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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대운하로 시끄러운 여주를 다녀왔습니다. 고향이 여주인 내게 신륵사는 산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장동에서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서너 시간 흔들리며 뒤로 달아나는 플라타나스를 헤아리는 일에도 일찌감치 진력이 날 무렵에 여강(驪江)과 신륵사가 보이노라면 몸의 진을 다 빼던 지독한 차멀미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습니다.
 

여름이면 강 건너 포플라가 은빛으로 반짝이며 강물 위로 짙푸른 그림자를 너울거리고, 겨울이면 얼음낚시꾼들이 얼어붙은 강에 구멍을 뚫고 배가 누런 황잉어를 낚던 여강과, 그 가장이에 자리 잡은 신륵사는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던 풍경들이었습니다.

 

발아래 시퍼런 강물을 굽어보며, 흐르는 강물을 고요히 내려다보던 전탑 밑에는 아예 강 위로 얹혀 떠가는 나룻배라도 된 양 절벽 끝에 걸린 정자에서 바라보던 여강은 늘 잔잔했습니다.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설까지 전해오는 신륵사는 규모에 비해 보물이 많은 절로 유명합니다. 보물 226호인 다층전답을 비롯하여 무려 7개의 보물이 지정되어 있는 고찰입니다. 벽돌을 구워 만든 전탑은 강을 내려다보며 의연히 서 있어, 늘 홍수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마음 든든한 호법신장으로 믿어져 왔습니다. 이제 대운하를 앞두고, 여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어지러운 물결에 휩싸여 흐릅니다.

 

그동안 수도권 시민의 식수를 지켜내기 위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많은 규제에 붙들렸던 지역민들에게는 대운하사업이 반갑기만 합니다. 대운하 터미널 예정지로 거론되며,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개발에 대한 규제가 풀린다니 오래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기분인가 봅니다. 거리에는 이런 기분에 들뜬 '대운하 환영'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하가 지나가면서 남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신륵사의 코앞까지 물에 잠기리라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비록 신륵사 한쪽 곁에 자그마니 걸려 있긴 하지만 그 고요한 목소리의 단호함은 결코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제 마을을 파는 이들에게는, 다가올 훗날의 재앙은 멀기만 할 것입니다. 막말로 나중에 강물이 썩고, 물고기가 죽으면 주머니에 채운 돈으로 딴 곳에 가서 살면 되리라는 이기심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나라 전체가 망가진다 해도 걱정될 일이 아닙니다. 주머니에 숨겨둔 미국 국적을 챙겨서 떠나면 될 테니까요. 과연 이 나라는 누구의 것인지, 눈 아래 뵈는 저 강물은 누구의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절 입구에는 장당 만원의 기와 불사가 펼쳐져 있습니다. 각기 제 바람을 적은 기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뉴하트>의 출연진이 적어 놓은 기왓장들도 끼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바라지만, 그것이 하나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로 배치되기도 합니다. 내 바람이 누군가의 바람을 짓밟기도 하는 현실에 쓴웃음이 나옵니다.

 

사물이 모셔진 누각을 지나, 바로 전탑 쪽으로 향합니다. 벽돌로 쌓은 탑으로 벽절이라고도 불린 신륵사는 휘감아 도는 여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강바람을 시원하게 온몸으로 맞이하는 정자가 있어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는 멋도 일품입니다.

 

맞은편 영월루 아래로 하얗게 깔린 은모래밭은 충주댐이 세워지면서 진흙이 흘러내려와 여름이면 여기저기 잡초들이 돋아나긴 해도 아직까지는 푸른 강물과 흰 모래의 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해가 등 뒤로 기울어진 시간에 전탑으로 오르는 계단에서는 한 번쯤 사진을 찍어둘 만합니다. 화창한 봄날, 노랑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새색시라면 그 앞에서 반드시 사진 한 장을 담아 두길 권합니다. 거의 왕년의 달력사진을 방불하게 할 것입니다.

 

 

이제 난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광풍이 나라 전체를 휩싸더니, 무엇으로 돈을 벌든 돈 많은 이를 선망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난개발이라는 말은 '지역 발전'으로, 투기는 '재태크'라는 말로 포장을 하여 어디서나 떳떳하게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웬만한 관공서마다 영어 단어 하나씩은 끼워넣어야 구색이 맞고, 제 나라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들까지 남의 나랏말 배우라고 채근질을 합니다. 그렇게 모든 걸 돈과 바꾸어 살다가 막상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다음에는 무엇으로 그것을 구해 올 셈인지, 가슴이 아득합니다.

 

지독한 실연을 겪은 이나,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이 종종 몸을 던졌다는 절벽 가장이의 석탑 곁에 서 봅니다.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고, 무엇이 그 귀한 목숨을 스스로 던지게 하는지 무심히 흐르는 여강을 내려다보며 많은 생각에 잠깁니다. 사념을 넘고, 분별을 넘어 그저 어디론가 여하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이제 그 물길을 제 마음대로 손 안에 넣고 주무르겠다는 이들의 오만함이 걱정스럽습니다.

 

 

강가에 매어 놓은 배 한 척이 이따금 밀려오는 물살에 졸 듯 고물을 까부릅니다. 공명을 위하고,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산을 깎고, 물을 막는 일을 제 능력으로 아는 이에게 한 번 권하고 싶습니다. 천년을 두고 서서 여강을 바라보며 제 자리를 지켜온 석탑 곁에 서서, 장차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벼랑 끝으로 나아가 내려다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남양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여주, #신륵사,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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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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