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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헌책방에 다니기에 알게 된 책

 

 헌책방을 다니면서 보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다니면서 만나는 책이 있습니다. 새책방을 다니는 동안 맛보는 책이 있습니다. 세 곳을 골고루 다니면서 세 곳마다 다르게 움직이는 책흐름을 느끼고, 세 곳마다 다르게 갖추는 책매무새를 살핍니다.

 

 헌책방을 다니면서 만난 반가운 책을 기쁘게 읽고 나서 인터넷책방을 뒤적여,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여 찾아보곤 합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사랑을 받는 책이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랑을 못 받아 그예 판이 끊어지고 만 책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사랑받는 책임을 알게 되면, 그래, 참 잘되었구나 생각합니다. 예나 이제나 사랑 한 번 못 받은 책임을 알게 되면, 아이고, 이 책이 처음 나오던 그때에는 왜 못 알아보았을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사진책 <Bernard Wolf-Anna's silent world>(J.B.Lippincott,1977)가 보입니다. 판짜임과 찍은이 이름이 낯익습니다. 무언가 느낌이 있습니다. 살그머니 집어듭니다. 책을 펼쳐 사진을 보고 글을 읽고, 맨끝에 실린 찍은이 소개를 봅니다. 아, 예전에 버나드 울프 님이 펴낸 사진책 <Connis's new eyes>를 만난 적 있습니다. 이번이 이분 두 번째 사진책. 사진찍은이 해적이에 <Don't feel sorry for Paul>과 <Tinker and the medicine men>과 <Daniel snd the whale hunters>와 <Jamaica boy>와 <the little weaver of Agato>라는 사진책도 펴냈다고 나옵니다. 이 책들도 앞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좋은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날 수 있을 테고, 좋은 인연으로 더 이어지지 못한다면 못 만날 텐데, 이분 사진책은 우리 나라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는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사진으로 본 고려대학교 80년>(고려대학교 기획처,1985)을 집습니다. 여든 해 발자취라고 하지만, 책은 얇은 편입니다. 여든 해 발자취를 보여줄 만한 사진이 안 많았는지, 단출하게 알짜배기만 모았는지 모릅니다.

 

 <에스터 펜체프 엮음/신복룡 옮김-공해에 대하여>(평민사,1980)를 구경합니다. 여러 사람들 글을 차근차근 엮어 놓았는데 그다지 머리속에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세월을 좀 묵어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보다는 ‘공해’를 몸으로 듬뿍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일이라 그런지 모릅니다.

 

 

 그냥 길을 걸어도, 숨을 쉬어도 느낄 수 있는 공해입니다. 자동차를 몰지 않으니 더더욱 공해를 느낍니다. 물건 하나를 저잣거리에서 살 때에도 공해를 느낍니다. 가게에서 내어주는 비닐봉지뿐 아니라 물건 하나를 감싸고 있는 또다른 비닐과 랩, 더욱이 지나친 껍데기 상자. 또한, 요모조모 쓸모가 있다지만 꼭 만들어서 팔아야 할까 싶은 물건들. 나무젓가락과 플라스틱 숟가락은 왜 그리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 종이컵은 차곡차곡 모아 다시 쓴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종이컵을 안 쓰면서도 살 수 있을 텐데. 쓰레기통에 넣는다고 없어지는 쓰레기가 아니고, 분리수거를 한다고 줄어드는 쓰레기가 아닌데. 정화조를 파고 비데를 쓴다 하여 우리 집이 깨끗해질 턱이 없는데. 넘쳐나는 신문과 책과 잡지와 인터넷에 쏟아지는 글과 소식과 사진은 얼마나 ‘공해 아닌 이야기’인지. 참으로 나누고 싶어서 나누려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돈바라기로 쏟아내는 물건들인지.

 

 <La carte d'um Ange>(朝日ソノラマ,2003)는 눈동자를 움직이고 팔다리무릎 관절도 움직이는 인형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일본돈으로 쳐도 퍽 비싼 인형들로, 이 인형을 만드는 사람들도 따로 있다고 합니다. 머리 모양도 바꾸고 옷도 바꾸고 한다는 인형들 사진을 보니 하나같이 서양 얼굴 서양 머리 서양 몸매입니다.

 

 몇 해 앞서 <양짜와 헌책방에서 함께한 일주일>이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이 책은 ‘양짜’라는 인형이 청계천 뚜껑열기를 하기 앞서 청계천 헌책방 한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엮어냈는데, 주인공 인형이 바로 <La carte d'um Ange>에 나오는 그 비싼 인형입니다.

 

 

 (2) 달라지지 않는 모습

 

 120쪽짜리 얇은 책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인권백서>(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2000)가 보입니다. 일고여덟 해 앞서 나온 책인데, 이때 인권 문제나 오늘날 인권 문제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 연수생제도가 실시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수제도의 합리적인 운용과 바람직한 제도개선은 지지부진하여 한국에서 생활중인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17쪽)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헤아려 봅니다. 아니, 발돋움할 마음이 있기는 한가요. 모두들 돈 많이 벌고 아파트 평수 키우는 데에만 머리를 싸매는 가운데, 정작 우리 삶터가 어떻게 무너지고 우리 삶이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에는 눈길 한 번 못 두지는 않는가요.

 

 우리 식구만 잘살면 되는 세상이 아니고, 우리 집 아이만 내로라하는 대학교 졸업장을 따서 책상 앞에서 펜대 굴리는 쇠밥통 일자리를 얻으면 그만인 세상이 아닌데. 우리가 먹는 밥은 외국돈(달러) 많이 갖고 있으면서 바깥에서 사먹기만 한다고 되는 노릇이 아닌데. 땅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다움을 잃고, 땅을 잊으면서 사람이 걸어갈 길을 내팽개치는 우리들이라고 느낍니다.

 

.. 현재 한국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단기로테이션 정책’이다. 국내 3D업종의 부족한 인력의 공급 차원에서 외국인력을 도입하되, 이주노동자가 장기간 체류하게 되면 사회복지 비용 및 사회적 비용의 상승은 부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그러나 진보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적용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또는 노동자로서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  (64∼65쪽)

 

 한국땅 공장임자가 이주노동자한테 하듯이 한국노동자한테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틈을 가르고 차츰차츰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정규직에 있는 사람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주무르듯이, ‘없는 이’와 ‘빼앗긴 이’를 우리 스스로 멀리하도록 ‘있는 이’와 ‘빼앗은 이’가 쑤석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한국사람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맑은 공기를 마시고 맑은 물을 마실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까. 사고 걱정 없이 골목길을 걷는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찻길을 걸으며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나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자유로울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까. 자동차 없는 사람이 누릴 권리란 어디에 있습니까. 대학교 나오지 않은 사람도 누릴 권리는 어디에 얼마만큼 있습니까. 적게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이 누릴 권리란 무엇인지요. 못생긴 사람, 가난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들은 무슨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까.

 

 <리연걸 주편/리금자 옮김-자강자의 필기>(민족출판사,1988)라는 책이 보입니다. 중국조선족이 펴낸 작고 얇은 책입니다. 중국땅 젊은 벗들이 ‘돈이나 허튼 이름’에 매이기보다는 ‘스스로 헤쳐 나가는 자기 삶’을 찾기 바라는 마음으로 중국 사회 곳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쓴 글(체험수기)을 모았습니다.

 

.. 1981년에 나는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쳤는데 그만 붙지 못하였다. 나는 많은 미취업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심정으로 집에서 직업이 생기기를 기다렸다. 다시말하면 종신토록 향수할수 있는 믿음직한 ‘쇠밥통’을 얻기 위하여 승학할 기회나 직장에 들어갈 기회를 기다리고있었다 ..  (94쪽)

 

 우리 나라에서는 ‘쇠밥그릇’이고 중국에서는 ‘쇠밥통’이로군요. 여기나 거기나 젊은이들이 ‘공무원(국영단위 정식 종업원)’ 되기를 꿈꾸기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내 마음속에 대학에 붙거나 국영단위의 정식 종업원이 되려는 념원이 불븥듯하였기때문이다.”라는 대목을 보니 더 그래요.

 

 그렇다면, 사회가 달라지거나 거듭나지 않기로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이웃나라도 매한가지라는 이야기일까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요. 누구나 더 많은 돈을 바라고, 더 높은 이름값을 찾으며, 남 위에 올라서서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힘을 좇는지요.

 

 

 (3) 내가 읽는 책 하나는

 

 책 구경을 마치고 나옵니다. 가방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차곡차곡 들어찹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서 한 번 읽고, 집에 닿아 발 씻고 자리에 눕기 앞서 한 번 읽으며, 책상맡에 놓고 틈틈이 읽을 책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태껏 모르고 있던 책을 골고루 만났습니다. 제가 모르던 이야기를 일깨워 주었고,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야기를 단단히 여미어 주었습니다. 한 가지를 새로 깨달으며 그동안 걸어온 발자국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한 가지를 거듭 되뇌이면서 여태껏 해 온 일이 얼마나 올바르거나 알맞았는가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제가 제 길을 걷기 앞서 제가 걸으려고 하던 길을 걷던 사람들 생각과 걱정과 모습과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앞선이들 아픔과 웃음과 한숨을 저도 머잖아 느끼겠지요. 그리하여 앞으로 언젠가는 저도 제 나름대로 걸었던 이 길 이야기를 또박또박 적어내려가며 제 뒷사람한테 길잡이 노릇을 해 보고자 내놓을 수 있을 테고요.

 

 뜻을 이루건 뜻을 이루지 못하건. 뜻을 이룬 뒤 적어내려가는 이야기라면 뜻을 이룬 대로 좋고. 뜻을 이루지 못하며 적어내려가는 이야기라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로 좋은 모습으로.

 

 뜻을 이룬 뒤에만 적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라면 너무 뻑뻑합니다. 갑갑합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다음에는 적어내려갈 수 없는 책이라면 너무 메마릅니다. 눈물도 피도 없어서 소름이 돋습니다. 어쩌면 제가 읽는 책들은 한결같이 뜻을 이루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뜻을 미처 못 이루는 사람들, 또는 끝내 못 이룬 사람들이 엮어낸 땀방울인지 모르겠어요. 애쓰고 또 애써도 곤두박질만 치는 사람들 눈물방울. 일어서고 또 일어서면서 멍들고 까지고 아무는 생채기가 온몸 가득한 사람들.

덧붙이는 글 | -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 02) 333-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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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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