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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서울로 온 뒤로, 명절이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간다. 언제나 그렇듯 귀경길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래도 좋다. 따뜻한 엄마 품이 있고, 든든한 아빠가 있고, 문을 열면 나를 반길 우리 집만의 향기가 있으니까.

오늘도 나는 짐을 꾸려 서울역으로 향했다. 사실 짐이라 해봤자 기차 안에서 읽을 책 한권, 다이어리, 지갑과 파우치, 음료 정도. 그리고 부모님 선물이 담긴 쇼핑백 하나다.

오늘도 서울역 앞에서 KTX 여승무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있던 그들이 2008년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 쪽이 씁쓸해져 왔다. 부디 원래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기를 잠시나마 마음속으로 빌며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SMS) 발권으로 창구에서 매표하지 않고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출발이다. ‘집에 도착하면 한 쪽에는 과자 수북이, 한 쪽에는 과일 수북이 쌓아놓고 다 먹어야지, 집에 있는 건강식은 모조리 챙겨먹고 와야지’하고 각오할 무렵 KTX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기차의 출발과 함께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극성 또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트랜스 지방도 알아야 하고, 비틀즈의 히트곡도 알아야 한다

나는 조간신문을 펼쳐들어 읽기 시작했다. 명절 때면 기차 안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많다. 내 주변에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거나 올해 초등학교를 입학 할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내 뒤에는 5~7살 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남편과 누나가 있었다.

아들의 편식 때문에 엄마는 고민이 많았다. 야채나 과일은 먹지 않고 과자를 입에 달고 산다고 푸념했다. 어김없이 그 남자 아이는 계속 과자를 먹어댔다. 아삭아삭 거리며, 그 작은 체구에 어떻게 저 양이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먹었다. 엄마의 충고는 시작되었다.

"과자에 트랜스 지방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트랜스 지방 알지? 지금 과자 먹으면 이따가 할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 못 먹어."

아이의 과자 먹기가 대충 끝나자, 엄마는 ‘퀴즈놀이’를 제안한다. 아이는 거기에 응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기차는?” 엄마가 묻는다. 아이는 “무궁화”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아니야, KTX야”라고 말한다. 아이가 덧붙여 말한다. “근데 엄마 지난번에 부산에서 무궁화 기차가 이거보다 더 빨리 달렸는데?”라고 반문한다. 엄마는 “잠깐 동안만 그렇게 느낀 거야”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는 질문을 이어간다.

“비틀즈의 가장 유명한 곡은?” 아이는 “예스터데이(Yesterday)”라고 답했다. 엄마는 비틀즈 노래의 가사를 아이에게 묻고 읊조리기 시작했다. 꼬마아이가 벌써부터 비틀즈 노래를 알고, 가사를 알다니 새삼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요즘 꼬마들은 알아야 하는 게 참 많구나 싶었다.

우리는 영어책 갖고 와서 공부한다!

동대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어디선가 계속 영어 대화가 들려왔다. 동대구에 도착하여 내릴 준비를 하는데 영어 대화가 점점 크게 들렸다. 뒤돌아보니 이제 막 7살 된 남자아이와 엄마의 대화였다. 영어 대화라지만 영어 테이프 틀어 놓은 모양새와 똑같았다.

엄마가 아이 행동에 영어로 대답하고 아이는 Yes(예스) 혹은 No(노)의 단답형을 할 뿐이다. 이를 테면, 아이가 의자 옆 커튼을 만지면 엄마는 아이에게 “It's not clean"이라 말한다. 아이는 ”Yes"라고 답한다.

하차하는 내내 엄마는 영어로 아이에게 말했다. “Here, 동대구 station" 사람들이 한 번씩 흘깃해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어하는 엄마와 아들과의 인연은 환승한 기차에서도 계속 되었다.

나는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를 읽다 잠들었다. 갑자기 내 귓가에 영어가 맴돌았다. “I have two arms(나는 두 팔을 가지고 있다) Bird has two legs(새는 두 다리를 가지고 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소설책을 읽고 자서 그런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반복되는 영어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니 아까 그 엄마와 아들이 이제는 아예 영어책을 꺼내놓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Worm has none(벌레-지렁이, 거머리 등-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repeat after me(나 다음에 반복해)!"

11시 50분 서울을 출발해 1시 45분 동대구 환승을 거쳐, 3시 24분 포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인연은 지속되었고, 엄마의 영어 수업도 계속 되었다.

엄마들의 가장 큰 과제, 영어

몇 번의 귀경을 해봤지만 오늘 같은 귀경 풍경은 처음이었다. 나 역시 그런 적 없었고, 언제 도착할까 혹은 창 밖 풍경에 매료되어 창문에 매달려 있거나 자느라 정신없었다. 내가 어릴 때도 해외어학연수니 영어 학원이니 해서 말은 많았지만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 정말 ‘쨉도 안 된다’고 본다.

처음에는 ‘엄마가 주책이다’하고 생각했으나, ‘오죽하면 저럴까’싶었다. 사교육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엄마가 직접 나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요즘 아이들의 생활 속 영어를 위해 영어를 배우는 엄마들이 많다던데 그 중 하나이거나.

세계화 시대에 영어가 중요하다지만 껍데기만 덩그러니 전해주면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자연과 벗 삼아 사는 법도 알고, 영어로 말만 할 줄 아는 거 말고 자기의 생각이 담긴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쾌쾌한 매연 속에 높은 건물만 보다가 넓은 들판과 강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꼬부랑 영어에게 빼앗기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꼬맹이들은 붉게 물든 저녁 노을 아래서 친구들과 땅따먹기 하는 재미를 알기나 할까?

설 연휴에도 엄마들의 영어 고민은 계속 되었다. 아니 지금도 계속 된다.


태그:#귀경길,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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