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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흐리고 바람은 몹시도 차가웠다.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현장으로 향하는 길. 지하철에 내려 셔틀버스에 몸을 싣자 자리가 빼곡하다. 다양한 이들이지만 40~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가장 많다.

 

나름대로 멋을 낸 차림들. 머리 또한 공들여 빗어넘겼다. 가벼운 흥분이 이는지 소풍날 아이들마냥 이곳저곳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앞에 앉은 70대 가량의 노인은 함께 온 일행에게 힘주어 강조한다.

 

"성경 말씀에도 나와 있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거라고. 우린 지금 그 현장을 보러 가는 거야."

 

국회 옆 주차장에 내려서자 다시 한 번 찬바람이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한나라당의 깃발을 앞세운 이들이 의기양양하게 앞장을 선다. 그들을 따라 기념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기적의 현장? 국회 잔디밭은 인파의 물결
 

입구에서 입장객들에게 색색의 머플러를 나누어주고 있다. 날씨에 딱 맞는 기념품인 듯 일제히 목에 두르기 시작한다.

 

국회 잔디밭은 그야말로 인파의 물결이다. 공식행사 시작 전부터 좋은 자리는 동나 버렸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 대학생 자원봉사단, 새마을 부녀회, 금발의 해외 취재단, 눈에 익은 유명 연예인들…. 사람들 그리고 또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이들은 역시 머리가 하얗게 센 남성들이다.

 

지정석 가장 앞줄에 있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는 카메라를 켜자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환하게 웃어준다. 인사성 좋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에 반해 뒤쪽에 앉아있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내정자는 시종일관 무겁고 마뜩찮은 표정을 풀지 않는다.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는 '시화연풍'의 주제로 식전 행사가 열렸다. 노래와 춤이, 고전과 현대가, 국악과 양악이 어우러지는 무대다. 활기가 넘쳤고 참가자들과 관객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새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구동성 "잘 살게 해주세요"

 
행사장 한구석에서 커피와 녹차를 준비해 온 서울 마포 새마을부녀회의 조순덕(60)씨에게 참가소감을 물었다. 조씨는 "춥지만 좋은 자리에 참가하게 돼 무척 기쁘다"면서 "신임 대통령이 잘살게 좀 해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하지만 전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물음에는 말끝을 흐렸다.

 

같은 세대인 직장인 김병호(58)씨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느낌도 비슷했다.

 

"신임 대통령이 오셔서 희망이 살아나는 것 같다. 하시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는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셨으면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심히 한다고는 하셨는데…. 앞으로는 국정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셨으면 좋겠다."

 

신임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같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젊은 세대가 후한 편이었다. 남자 성악단의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참석한 오정민(여·29)씨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새롭게 시작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돼 영광"이라며 서민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전에 비해 빈부격차가 많이 벌어진 것 같다. 서민들이 잘 살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좋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좋고 나쁜 평가가 있겠지만, 5년 동안 많이 수고하셨다.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정말 고생하셨다.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대학생 자원봉사단으로 식장행사 도우미를 맡은 박찬미(25·인천대학교)씨는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며 "긴 시간 동안 오래 고생하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정말 감사 드린다"고 이야기를 남겼다.

 

"그저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으면..."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짧지 않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는 30분을 훌쩍 넘겼다. '선진화'와 '실용'을 이야기했고, '신화'와 '꿈'에도 방점을 찍었다.

 

중간중간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때로는 환호가 일었고 일부 시민은 두 팔을 벌리며 감격하기도 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던 시골 소년이 노점상, 고학생, 일용노동자, 샐러리맨을 두루 거쳐 대기업 회장, 국회의원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날은 끝까지 차가웠다. 추위 탓에 취임사가 끝나자 뒤쪽의 인파가 썰물같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를 가로질러 나가 연도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참석자들이 각자의 집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 됐다. 많은 이들의 표정은 비교적 후련하고 시원해 보였다. 다시 몇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시민들은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취임사를 통해 많은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셨다. 역대 대통령 중 진짜 국민참여정부를 만들어주실 것이다. 경제대통령으로 거듭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들이 염려하는 대통령이었다. 5년 동안 여러 가지 문제도 있었지만 임기를 끝까지 마치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린다." (손 사무엘, 호주 시드니 교민, 47세)

 

"오늘 인터넷 응모를 통해 참가했다. 좋은 말씀 잘 들었다. 아무래도 대학생이니 등록금 문제에 관심이 많다. 주변 친구들도 등록금·책값 등 많이 힘들다. 때문에 또래 학생들이 경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해결을 해주셔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정말 수고 많으셨다. 새로운 5년 함께 응원해 주셨으면 한다." (광운대 전자공학 2학년 유한준)

 

취임식에는 적지 않은 승려들도 참가했다. 신임 대통령과 더불어 '소망교회'가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는 요즘. 혹 그들은 섭섭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스님들은 그저 "잘 봤다"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힘들게 그 중 한 분의 말씀을 청했다.

 

"앞으로 잘 살게 하시지 않겠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세상사 원래 나오면 물러나는 것이라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신임 대통령의 종교에 대한 질문에)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저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될 뿐. (본인 소개에 대해) 중이 무슨 소개가 필요할까? 그저 이름 없는 중일 뿐. 두 분 대통령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태그:#대통령, #취임식, #노무현,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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