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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암 전경. 입구에 요사와 금대선원이, 그 안쪽에 대웅전이 있다.  그리고 대웅전보다 한 층 높은 석축 위에는 나한전이 자리 잡고 있다.
 금대암 전경. 입구에 요사와 금대선원이, 그 안쪽에 대웅전이 있다. 그리고 대웅전보다 한 층 높은 석축 위에는 나한전이 자리 잡고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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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를 나와 금대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간다. 지리산 천왕봉이 나와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듯 숨을 나타냈다 숨겼다 한다. 그런가 하면 삼정산도 "천왕봉만 지리산 봉우리냐? 나도 엄연히 지리산에 속하는 봉우리다, 나도 한 번 봐달라"고 투정을 부린다. 이런 길이라면 온종일을 걷는다 해도 다리 아픈 줄 모를 것 같다.

그러나 산의 자식인 산길에겐 제 어미를 닮아서 자족(自足)이라는 지혜가 있다. 적당한 지점에서 자신을 살짝 내려놓을 줄 안다.

이윽고 길이 끝난 곳에서 금대암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부터 마음의 길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금대암 전각들은 나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묵묵히 지리산 줄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안국사 전각들이 금대산 앞쪽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마중하듯 자리 잡고 있다면 금대암 전각들은 산 뒤쪽에서 오르는 사람들을 마중하는 형태인 것이다. 방금 내가 올라온 길은 금대암의 옛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리산을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마당가에 서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이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마당가에 서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이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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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끝에서 바라본 지리산 줄기들. 키 큰 나무가 경남도 기념물 제212호 금대암 전나무다.
 마당 끝에서 바라본 지리산 줄기들. 키 큰 나무가 경남도 기념물 제212호 금대암 전나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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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마당가에 가서 지리산 줄기들을 바라본다. 지리산의 긴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하봉 - 중봉 - 천왕봉 - 제석봉 - 연하봉 - 촛대봉 - 영신봉 - 칠선봉 - 덕평봉 - 벽소령 - 형제봉 등 지리산 능선이 차례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순간 가슴 밑바닥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그리움 한 덩어리가 불끈 붉은 해처럼 솟아오른다.

지리산의 자존심일까. 지리산은 순순히 내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없다는 듯 천왕봉을 구름으로 살짝 가리고 있다. 날 보려면 직접 이곳으로 올라오는 뜻인가. 아무튼 장쾌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아무리 풍수지리를 문외한일지라도 이곳에 서면 저절로 알리라. 풍수장이들이 왜 금대암 자리를 천하 명당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지를. 산 아래 금대암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 커다란 돌에 새겨진 '지리방장제일금대'란 글귀가 결코 허랑한 말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마당 아래로는 꽤 너르고 푸른 대숲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전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푸른 상록침엽수다. 수령은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전나무는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고 한다. 본래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으나 1998년 무렵에 낙뢰로 한 그루는 부러져 없어졌다 하니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늙은 전나무가 대나무들에 으스댄다. "여기 나도 이렇게 푸르거늘 네가 무슨 독야청청이냐"라고.

나는 불현듯 금대암 스님들의 무욕에 한 가닥 의혹을 품는다. 저렇게 장쾌한 지리산이라는  정원을 두고도 모자라서 전나무를 키우고, 너른 대숲을 조성한 것은 욕심이 아니란 말인가. 하기야 그 덕분에 이렇게 천하 절경을 들여다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조선의 선비 뇌계 유호인(1445~1494)은 '금대사'라는 시 속에서 "산 보고 물 보고 이 삶을 보내며 / 인간세상 많은 시비에 관여치 않네(看山看水送此生 不管人間多是)"라고 노래했다. 만일 이 좋은 풍경 속에서 세상 시비에 관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두고온 세속에 대한 강박증을 단 한시도 놓지 못하는 가엾은 사람일 것이다.

촌스러움을 비켜간 대웅전과 숨겨진 아름다움

대웅전.
 대웅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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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암은 신라 태종 무열왕 3년(656)에 행호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산 중턱에 있는 안국사와 같은 시기에 안국사의 암자로 창건했지만 지금은 안국사보다 훨씬 큰 절이 되었다.

1489년, 김일손이 지리산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유두두록>에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함께 금대암에 잠시 들렀는데 당시 이 절에는 20여 명의 승려가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한다. 그 스님들이 범패를 부르며 뜰 안을 빠른 동작으로 돌고 있었으며 고승의 주석지팡이를 보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금대암의 역사는 더 이상 기록되지 않는다. 1950년 6˙25전쟁 뒤 폐사된 것을 1960년에 금대암 복구기성회가 중건했다는 사실 외엔.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옆면에 법당 출입문이 있는 것과 별도로 커다란 문이 있는 것은 주거공간으로도 쓰는 인법당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빗꽃살문.
 아름다운 빗꽃살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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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보통의 법당과는 달리 앞쪽에 툇마루 1칸이 덧대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툇마루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작고 용 머리가 정교하게 새겨진 동종이 걸려 있다.

이 법당은 1980년대 중반에 지었다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소목장의 솜씨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내가 끌린 것은 대웅전 빗꽃살문이다. 모란을 새긴 것으로 보이는 문살은 내소사의 것보다 고졸한 맛은 없지만 근래에 만든 것치고는 그리 촌스럽지 않다.

또 하나 내 눈길을 끈 것은 고방으로 보이는 공간의 문에 달린 빗장과 이 빗장을 양쪽에서 붙잡고 있는 부재인 빗장 둔테이다. 이 빗장둔테는 거북이 모양으로 조각돼 있다. 전북 정읍의 김동수 가옥 대문의 것과 비슷하다. 

강석경 소설 <석양꽃>과 보살

거북형 빗장 둔테.
 거북형 빗장 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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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에서 늙으신 보살 한 분이 걸어오신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얼른 인사를 드렸더니 웃으면서 받아 주신다.

이 보살에게서 육친의 정 비슷한 친근감을 느낀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가 강석경의 글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인생이 있어서 나는 금대암에서도 여러 인생을 만날 수 있었다. 늘 고양이와 티격거리는 공양주 보살은 곧잘 소주를 마시곤 발그레한 얼굴로 아들 보고 싶다는 타령도 하고 법당에 들어가 마구 종을 치기도 했다. 중학교만 마치고 절에 들어온 행자는 무전여행 경험담을 들려주고, 언덕 너머 있는 다른 암자에 데려가기도 했다. 저승 풍경인 듯 고요하던 그 암자의 스님 방엔 성경이 놓여 있었는데 , 마당에 외롭게 피어 있던 상상초가 지금도 기억난다. - 강석경, <내 마음에 남은 절>에서

강석경은 이 절에서 <석양꽃>이란 단편소설을 썼는데 TV문학관으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고방에서 무언가 찾을 게 있나 보다. 보살이 빗장을 제치더니 고방 문을 연다. 저 빗장과 빗장둔테의 아름다움에는 보살이 시도 때도 없이 묻힌 손때가 기여한 바가 클 것이다.

나한전.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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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유형문화재 제34호 3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제34호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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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보다 한 층 더 높은 석축 위에 있는 나한전으로 올라간다. 나한전은 1999년에 지은 건물인데 커다란 바위 위에 서 있다. 안에는 다섯 분의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인데 한 분만 남고 모두 도난당해 새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나한전 오른쪽엔 3층석탑이 있다.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가지런히 새겼으며, 지붕돌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끝에서 살짝 들려 약간 상승감이 느껴진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 보개가 올려져 있다. 탑의 높이는 2.5m밖에 되지 않아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느낌이 든다. 조성 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의 것이 아닌가 싶다.

탑이 본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다. 원래는 대웅전과 선원의 중간 마당 어디쯤에 있었던 것 아닐까.

단 하루라도 무장무애한 삶을 살고 싶건만

멋진 불발기 분합문이 달린 금대선원.
 멋진 불발기 분합문이 달린 금대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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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을 내려와서 선원을 기웃거린다. 지리산을 바라보느라 흥분한 나머지 그냥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금대선원(金臺禪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예전 법당으로 쓰던 건물이다. 지금의 마당 한 가운데쯤에 있었다가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물러나 앉게 되었으며 방향도 지금처럼 대웅전 옆을 바라보게 바뀌었다고 한다.

금대암은 신라 도선국사가 참배지로 인정했으며, 고려시대엔 보조국사, 조선시대엔 서산대사가 수도했다는 말이 구전돼 오고 있다. 또 보조국사 지눌의 법맥을 이은 제자 진각 혜심도 이곳에서 수도했는데, 눈이 이마에 묻힐 정도가 되었는데도 묵묵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꼼짝하지 않고 수행했다고 한다.

진각 혜심의 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몸에 옷을 걸치지 않아서 무의자라 했을까, 마음에 허위의 옷을 걸치지 않아서 무의자라 했을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선시와 게송들은 그가 마음에 번거로운 옷을 걸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려준다.

魚龍在水不知水(어룡재수부지수) 물에 사는 고기는 물을 알지 못하고
任運隨波遂浪遊(임운수파수랑유) 물결치는 대로 자유롭게 헤엄치네
本自不離誰得失(본자불리수득실) 본래 잃어 버리지 않았거늘 득실을 말하지 말라
無迷說悟是何由(무미설오시하유) 미혹함이 없는데 구태여 깨달음을 강조하는가


- 진각혜심의 <無衣子詩集>에서

다시 스무 살 무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옛날 진각 혜심스님처럼 무장무애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기에 들끓는 열망에 마음만 뜨거워진다. 천왕봉이 저렇게 높이 솟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지. 서둘러 금대암을 떠난다. 금대암이여, 미안하다. 더 머물고 싶지만, 오늘 내가 무장무애하게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나.

덧붙이는 글 | 지난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지리산 , #금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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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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