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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은 우리 시대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저술가로 손꼽힌다. 내가 고종석 씨라고 부르지 않고 고종석이라고 말하는 건, 흔히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를 부를 때 '씨'를 빼는 관행에 따른 것이다. 친구들과의 잡담에서 내가 “원빈씨가 말이야”가 아니라 “원빈이 말이야”로 말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듯, 일면식도 없는 내가 그를 고종석씨라고 부르는 건 왠지 어색하다.

 

고종석은 그의 글에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이름 뒤에 '씨'를 붙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관행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아무튼 나는 고종석이라고 부르겠다(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작가가 연예인과 비슷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 이력을 보니 처음 책을 낸 때가 1993년이다. 신문기자 활동은 제쳐두더라도 책을 엮어 출판하는 저술가로서의 시작을 그때로 본다면 15년이 됐다. 20대 후반인 나는 사실 고종석이라는 저술가를 3년 전인 2005년에야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난 지식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교양서적을 찾아 헤맸고 그때 지인이 그의 <코드 훔치기>를 추천해준 것이다.

 

그 책은 한 세기의 전환점이었던 1999년 끝자락과 2000년 초 사이에 일간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은 칼럼집이다. ‘하루살이’ 매체에 실린 글이었지만 5년이 지나서 읽어도 세월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 글들은 신선했다. 이런 표현을 붙이기 좀 경박스럽지만 ‘유통기한’이 충분히 긴 글이었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실은 시사적 감수성이 5년이나 뒤처져 있던 탓도 컸다.

 

아무튼 그의 글에 나는 깊이 감명 받았다.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풍부한 통찰력도 물론이거니와 문학과 신문기사 중간의 어느 독특한 지점에 자리한 그의 문체 때문이기도 했다. 그 책을 시작으로 나는 그의 글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그는 글을 쓰는 데 비교적 인색하지 않아 각종 매체에 실린 기고문, 책으로 나온 칼럼집 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미 그는 수많은 칼럼을 썼고 그것들이 적지 않은 수의 책으로 엮어 나와 있었다. 나는 그의 15년 저술활동 중 가장 최근 3년부터 그를 알게 돼 역으로 그의 과거 글들을 찾아다니는 꼴이 됐다. 그러다 한 월간지에 실린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을 만났다.

 

그 글은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해 쓴 글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그는 명확하게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 논쟁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계급적 함의를 하나하나 벗겨낸다. 그리고 영어와 프랑스어, 한국어와 일본어의 예를 들며 각 나라 언어의 역사를 소개한다.

 

거기서 그는 은근히 영어를 편든다. 영어는 외래어의 유입을 아주 자연스럽고 개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풍부한 어휘목록을 갖춘 세계어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경제적 힘을 등에 업었지만. 이런 입장에서 그는 영어공용화가 한국어의 소멸을 가져오고 나아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우려를 일축한다. 글 말미에 나온 부분을 보자.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 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는(그 언어를 영어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로마 문화만이 아니라 태고 이래 그때까지의 동서 인류 문화를 한껏 빨아들인 영어일 것이고, 부분적으로 지방화된 영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의 한국 사회와는 달리 단일인종 사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피’를 나누지 않은 이웃들과 사귀는 법을 배울 것이고, 또 그들과 ‘피’를 나누는 법도 배울 것이다. ‘혼혈인’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경멸의 울림을 갖고 있기는커녕, 혼혈이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혼혈인’이라는 말이 사전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먼 미래에,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먼 미래에 말이다."

 

웬만한 단편소설보다 더 긴 논문 수준의 방대한 분량에서 앞뒤 문맥을 싹 잘라버리고 이 부분만 발췌해 글의 내용이 잘 전달될지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왠지 모르는 흥분이 느껴졌다.

 

그 흥분은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내가 굳건히 믿고 있던 한국인,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사실은 허구적인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것이 훼손된다 하더라도 내 실제 삶에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작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그 글은 내게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깨트렸지만 언어에 대한 관심을 만들어줬다. 언어학 박사 출신답게 그는 언어 내부를 깊게 관찰하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언어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꾸준한 관심이 몇 권의 책으로도 나와 있었다. 고종석을 처음 알았을 때 그의 시사적인 글들을 주로 읽었다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 글 이후부터는 언어에 관한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말들의 풍경> 세 책에 이르렀다.

 

글이 쓰인 시점으로 보자면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말들의 풍경> 순이지만 나는 그 역순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그가 써놓은 글을 내가 뒤늦게 찾아 읽었다면 <말들의 풍경>은 그가 글을 쓰는 시기에 내가 같이 읽어나간 유일한 책이다. 신문에 연재할 때부터 아주 관심 있게 읽었고 책으로 엮인 후에도 나는 주저 없이 구입했다.

 

그 이후 언어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감염된 언어>, <국어의 풍경들>을 내리 읽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말들의 풍경>에 나온 글 중 제법 많은 분량이 이미 <국어의 풍경들>과 <감염된 언어>에 실린 내용과 중첩됐다. 이를테면 <말들의 풍경>은 <국어의 풍경들>과 <감염된 언어>의 복습판인데, 나는 <말들의 풍경>으로 예습한 뒤 나머지 두 책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한 셈이다.

 

<국어의 풍경들>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우리가 모국어로 삼는 한국어에 관한 글이다.

 

그는 ‘국어’라는 표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영어를 국어라 하지 않고 영어라 부르고,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를 국어라 하지 않고 프랑스어라고 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한국어를 한국어라 부르지 않고 국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관행에서 일본 에도 시대 이후 번창했던 국학의 영향에서 흘러나온 자기 중심주의·주관주의를 짚어낸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한국어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역사적, 사회적, 언어학적 맥락에서 한국어의 위치를 재어볼 뿐 아니라 국어선생님의 자세로 한국어의 다양한 모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고종석의 글이 늘 그렇듯, 어렵고 딱딱한 내용은 자연스럽고 알기 쉽게 풀어내 독자들이 한국어를 탐험하는 데 아주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국어의 풍경들>이 1998년과 1999년 일간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은 터라 비교적 짧고 쉬운 글들이 수록돼 있는 반면 <감염된 언어>는 비슷한 시기에 주로 시사월간지나 문학계간지 등에 기고한 장문의 글이 수록돼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도 이 책에 실려 있다. 주제도 <국어의 풍경들>보다는 사회학에 더 가깝다.

 

그러나 두 책은 주제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책을 일관되게 꿰뚫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섞인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지론. ‘순수언어’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 요소가 다 그렇듯 한 언어도 서로 다른 요소들이 섞이고 섞이면서 풍부하고 더욱 튼튼해진다는 것이다.

 

영어가 지금처럼 세계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정치경제적 힘이 크게 작용한 덕도 있지만 영어 특유의 관용성도 한몫 했다는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한국어에 깊이 침윤한 한자어, 일본어, 서양 외래어를 불순하다고 여기는 국어순화론자들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유어의 상당 부분도 사실은 어떤 먼 과거의 외래 문명에서 온 말들이고, 우리가 외래어라 불리는 말은 비교적 최근의 외래문명이다. 고정된 것은 없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말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화하는 건 언어의 당연한 운명이다.

 

두 번째로는 그는 거의 모든 인위적인 언어정책에 반대한다. 언어를 결정짓는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어순화운동 역시 이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한국어의 언중이 자의든 타의든 외래어를 받아들이게 되면, 또 그런 말들이 이미 정착해 한국어 속 깊숙이 뿌리박혔다면 굳이 그들을 색출해 한국어 바깥으로 내버리려는 행동은 한국어의 미래를 위해서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언어가 언중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은 언어정책이라는 것이다.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한 그의 생각도 이 두 주제에 근거해 있다. 그는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자들이 그 근거로 민족주의적 관점을 끌어들이는 것은 명백히 거부하는 한편, 정부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단일언어 사회를 이중언어 사회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언어정책을 펴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영어공교육 논쟁이 시끄럽고 요란하게 불붙고 있는 와중에 언어에 관한 고종석의 세 책은 차분하고 깊게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세 책 중에 굳이 한 권을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 끝에 <감염된 언어>를 택하겠다. 나머지 두 책은 신문지면에 실린 글이라 비교적 가볍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감염된 언어>는 비슷한 주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세 책 외에도 고종석은 언어에 관한 다른 책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과 <언문세설>을 더 생산했다. 이 책들을 마저 읽고 독후감을 썼더라면 고종석에 대해, 언어에 대해 조금 더 풍부한 글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내 성급함과 능력의 부족으로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는 게 아쉽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나머지 독후감을 쓰겠다고 다짐해본다. 


국어의 풍경들 - 고종석의 우리말 강좌

고종석 지음, 문학과지성사(1999)


태그:#고종석, #말들의 풍경, #감염된 언어, #국어의 풍경들, #영어공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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