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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겨우내 얼말린 시래기
 겨우내 얼말린 시래기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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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게 무슨 냄새야. 맛 없는 냄새야.”
“이 녀석 맛없긴. 할머니가 저녁에 구수한 시래기 국 끓여줄려고 시래기 삶고 있어.”
“쓰레기? 할머니 나 쓰레기 안 먹어. 쓰레기는 더러운 거야. 할머니 쓰레기는 버리는 거야.”
“그런 쓰레기가 아니고, 맛있는 시래기야. 시래기 된장국.”
“그래도 난 안 먹을 거야. 쓰레기는 싫어. 싫어”
“이 녀석 이게 얼마나 귀한 음식인데 그래. 싫으면 고만둬라 할머니가 다 먹을랜다.”

일곱 살 된 조카 주석이가 커다란 솥에 말린 시래기를 삶고 계시는 친정엄마와 함께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래기를 쓰레기로 잘못 알고 맛도 보기 전에 자기는 주지 말라며 투정을 부리고 있는 주석이를 보니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똑같은 투정을 하던 저의 어린 시절이 스쳐갑니다.

“나랑 똑같네요. 나도 할머니한테 그랬었는데. 하긴 지금도 시래기 삶는 냄새는 별로더라. 만들어 놓으면 먹긴 잘 먹지만요.”
“냄새가 별로라고? 난 구수하기만 한데. 하긴 니들이 시래기 맛을 뭘 알겠냐.”

솥단지에 시래기를 삶으며 엄마는 그 옛날 궁핍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겨울햇살에 말린 나물은 아주 귀한 구황식품이었다
 겨울햇살에 말린 나물은 아주 귀한 구황식품이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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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했다는 말 니들은 우스개로 알지? 그거 정말이다. 몇 날, 몇 일 피죽 한 그릇, 갱죽 한 그릇도 재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뱃가죽이 등가죽에 가서 달라붙게 생겼는데도 이상하게도 화장실에는 가고 싶거든. 그래서 가보면 이게 쉽지가 않은 거야. 아무리 힘을 줘도 뭐 먹은 게 있어야 나올 것도 있지. 그러다보면 똥구멍이 찢어지는 거지. 요즘 애들이 그런 가난을 겪어 봤어야 뭘 알지.”

먹지 못해 화장실조차 가기 힘들었다는 부모님은 과음과 과식 그리고 기름진 음식과 불규칙한 식사로 위나 장에 문제가 생겨 약이니 병원이니 찾아다니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늘 너무 있어서, 너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고 하십니다.  그 옛날 없어서 먹지 못했던 시절에는 배는 고팠지만 지금처럼 고혈압이나 비만같은 병에 결려 고생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는 것이지요.

“배고픈 것을 알아야 음식 귀한 것도 알고, 음식 귀한 것을 알아야 사람 귀한 것도 아는 법인데 요즘 애들은 너무나 풍족하게 사니까 그런 걸 몰라. 좀 구식이고 거칠지만 이런 음식도 먹어보고 그래야 뱃속도 조화가 되는 거지. 어떻게 만날 좋은 음식, 맛난 음식만 먹고 살려고들 하는지. 그렇게 좋은 음식, 맛난 음식들만 먹고 살아도 예전 사람들보다 아픈 사람들은 더 많더라. 너무 지나치다니까.”

멸치 몇마리 된장 한주걱이면 훌륭한 시래기국이 됩니다
 멸치 몇마리 된장 한주걱이면 훌륭한 시래기국이 됩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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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김장철 말려둔 시래기에 보리쌀 한 줌과 된장 한 주걱을 넣어 푹 끓여낸 시래기 죽 한 그릇이면 온 가족의 겨울나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기는커녕 멸치 한 꽁뎅이 넣지 않아도 족했던 구수한 시래기죽. 어려운 집에서는 그나마도 먹지 못해 겨우내 식구가 준 집들도 있었다니 시래기는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준 귀한 음식임에 틀림없었지요.

그렇게 궁핍과 배고픔으로부터 가족을 구해 주었던 시래기는 우리 사회가 절대적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 점차 잊혀져가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꽁보리밥과 시래기죽 대신 쌀밥과 고기가 식탁에 오르고 김장도 직접 담가 먹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다보니 집집마다 줄줄이 시래기를 엮어 말리는 풍경 역시 보기 드문 장면이 되었지요.

그래서인지 추어탕이나 고등어조림에 넣기 위해 말린 시래기나 불린 시래기를 구하려고 해도 좋은 시래기를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범람하는 중국산으로 옛 맛을 지닌 시래기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지난 김장때 엄마는 작은 무 이파리 하나를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거두어 곱게 엮어 뒤뜰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눈 오면 눈을 맞고 비 오면 비를 맞고, 햇볕에, 바람에 겨우내 얼마른 시래기가 마침내 구수한 국과 나물이 되어 식탁 위로 올라옵니다.

굵은 멸치가 통째로 들어간 구수한 시래기 된장국과 새우젓에 살짝 볶아낸 시래기나물을 마주하니 문득 안도현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새우젖에 볶아 먹고
 새우젖에 볶아 먹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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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죽

안도현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덧붙이는 글 | 시래기에는 독성물질의 체외배출을 돕고 장내 유익한 세균 증식작용을 하는 식이섬유소가 많아서 특히 대장질환 예방과 콜레스테롤 흡수를 낮추는데 효과적인 식품입니다. 시래기의 원료인 무청에는 칼슘과 철분도 많이 들어있으며 특히 비타민C는 같은 양일 때 귤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많이 들어 있어서 피부미용과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무청이 간암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실험결과가 발표되어 시중에 시래기 품귀현상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태그:#시래기, #갱죽,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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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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