임새를 넣어 꼭 울게 만드는 게 좋지 않았던 거다.

일찍 철이 든 6학년 아이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지만, 대개는 신나게 놀다가 '혜진이·예슬이' 얘기를 꺼내면 갑자기 우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쳤다. "기자들은 우는 어린이를 좋아한다"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몇몇 아이들은 '매스컴 울렁증'이 있다며 카메라를 피했다. 그중 한 아이는 "기자들의 얘기를 듣다 울지 않으면 꼭 나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슬픈 일이지만 눈물이 안 날 수도 있는 건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안양 초등학생 유괴 실종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정모씨가 범행을 자백했다고 알려진 가운데, 김병록 안양경찰서 형사과장이 17일 오후 고 이혜진양과 함께 실종된 우예슬양도 수색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양 초등학생 유괴 실종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정모씨가 범행을 자백했다고 알려진 가운데, 김병록 안양경찰서 형사과장이 17일 오후 고 이혜진양과 함께 실종된 우예슬양도 수색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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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취재'하는 관행 굳어지면 진짜 진실 왜곡할 위험

고백하자면, 취재할 때 그 상황에 맞는 말이나 장면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상황에 맞는 멘트를 할 때까지 질문공세를 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대개 카메라기자들은 사건에 적합한 화면을 보도하고 싶어 한다. 장례식장에서 웃는 아이들의 사진을 쓸 수 없으니까.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마찬가지로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기자는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전달하기 보다는 의미에 맞는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억지로 의도된 왜곡이 아니라면 본질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적합한 것이라고 합리화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취재원들도 언론이 잘 보도할 수 있도록 맞춰주는 홍보의욕이 앞서기도 한다"며 "실제 기자와 취재원 간의 이런 공생이 일상적으로 관행화 된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자와 취재원이 이런 방식으로 상호공존하다 보면 사건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파고들어 정작 '진짜 진실'과는 멀어지는 보도를 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쉽게 취재하는 관행이 굳어지면, 부지불식 간에 본질을 왜곡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몇 가지의 패턴을 가지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그림' 하는 식으로 꿰맞추기 취재를 하면서 관행화 된 틀을 깨지 못하면 결국 기자 스스로 진실 접근을 차단하는 꼴이 된다는 문제 지적도 했다.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 이혜진양의 자리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양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흰 국화와 편지가 쓸쓸히 놓여있다.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 이혜진양의 자리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양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흰 국화와 편지가 쓸쓸히 놓여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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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맞는 그림찾기...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지난 19일 명학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혜진이와 짝꿍이었다는 현정(가명)이는 "혜진이가 엄청 착했다"며 "귀엽고 발랄했으며 많이 웃던 아이였는데 나쁜 아저씨가 죽였다"고 원망했다. 현정이는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며 "혜진이를 죽게 한 그 아저씨도, 혜진이 장례식 때 '너는 왜 안 우니' 한 아저씨도 잘 이해가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동안 혜진이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불쑥 한 녀석이 끼어들었다.

"아줌마, 기자 되면 뭐가 제일 힘들어요?"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태그:#안양어린이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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