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숨은 꽃"을 찾아서 귀신사(歸信寺)는 김제 금산사에서 전주로 가는 고갯길에 있는 청도리 마을에 있다. 내가 귀신사를 찾기는 거의 4년만의 일이다. 양귀자는 소설 <숨은 꽃>에서 "지난 가을에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썼다.
그러나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밖에 속하는 일이다. 난 신의 거취에까지 신경 쓸 만큼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신사라는 이름에는 영원 회귀를 꿈꾸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귀소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 건 사실이다.
지난 8일, 귀신사로 향해 가는 내내 내가 지난 4년 동안 아득히 먼 곳에서 헤매며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한참 가다가 돌아보면 헛걸음이 되고 말 도로(徒勞)의 길이 되는 그런 삶. 까닭 모를 회한이 나를 오래도록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청도리 마을에 닿기 직전, 길 왼쪽 논 가운데 자리 잡은 "지친 신이 쉬"고 있는 부도에 들른다. 부도는 고승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무덤이다.
하대석에 비해 상대석이 지나치게 크다. 사람으로 치면 상체 비만인 셈이다. 그나마 가운데 받침돌에 여러 겹 연꽃을 새긴 것이 밋밋함을 겨우 피했다.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조각 장식이 소박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절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 부도가 서 있다는 것은 이곳까지 절의 경내였던 때가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청도리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귀신사로 올라간다. 앙상한 모습으로 마을을 감싸는 감나무들이 마치 부도 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친다.
사람의 눈과 마음을 압도하는 비로자나불
절 마당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라간다. 바야흐로 장중한 맞배지붕 건물인 대적광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귀신사는 쓸쓸하다. 한여름 석 달 동안 쉴 새 없이 붉은 꽃을 피워내 이 소박한 절집을 장엄하던 배롱나무는 대적광전 옆에 조용히 머리를 조아린 채 서 있다.
대적광전은 이제 보수공사를 완전히 끝마쳤는지 주변까지 말끔히 정리돼 있다. 4년 전, 이곳에 왔을 적만 해도 공사 중이었다. 양귀자가 소설 <숨은 꽃>을 썼던 1992년부터 시작한 공사이니 십 년도 넘는 공사였다. 하도 말끔하게 정리해버린 탓인지 도무지 17세기에 지은 건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법당 안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 마디 쪽으로 뻗은 지권인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모두 흙으로 제작한 소조상에다 금물을 입힌 것이다.
삼불좌상의 몸집이 어찌나 커다란지 바라보는 내 눈과 마음을 옴짝달싹 못하게 압도한다. 대적광전이 앞면 5칸·옆면 3칸이나 되는 작지 않은 크기의 건물인데도 비좁게 느껴질 정도다. 길고 큰 불상 비례는 명나라 초에 유행하던 형식이다. 이곳의 삼불좌상은 명대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불상의 상호는 인자하고 부드럽게 생겼다. 크기에서 느끼는 중압감을 상쇄시켜주는 듯하다.
절 왼쪽 마당에는 탑재, 배례석과 장대석과 주초석, 기단석 등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 그 옆에는 석탑, 석등 부재 등을 모아서 쌓은 삼층석탑 형태의 탑 1기가 서 있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8)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하며 전성기 때는 8개나 되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부재들은 어느 시기에 존재했다가 파괴된 부재들일까. 겉으로 보기엔 얌전하게 생겼지만, 알고 보면 귀신사도 파란만장한 이력을 간직한 절인지도 모른다.
웃기는 일입니다. 대체 뭐 하러 이 짓을 합니까?
대적광전 뒤에 있는 명부전 역시 대적광전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이 건물도 1993년에 보수를 했는데, 아직 단청이 칠하지 않은 채로 있다. 너무 깨끗해서 정이 가지 않는 게 흠이다.
문 옆에 금방이라도 무엇인가를 내리칠듯한 자세로 버티고 선 장군상 한 쌍이 인상적이다. 불단에는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좌상을 모셨으며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도명존자와 시왕이 세워져 있다.
보수공사를 마친 귀신사는 정돈된 느낌을 얻은 대신 예전의 고풍스러운 맛을 잃은 듯하다.
양귀자가 소설 <숨은 꽃>을 쓴 것은 1992년이다. 소설의 제목인 '숨은 꽃'은 귀신사 보수공사에 참여한 막일꾼인 김종구라는 사내를 가리킨다.
소설 속 서술자는 귀신사에서 김종구와 15년만에 재회를 하게 되고 숨겨져 있던 그의 인간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하면서 이념적 좌표가 사라진 시대에서 새로이 삶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말하자면 김종구란 사내는 N.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 같은 존재다. 김종구란 사내가 절 보수공사에 대해 품은 생각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그가 품은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김종구는 품삯이 들어 있는 바지 주머니를 보란 듯이 두들기다 말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웃기는 일입니다. 대체 뭐 하러 이 짓을 합니까? 목수하고 이 절에 처음 온 날이 마침 비오는 날이었어요. '첫눈에 야, 이건 굉장한 절이다.' 라는 느낌이 확 들었지요. 전국의 이름난 절들을 나도 숱하게 봤지만 이런 절은 처음이었거든요. 작가 앞에서 문자 쓰기 거북하지만, 뭐 생사를 초월한, 그런 인생무상 같은 게 가슴을 찍어 누르대요. 그런 절을 싹 뜯어서 울긋불긋하게 만들겠다니 얼마나 웃기는 짓이에요.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길래 첨엔 이 일을 손 뗄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아십니까? 조금이라도 덜 웃기게 만들기 위해선 내가 있어야겠다, 이건 정말이지 순수한 내 충정입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구요."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김종구도 그렇게 느꼈던가. - 소설 <숨은 꽃>의 한 대목 막일꾼도 아는 일을 정작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란 치들은 알지 못한다는 건 지독한 패러독스다. 그 자신들은 세련됐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관념이란 허울을 벗지 못한 지식이란 촌스러운 것이다. 이곳에 와서 보라. 결과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는가를.
구순혈(狗脣穴) 누르기 위해 세운 삼층석탑과 조형물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대적광전 뒤 언덕으로 올라간다. 계단 옆에는 드문드문 차나무가 심어져 있다. 내가 귀신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탑과 석수를 호위하는 신장처럼 수령 30, 40년 가량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버티고 선 이 언덕이다. 이 언덕 앞에는 모악산 줄기가 굽이치듯 뻗어가고 뒤로는 푸른 대밭이 멋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장의 돌을 짜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간단한 구조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거의 평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 이르러 처마만 살짝 들어 올렸다. 3층석탑 앞쪽에는 서쪽을 보고 엎드린 사자상이 있다. 그 위에는 남근석이 올려져 있다. 불교사상과 남근숭배사상이 결합한 구조물이다.
처음에 귀신사는 국신사(國神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고려시대인 12세기 초에 이르러 구순사(狗脣寺), 귀신사 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뀐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런 구조물을 세운 것은 지형이 구순혈(狗脣穴)이어서 풍수지리설에 따라 터를 누르기 위하여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면 소설에 썼던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란 얼마나 거창한 미화인가. 어쩌면 귀신사란 이름이 개의 입술이라는, 구순사(狗脣寺)가 음운변천을 거친 이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없다
언덕 뒤에 있는 대밭으로 간다. 귀신사는 철따라 자목련, 수국, 라일락, 모란꽃, 영산홍, 매화, 배롱나무 꽃 등 많은 꽃이 피어나 쉴 새 없이 도량을 장엄한다. 그것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눈에 띈다. 그러나 애써 찾지 않으면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진짜 '숨은 꽃'도 있다. 귀신사 대밭, 대나무 사이 사이에 심어진 야생 차나무들이 그것이다.
겨울을 나는 차나무의 잎들이 반질반질하다. 니체의 말이었던가. 느닷없이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없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 반질반질한 차나무 잎들은 차나무의 아름다운 내면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언덕을 내려온다. 대적광전 앞에 놓인 장독대 옆을 지나면서 본다. 장독 뚜껑이 하나같이 반질반질하다. 이것 역시 부지런히 뚜껑을 닦는 스님들의 내면이 반영된 것이리라.
아쉬운 마음을 안고 귀신사를 나선다. 잘 있거라, 귀신사여. 이제 너를 떠나고 나면, 내 쓸쓸한 내면은 가끔 네게 한 점 바람으로 머물던 오늘을 그리워할 것이다. 내 비록 신은 아니지만, 언젠가 영원을 찾아서 돌아다니다 지치면 쉬러 다시 찾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