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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여드레 동안 천막농성터에서 하루를 보냈더니 몸이 파김치가 됩니다. 그러나 농성터를 떠날 수 없어서 온몸이 찌뿌둥하고 쑤셔도 꾹 참고 버티었습니다. 천막농성 아흐레가 되는 오늘은 잠깐 숨을 돌립니다. 앞으로 싸워야 할 날도 긴데, 벌써부터 나가떨어지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다른 분들이 좀더 애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늦잠도 자고 머리도 감고 책도 읽고 글도 끄적입니다.

 

천막농성에 앞서도 집일은 돌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온통 어지럽고 먼지가 소복히 앉았습니다. 모처럼 하루 얻은 말미에 마루를 쓸고 행주를 빨아 몇 군데나마 닦고 치우고 합니다. 아직 손이 시리니 빨래는 한 점만 해서 볕바른 마당에 내어겁니다.

 

고뿔 걸린 옆지기 먹을거리를 마련해 준 다음 제 먹을거리를 챙기고,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하다 쉬고 또 일하다 쉬니 어느덧 저녁 아홉 시. 오늘은 아직 땅을 못 밟았구나 싶어서 장바구니 하나 들고 길거리로 나옵니다. 어기적어기적 걷습니다.

 

동네 한복판 꿰뚫으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천막농성터는 불빛이 환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복닥복닥.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군요. 살짝 들어가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인사 한 번에 끌려들어가 한참 앉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마음으로만 꾸벅 절을 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천막농성터에서 15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구멍가게에 갑니다. 구멍가게 할배는 누군가와 전화를 나눕니다. 할배 자리 옆으로 맥주병이 셋 놓여 있습니다. 가게 앞에 늙수그레 아저씨 둘이 담배를 태웁니다. 세 분이서 느즈막한 때에 술 한 잔 걸치시는군요. 그러면 나도 한 잔 걸칠까? 맥주 한 병, 우유 작은 것 하나, 과자 하나, 라면 하나, 이렇게 해서 3300원. 구멍가게 할배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리번두리번 가게를 둘러봅니다.

 

종합선물세트가 보여서 요새는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어 만지작거립니다. “그래, 손님이 있어서” 하면서 구멍가게 할배는 전화를 끊습니다. “그거 사시게? 그거 가져가면 칠천 원에 줄게. 본전치기로. 원래 만 원인데” 하고 말씀합니다. 살 마음이 없고, 지금은 주머니에 돈도 없습니다. “아니요, 그냥 어떤 건가 구경해 보려고요.”

 

주머니에 돈이 조금 있었다면, “아이구 할아버지, 본전치기 하면 뭐가 남는다고요. 그냥 만 원 받으시면 되지요” 하고 말하면서 사들었을지 모릅니다. 요것 하나 사들고 천막에 살짝 들러서, “애 많이 쓰십니다. 종합선물세트 하나 가져왔습니다!” 하고 내놓았겠지요.

 

주머니에는 돈 오천 원. 1700원이 남습니다. 맥주 한 병이 1600원이고 소주 한 병이 1100원, 막걸리는 1000원인데, 한 병 더 살까? 이래저래 망설입니다. 아니다, 한 병만 하자. 내가 술꾼도 아니고. 벌이도 없는 형편에 무슨 두 병까지. 두 병을 마시면 석 병을 마시고 싶어지고, 석 병을 마시면 넉 병 닷 병을 마시고 싶어지지 않겠나. 딱 한 병으로 끝내야지. 가볍게, 아쉬움이 남게.

 

“거기, 바구니에 담으시게?” “네, 여기에 담으면 돼요.” 이렇게 값을 치르고 물건을 바구니에 넣습니다. 밖에서 담배 태우던 어르신들은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 세 분은 무슨 일로 모였을까 모릅니다만, 틈틈이 만나는 옛동무일 수 있을 테지요. 집으로 와서야 떠오르는 생각인데, 그 어르신들한테도 인사를 하면서(서로 동네 이웃일 수 있으니), “몸 튼튼히 잘 지내셔요. 올해도 복 많이 받으시구요!” 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오늘은 쉬어 주어야 하는 날입니다. 내일 새벽에 천막농성터에 다시 나가 보려면. 또 내일뿐 아니라 모레도 있어요. 모레뿐 아니라 글피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날은 깁니다. 우리라고 해 보아야, 이곳, 조그마한 동네입니다만, 젊은이는 거의 없고 거의 모두 할매와 할배 투성이인 이곳 조그맣고 조용한 동네를 앞으로도 이 모습 이대로 간직하면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즐겁게 살아갈 터전으로 가꾸고 싶은 마음으로 싸우자면, 오늘 하루 말미에는 푹 쉬고 힘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너비 50∼70미터짜리 산업도로가 들어설 까닭이 없고, 이런 산업도로가 아닌 간선도로라도 들어설 일이 없습니다. 들어서야 한다면, 오순도순 어울릴 이웃집입니다. 이웃과 동무가 느긋하게 모여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터전입니다. 때로는 술 한 잔이 아닌 책 한 권으로 저녁나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동네 도서관을 조촐하게 마련해야 합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 아닌 간선도로’가 나더라도 동네는 두 동강이 납니다. 찻길은 24시간 뻥 뚫려 있고, 건널목 신호등은 이곳과 저곳을 남남이 되도록 합니다. 여태껏 걱정없이 걸어다니던 길을 자동차에 치이고 밀리면서 다녀야 하겠습니까. 이제껏 자전거로 넉넉히 다니던 길을 배기가스 맡으며 빵빵빵 경적질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골목길에서도 자동차는 다닙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는 누구보다도 사람이 임자입니다. 자전거가 임자입니다. 어린이와 할배 할매가 임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골목길이 찻길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640미리 보리술 한 병 값 1600원. 헌책방에서 사들이는 조그마한 책 하나 값 1500원, 또는 2000원. 조금 도톰한 책은 3000원, 또는 4000원. 하루 한 병 마음을 풀고 머리를 식히면서 마시는 술. 하루 한 권 마음을 덥히고 머리를 채우면서 읽는 책. 마음을 풀고 머리를 식히는 데에는 1600원짜리 보리술 하나도 좋고 1100원짜리 소주도 좋고 1000원짜리 막걸리도 좋습니다.

 

마음을 덥히고 머리를 채우는 데에는 1500원짜리 헌책 하나도 좋고, 2000원짜리 헌책 하나도 좋으며, 5000원짜리 손바닥책 새 것 하나도 좋아요. 맥주 두어 병 값이면 새책 한 권 값. 맥주 한병 값이면 헌책 한 권 값. 다만, 제법 값이 나가는 헌책도 있고, 요사이(나온 지 몇 해 안 되는 책) 나온 헌책은 6000원도 하고 7000원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루에 술 한 병으로 흥얼흥얼 마음이 풀어지고, 하루에 책 한 권으로 우썩우썩 마음이 자란다면, 이 하나만으로도 하루 마무리는 쏠쏠하지 않습니까?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헌책방+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책읽기, #책, #헌책방, #술, #책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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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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