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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제에서 용왕제를 지내게 된 사연

 

전북진안 북부마이산 아래에 자리 잡은 저수지가 있는데, 이를 사양제(斜陽堤)라 부른다. 사양제는 단양제(丹陽堤) 또는 사양동 방죽이라고 불리는데, 1962년 준공되었다. 이곳에서는 사양제(斜陽堤)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용왕신께 마을과 가정의 소원성취와 안녕을 위하여 제를 모셨다.

 

용왕제는 내사양에 살던 정을동(작고함) 보살 할머니가 새해 첫 용날과 백중에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보살할머니가 용왕제를 모셔오다가 보살할머니가 작고한 이후 함께 용왕제를 모셨던 김두식(83세) 할아버지가 1976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용왕제의 맥을 잇고 있다.

 

사양제에서 만난 성양근 할머니

 

오늘이 음력으로 첫 용날이다.(2008년 2월 10일) 저수지에 도착해서 제장(祭場)에서 보니 마이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장은 저수지 제방 오른편 안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저수지는 언 뒤 그 위에 눈이 내려 눈이 부셨다. 용왕님께 헌식할 얼음 구멍은 이미 뚫어 놓았다. 일찍이 와 게신 성양근 할머니(82살, 1927년생)를 만났다. 장수군 계북면 연동마을에서 오셨다는 성양근 할머니가 용왕제를 찾게 된 사연은 이렇다.

 

성양근 할머니의 시아버지인 송공준(작고)씨께서 진안지역에서 교사로 생활하셨는데 시아버지께서 용왕제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어 부모가 들인 공을 잇기 위하여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용왕제를 모시기 위하여 온다고 한다.

 

일찍 오셔서 축원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계신다. 성양근 할머니는 2남 2녀로 4남매를 두었는데 셋은 서울에 살고 장남은 장계에서 가게를 운영한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올해 87살로 연로해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한다. 세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왔다며 제물로 쌀을 준비하여 왔다고 한다. 공들이려 오니까 힘들지 않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마음이다. 정성이 중요한 것이다.

                

사양동은?

 

사양동은 풍수적으로 ‘궁채터’라고 하는데 내사양과 외사양 마을을 말한다. 사양동은 ‘마이산’이 주산이다. 내사양은 새마을 뒷산 줄기로 뻗은 맥이 백호에 해당하며 ‘한개골’로 내려온 맥이 청룡에 해당한다. 외사양의 청룡은 마이산 줄기에서 부귀산으로 이어지는 강정골재 맥에 해당한다.

 

사양동은 마이산을 처음 찾아왔던 사람이 산이 좋아서 마이영봉(馬耳靈峯)을 보며 살고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동(董)씨와 정(鄭)씨가 함께 살았으나 차츰 마이산이 외부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번창하였다.

 

내사양은 산자락 안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외사양은 진안 읍내까지 대체로 반듯하게 길이 펼쳐져 있고, 마이산이 그대로 보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기 때문에 경치가 수려하여 민박하는 집이 상당수 된다.

 

사양동은 해 질 무렵 서산(西山)에 걸친 햇볕이 이 마을에 비칠 때 그 사양낙조(斜陽落照)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하여 마을 이름을 사양(斜陽)이라고 불렀다 한다. 또 원래는 ‘시양골’이라 불렀었는데, 조선 이후에 해도 마이산을 비켜간다고 해서 ‘사양동(斜陽洞)’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사양동 용왕제

 

사양동에서는 다양한 제가 모셔진다. 현재 내사양은 내사양 마을대로 ‘탑제’를 모시고, 외사양은 외사양 마을대로 ‘다리제’를 모시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내사양과 외사양 마을 공동으로 마을 뒤편 산중턱에서 산신제를 모셨으나, 산 중턱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산 주령이 끊어져 버린 뒤로는 제를 모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용왕제는 두 마을이 공동으로 저수지 제방(사양제)에서 지금도 모시고 있는데, 제일은 일년에 두 번으로 음력 정월 첫 번째 용날과 7월 백중날이다.

 

용왕제는 정오에 모신다. 예전에는 제방에 오방기를 세워두었는데 오늘은 미처 준비를 못했다고 한다. 제장 주변에는 4개의 호롱불이 켜져 있다. 4개의 호롱불이 켜진 이유는 오늘이 첫 용날인데, 음력으로 정월 초나흗날이기 때문에 4마리의 용을 모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월 초하루부터 초나흗날까지 밤마다 불을 밝힌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들고 올 수 있는 제물을 아주머니들이 들고 온다. 20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제각기 하나씩 제물을 들고 제장으로 옮긴다. 옮겨온 제물은 하나씩 진설된다. 제물은 돼지머리, 메밥, 찰밥, 시루떡, 북어, 삼색실과, 명태국, 무국, 김, 한과, 나물, 메밀묵 등이 준비된다.

 

사양동 마을에서 제물은 함지박 그릇째로 해서 진설한다. 막걸리도 한말이 준비된다. 푸짐하게 준비된다. 용왕님께 드리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먹기 위하여 준비한 제물이라…. 제물을 진설하는 것을 보면 일정한 형식이 없다. 자유롭다.    

 

제물 진설과 함께 용왕제에 참여한 아주머니들이 제방 주변에 촛불을 켜고 축원한다. 이때 호롱불에도 촛불을 켠다. 이렇게 해서 제가 준비되면 정각 정오에 제가 시작된다. 제관은 따로 뽑지 않고 김두식 할아버지가 모신다. 제를 모시기 전 스스로 부정한 곳을 피하고 깨끗하게 기우한다.

 

예전에는 제를 지내기 전에 풍물을 쳤으나 지금은 풍물을 볼 수 없다. 제의 역시 자유롭다. 아주머니들이 김두식 할아버지 뒤로 도열한 가운데서 시작된다. 김두식 할아버지가 세 개의 잔에 술을 붓고 재배한다. 독경을 시작한다. 아주머니들도 자연스럽게 사방을 향해 축원한다. 축문은 따로 없고 구두로 축원한다. 축원문은 용왕님께 일 년 열 두달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10분 가량 진행된다.

                   

 “진안군 진안읍 사양동 마이산의 밑의 제방이옵나이요.  어찌든지 금년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오일 무사고로 댕겨주시라고 금일 정오에 이렇게 바치오니 반갑게 받아주시고 반갑게 놀아주시기를 다 다옵니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집안에 어찌든지 정월 초하루부터 그믐날까지 무사고로 댕겨주시라고 금일 나흗날 정오에 이 정성을 다 드리오니 용왕님께서는 반갑게 받아주시기를 다 다옵니다. (중략) 하나에서 열까지 어찌든지 일년 열두달 무사고로 댕겨주시기를 다 다옵니다.”

 

축원을 한 후 모두 함께 재배를 한다. 재배를 한 후 마을 주민들에게 소지종이를 나누어 주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리면서도 축원한다. 아주머니들은 촛불을 켠 자리로 가서 제각기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린 후 개인별로 용왕님께 재배를 한다. 그리고 돼지머리를 용왕님께 헌식한다. 헌식하기 전에도 촛불을 켜고, 소지를 올린 후 뚫어 놓은 얼음 속에 돼지머리를 헌식한다. 그리고 조금씩 제물을 때어 헌식한다.

 

용왕님께 바치는 행사가 끝나면 참여한 사람들이 음복한다. 그리고 김으로 싼 찰밥을 싸서 먹어야 재수가 있다고 하여 일일이 싸서 먹는다. 정이 넘친다. 이렇게 제가 끝나면 음식을 나누어 가져간다. 물론 나에게도 한 움큼의 먹을거리가 생겼다. 이렇게 서로서로에게 정을 느끼게 하는 행사가 용왕제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두식 할아버지

 

김두식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점심을 한다. 김두식 할아버지는 오늘은 외지 분들의 참여가 적었다며 용날이 빨라서 그렇고 가까이 살던 사람들이 서울로 이사 가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성이라고 한다. 30여 년을 지탱해 온 용왕제를 몸도 불편하고 하여 더 이상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벌써 작년부터는 백중 때는 지내지 않고 첫 용날만 지내고 있다고 한다.

 

김두식 할아버지는 일제 때 만주 지역으로 2년여 동안 징용으로 끌려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요즘에 태평양유족회가 결성되어 보상을 받기로 되었으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한다.

 

용왕제가 있었기에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해도 거르지 않고 용왕께 축원하지 않았던가? 40여 년을 이어온 사양동 용왕제가 마을축제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김두식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태그:#진안 마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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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북 전주고에서 한국사를 담당하는 교사입니다. 저는 대학때 부터 지금까지 민속과 풍수에 관심을 갖고 전북지역 마을 곳 곳을 답사하고 틈틈히 내용을 정히라여 97년에는<우리얼굴>이란 책을 낸 바 있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전북지역의문화지인 <전북 문화저널> 편집위원을 몇년간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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