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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소록도 자혜병원의 모습
 일제강점기 소록도 자혜병원의 모습
ⓒ 소록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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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던 승용차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우주 속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 운전하는 손에 힘이 느껴진다. 순간 붉은 두 눈이 멀리서 깜빡인다. 기를 쓰고 쫓아간다. 가까이 다가간다, 어김없이 달아난다. 불빛을 놓쳐버리면 금방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소록도 가는 길’.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이 절망과 싸우면서 찾아갔던 그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에 안개가 가득하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한하운 시인이 천형과도 같은 한센병과 싸우면서 걸어갔던 그 길을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 한 채 찾아가고 있다. 광주에서 두 시간이면 넉넉하게 도착할 이 길을 시인은 썩어 가는 발가락의 고통보다 더 깊은 절망과 싸워 가며 걷고 끌며 녹동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한센인들은 전국을 떠 돌며 방랑생활을 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한센인들은 전국을 떠 돌며 방랑생활을 했다.
ⓒ 소록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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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이나 일반인들은 한센인들이 생활하는 마을은 들어갈 수 없다.
 관광객이나 일반인들은 한센인들이 생활하는 마을은 들어갈 수 없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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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 강제노역 그리고 ...

소록도 국립병원은 1910년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시립나요양원’있었다. 당시 광주, 부산, 대구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한센병요양원이 있었다. 한센병은 ‘나균에 의해 피부와 말초신경을 침해하는 만성전염성 면역질환’이다.

지금은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전염성이 매우 낮고 치료가 가능한 병임이 밝혀졌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전염성이 높아 격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찾아낸 곳이 연중 날씨가 좋고 육지와 가깝고 물자 수송이 용이한 소록도였다.

1916년 이곳에 ‘자혜병원’을 세우고 99명을 격리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은 거처할 곳이 없어 움막, 다리 밑에서 유랑, 걸식하며 생활했다. 일제는 1933년 소록도 전체에 모든 한센병 환자를 수용할 계획을 세우고, 1935년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 한센병 환자를 강제 모집하였다. 해방 후 이곳에 6254명이 수용되기도 했다.

일제는 소록도 병원장에게 환자를 감금할 권한 등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당시 소록도 한센인들은 눈을 뜨면 바다에 나가 바지락을 캤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 송진을 땄다. 점심때는 벽돌을 굽고, 집에 와서는 가마니를 짰다. 자신이 찍은 벽돌로 감금실을 짓고, 해부와 강제정관수술을 할 검시실을 지었다.

1935년에는 이곳에 광주형무소 소록도지소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병원에게 재판 없이 견책, 30일 이내의 근신, 7일 이내의 주부식의 1/2 감식, 30일 이내의 감금, 총독부허가를 얻어 60일 감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강제노역을 견디다 못해 작은 나무에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다.

뭍으로 나가다 잡히면 감금실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 강제정관수술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1936년 부터 시작된 강제정관수술은 부부동거를 전제로 1970년대까지 실시하였다.

1935년 한센인들이 만든 벽돌로 지은 검시실, 감금실에서 석방되거나 부부동거를 전제로 강제정관수술이 시행된 곳으로 2004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35년 한센인들이 만든 벽돌로 지은 검시실, 감금실에서 석방되거나 부부동거를 전제로 강제정관수술이 시행된 곳으로 2004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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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를 도망치다 잡힌 한센인들에게 찍었던 낙인
 소록도를 도망치다 잡힌 한센인들에게 찍었던 낙인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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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소록도에 온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중앙공원이다. 황토뿐인 곳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어 수호원장이 그리는 ‘낙원’을 만들어냈다. 각국에서 가져온 나무와 꽃으로 정원을 꾸몄다. 공원의 돌들은 인근 득량도와 완도에서 한센인들이 목도와 노 젓는 배로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운반해온 것들이다. 이 과정에 바다에 빠져 죽은 한센인도 있었다.

중앙공원에는 소록도 해설사가 있다. 그도 병력자다. 짙은 선글라스로 눈과 얼굴을 반쯤 가린 그는 자신의 경험과 빼어난 말솜씨로 1시간여 가량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여기 공원은 처음에 황토 흙만 있었습니다. 아무리 땅을 파도 돌 하나 나오지 않는 곳이었지요. 이 돌은 완도에서 가져왔습니다. 배에 싣고 노를 저어 왔지요. 목도로 이곳까지 운반해와 정원을 꾸몄습니다. 돌을 운반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1940년에 완공된 중앙공원 가운데 구라탑이 있고, 언덕배기에 개원 4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이 세워졌던 곳은 소록도 4대 수호(周防正季) 원장의 동상에 있던 자리다. 수호 원장은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로 만들겠다는 욕심으로 원생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자신의 동상을 세워 참배까지 하게 했던 인물이다.

원생들은 끊임없는 강제 노역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도주하고 물귀신이 되기도 했다. 수호원장은 원생을 동원하여 매년 140만 장의 벽돌을 만들 수 있는 공장을 짓고 섬 내 요양시설, 창고를 지었다. 일주도로도 만들었다. 벽돌을 만들고 도로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는 환자들은 송진을 따야 했고 가마니를 짜야 했다.

견디다 못한 원생 이춘상은 1942년 6월 동상을 참배하는 정례 보은감사일에 원장을 가로막고 ‘너는 환자에 대해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고 소리치며 칼로 찔렀다. 원장은 과다 출혈로 관사에서 죽었다. 이춘삼은 사형장에서 ‘원장을 죽인 것은 개인감정이 아니라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하여 시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살해 동기를 밝혔다.

그런가 하면 2대 원장이었던 하나이 원장은 일본식을 강요하는 초대 원장과 달리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원생들에게 헌신적이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원생들이 하나이 원장의 공덕비를 세우려는 것을 수호와 달리 그는 강하게 반대했다. 순직한 이후 원생들은 모금을 해 자혜병원 앞에 공덕비를 세웠다.

소록도 원장의 동상이나 비석을 세우는 일은 대부분 원생들의 모금에 의해 ‘자발’(강요된 자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떨어져 나가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천으로 감싸며 환자들이 앞장서 일본인 병원장 동상도 세웠다. 스스로 터득한 소록도에서 거주하고 있는 그들 나름의 생존방법이었다.

한센인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적혀 있는 이 돌은 중앙공원을 조성하면서 인근 섬에서 한센인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옮겨온 돌이다. 해방 후 한센인들이 한하운 시인의 시를 새겼다.
 한센인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적혀 있는 이 돌은 중앙공원을 조성하면서 인근 섬에서 한센인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옮겨온 돌이다. 해방 후 한센인들이 한하운 시인의 시를 새겼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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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해방후 병원 운영을 둘러싼 갈등 속에 희생된 84명의 유골을  발굴하여 추모비를 세웠다.
 2001년 해방후 병원 운영을 둘러싼 갈등 속에 희생된 84명의 유골을 발굴하여 추모비를 세웠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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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소록도의 해방

소록도에도 어김없이 해방이 찾아왔다.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병원장을 비롯한 일본인들은 모두 섬을 빠져나갔다. 원생들은 병원지대에 있던 신사를 불태우고 교도소 죄수들과 감금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석방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병원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이 빠져나가자 행정직원들과 의사들 간에 운영권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투표를 통해서 직원들이 운영권을 가져갔지만, 석사학등 의사들은 원생 대표에게 ‘직원들이 식량과 의약품을 섬 밖으로 빼돌리려 하니 막아야 한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

생계문제와 직결된 원생들은 몽둥이와 삽으로 무장하고 직원지대로 쳐들어가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직원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고흥 치안유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치안대는 협상을 위해 나온 원생대표들을 모두 사살하고 모래구덩이에 송탄유를 붓고 시신을 불태워 묻었다.

이 사고로 원생대표 90명 중 84명이 죽었다. 이후 56년만인 2001년 유골 발굴작업을 거쳐 그 자리에 한센 가족의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위한 추념비를 건립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는 소록도-2,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입니다.



태그:#소록도, #한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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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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