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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려도 금방 녹아버리는 2월 하순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차츰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계절이다. 바람이 불어도 살갗의 느낌이 부드러워졌다. 금방이라도 터뜨릴 매화의 꽃망울이 더 또렷하다.

 

온통 하얀 눈만 가득 찬 지리산 능선엔 아직 봄의 입김은 퍼지지 않았다. 하늘 가득 눈발이 날린다. 지난 겨울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1m 이상 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또 하얗게 쌓인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하루 종일 눈을 맞으며 지리산 능선을 걷는 기분은 상쾌하다. 산에 오르기 전 도심과 들녘엔 봄기운이 가득했는데, 지리산 능선에 오르자 하얗게 쌓여 있는 눈길이 너무나 반갑다. 떠나려는 겨울을 붙잡고 차가운 눈보라를 토해내는 자연의 엄정함에 옷깃을 꽉 잡는다.

 

 

 

2월 25일(월) 오전 6:30, 산을 좋아하는 ‘풀꽃산행’팀 7명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중산리를 출발했다. 지리산을 오르는 것은 그리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언제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듯 지리산의 품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찾아 떠나는 지리산이다.

 

동행한 장영인 선생님의 형은 홍콩의 지사에 근무하고 있단다. 그런데 귀국하여 지리산 종주를 한 번 해 보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란다. 해외에 근무하는 사람도 그렇게 그리워하는 지리산인데, 가까이 있는 사람이 늘 찾지 못한 아쉬움이 폭발할 즈음에 겨우 한 번씩 찾는 지리산이다.

 

중산리에서 로타리 대피소를 거쳐 천왕봉까지 오르는 길이 가장 단거리이면서도 가장 험난한 길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1915m)을 가장 짧은 거리로 오르니 얼마나 가파름이 심하겠는가?

 

더구나 등산이라는 것이 처음 출발할 때 가장 고통스럽다고들 하는데, 가파른 길을 택하여 오르는 지리산이니 숨이 콱콱 막히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지리산은 어느 길인들 힘들지 않은 길이 있겠는가?

 

오르다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배낭을 벗어 놓고 쉬는 것이 어찌 그리 즐거운지, 길을 가다가 쉬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산에 오르면서 쉬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인간의 몸은 견디지 못할 것 같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땅에 붙어버린 것 같은 그 고통 속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다.

 

10여분 쉬다가 다시 출발하는 발걸음은 아주 가볍다. 언제 그렇게 힘들었던가를 잊어버리는 출발이다. 어디서 그런 새 힘이 솟아나는지 참 신기하다. 그래서 가끔은 휴식이 필요한 가 보다. 쉼의 즐거움, 엄청난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기쁨, 휴식 후의 산뜻한 발걸음, 쉼이 없는 발걸음은 상상만 해도 질식할 것 같다.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 천왕봉을 약 1km 정도 남겨 놓은 지점에서부터 산길에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길이라기보다 사람들이 밟고 다져 놓은 얼음길이다. 겨울 산행에 필요한 아이젠을 꺼내 발에 차고 오른다.

 

 

 

오전 11시, 우리가 도착한 천왕봉의 하늘은 너무 맑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하늘이 맑게 드러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구름에 싸여 있는 경우가 많고, 비바람도 몰아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왕봉에서 맑은 날 일출을 보는 것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12시,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경상남도 중산리 사람들과  경상남도 마천 사람들이 산마루까지 올라와 물물을 교환하였다고 하여 생긴 장터목이다. 대피소의 취사장엔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후 1시,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하려고 하는 즈음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세석 대피소를 가는 길목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바람이 거세진다. 천왕봉에 올랐을 때, 저 멀리 사천 앞바다까지 다 보였던 지리산 줄기는 몇 백 미터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오후 5:30,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할 때까지 내리던 눈발은 더 거세진다. 지리산 8경 중 ‘벽소명월’이라고 해서 벽소령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달은 보이지도 않는다.

 

 

 

26일(화) 아침 7시, 벽소령 대피소를 출발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지리산은 온통 하얀 눈 세상으로 변했다. 천왕봉에 오를 때만 해도 길과 땅에만 깔려 있던 하얀 눈이 이제는 나무 위에도 하얗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친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는 사람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나다니던 길이 하얀 눈에 감추어진 것이다. 나무들은 하얀 옷을 입고 흔들거린다. 눈꽃 터널을 지나가는 즐거움으로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산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새로 발자국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눈이 가득한 산에 길을 내며 가는 산행을 러셀이라고 한다. 맨 앞에 윤영조 산행대장이 길을 뚫으며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더구나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방한복이며, 스패치며, 비옷까지 겨울 산행 준비를 모두 갖추고 출발하여서 발길이 느려진다. 오후 1시 경에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려고 계획하고 출발하였는데, 연하천 대피소에 10시에 도착했다. 계획에 많은 차질이 생겼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차를 한 잔 끓여 먹고 출발하였다. 빨리 걸으면 2시까지 도착할 것 같다. 하늘은 가끔 눈발이 그치기도 하였지만 매서운 바람은 여전하다. 뺨에 부딪치는 눈보라가 발걸음을 더욱 더디게 한다.

 

환상적인 눈세계에 도취되어 탄성을 지른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눈앞에 몰려 왔다가 금방 사라진다. 잠시 환한 날씨가 되면 가지를 감싸고 있던 눈은 더욱 흰빛을 발한다. 지상에도 이렇게 하얀 눈이 내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는다.

 

오후 4시, 화개재, 반야봉 삼거리, 임걸령을 거쳐 노고단 대피소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약 15km를 걸었다. 뱀사골 대피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점심을 해 먹지 못한 발걸음이 무거웠다. 빨리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점심도 싸지 않았던 것이다. 배낭에 넣어 가지고 갔던 초콜릿이며 영양갱, 사탕, 과자 등을 꺼내 먹었다.

 

 

 

 

27일(수) 7시, 노고단 고개로 올라갔다. 천왕봉 어깨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이다. 간밤에 매섭게 불었던 눈보라가 깨끗하게 그쳤기 때문에 하늘이 너무 맑다. 노고단은 온통 하얀 눈 세상을 이루고 있다.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장엄하다. 하얀 눈이 가득한 노고단 어깨로 솟구치는 해가 너무 밝다. 수없이 많은 일출을 보았지만 저렇게 또렷하고 밝은 일출은 처음인 것 같다. 눈부신 태양은 하얗게 빛나던 눈꽃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9시, 노고단 대피소를 출발하였다.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쌓인 눈이 적어진다. 그리고 화엄사 계곡 중간 정도에 이르자 눈이 없다. 화엄사에 다 다다르도록 눈은 보이지 않는다.

 

2월 말이면 지리산 능선에 오르는 길에는 눈이 없지만 지리산 종주길인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는 눈이 있다. 11월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녹지 않아 그 위에 쌓이고, 또 그 위에 쌓여 1m가 넘는다. 지리산 능선엔 3월에도 눈이 내리기도 하고, 그 눈이 녹기 시작하는 시기도 3월 말이나 4월 중순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는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봄철 산불예방을 위하여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지리산 종주를 통제한다. 옛날에는 같은 기간 동안 지리산 전체를 통제했다. 하지만 출입구 주변 상가 주민들의 항의가 거세고, 또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의 항의가 많아서 요즈음은 천왕봉을 오르는 길이라든지, 노고단에 오르는 길은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눈을 맞으며 하얀 눈 천지를 밟고 왔는데, 3월 1일부터 지리산 종주 구간의 출입 통제는 너무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국보 1호가 불이 타서 불조심에 대한 조치를 강화해야 하겠지만 능선에 눈이 가득한데 통제한다는 것이 어딘지 좀 어색하다.

 

지상엔 봄기운이 완연한데, 지리산 천왕봉에서 노고단의 종주 능선 내내 휘몰아치던 눈보라며, 하얗게 변한 나무며, 바위며, 길의 하얀 눈 세상이 꿈만 같다. 화엄사 풍경 너머로 보이는 노고단 정상 부근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태그:#지리산 종주, #지리산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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