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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 시작한 산행

신라 제55대 경애왕릉
 신라 제55대 경애왕릉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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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에서 경주로 가는 길은 68번 지방도가 지름길이다. 시내로 들어와 다시 오늘 답사지인 배리 삼릉으로 간다. 먼저 경애왕릉을 보고 삼릉으로 해서 금오산에 오르기로 코스를 정한다.

경애왕(924-927)은 실질적인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신라 55대왕으로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상대국 왕이 한 나라의 수도를 유린할 정도이니 신라는 이미 나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경애왕릉에서 한 삼사백 미터쯤 가면 삼릉이 자리하고 있다. 삼릉은 세 개의 능이 모여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 묻힌 세 임금은 아달라 이사금, 신덕왕, 경명왕이다. 이들은 모두 박씨 성을 가진 임금들로 아달라 이사금은 신라 초의 왕이고, 신덕왕과 경명왕은 신라 말의 왕이다.

아달라왕 등 세 왕이 모셔진 삼릉: 뒤로 금오산이 보인다.
 아달라왕 등 세 왕이 모셔진 삼릉: 뒤로 금오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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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154-184)은 신라 8대 왕으로 백제와 갈등을 겪으면서 영토를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즉위한 지 3년 되는 156년 지금의 하늘재인 계립령을 열었고, 5년 되는 158년 죽령을 열었다. 이것은 신라의 영토를 소백산맥 지역까지 넓혔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20년 정월에 왜국의 여왕이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과도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신덕왕(913-917)은 헌강왕의 사위로 왕이 되었다. 효공왕이 자식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즉위할 수 있었고, 궁예와 견훤 등과 삼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경명왕(917-924)은 신덕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 왕건이 세운 고려와 가까이 지냈다. 후당과 교류하였으며, 후백제와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신라 말에 내치와 외치를 가장 잘한 왕이었다.
     
냉골에서 만난 부처, 부처, 부처님

목이 없는 석조여래좌상
 목이 없는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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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왕릉을 보고 우리는 냉골을 따라 금오산으로 향한다. 냉골은 한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고, 삼릉이 있는 계곡이라고 해서 삼릉골이라고도 부른다. 한 10여 분 오르니 석조여래좌상이 나타난다. 1964년 6월 동국대학교 답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머리가 없어서 그렇지 가사의 조각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특히 왼쪽 어깨로부터 무릎까지 흘러내린 매듭끈과 가슴 부위 매듭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바위에 새겨진 마애관음보살입상을 볼 수 있다. 왼손은 정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들어 올려 가슴에 대고 있다.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는 조각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다시 5~6분 위로 올라가면 유명한 선각육존불을 만날 수 있다. 말 그대로 바위에 선으로 새겨 만든 여섯 분의 부처님이다.

선각육존불의 왼쪽면: 아미타삼존불
 선각육존불의 왼쪽면: 아미타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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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한 덩어리의 바위인데 왼쪽 부분이 앞으로 조금 나와 있고, 오른쪽 부분이 조금 들어가 있다. 그래서 약간 층이 진 양 면에 각각 세 분씩 부처님을 새겨 넣었다. 왼쪽에 있는 부처님이 아미타삼존이고, 오른쪽에 있는 부처님이 석가삼존이라고 한다. 특히 왼쪽의 세 분 부처님 조각이 선명한데, 본존은 연꽃 대좌 위에 서 있고 좌우의 보살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아미타부처님께 연꽃을 바치고 있다.

이에 비해 오른쪽 석가삼존상은 선각이 약해 아미타삼존만큼 선명치는 않다. 또 바탕이 되는 바위에 균열이 생겨 도상을 확인하기가 더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고 좌우에 두 보살이 서 있는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방울 세 개를 꿰어 만든 방울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이 쉽지는 않다.

선각마애불
 선각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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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10여 분 올라가면 선각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이것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옛날에 짝은 사진을 보니 얼굴은 낮게 돋을새김 했고 옷 주름은 선으로 처리했다.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미련해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더 친근감이 든다.

미련해보이는 석불좌상(일명: 석조여래좌상)
 미련해보이는 석불좌상(일명: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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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을 위해 차양막 속에 있는 석불좌상
 복원을 위해 차양막 속에 있는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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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마애불에서 다시 20여 분 이상을 조금 가파르게 오르면 석불좌상(보물 제666호)을 만날 수 있다. 이 부처님은 석조여래좌상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문화재청에서 조사와 복원을 하기 위해 관람을 막고 있다. 차광막 속에 들어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한 2년 전 이 불상을 보았을 때 다 좋은데 부처님 상호가 영 마음에 안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복원했는데 그것이 영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뒤가 더 아름다운 부처, 그래서 이번에 복원작업에 들어간 것 같다.

상선암 가는 길

석불좌상에서 다시 금오산 정상 방향으로 15분 정도 가니 상선암(上禪庵)이 나온다. 옛날과는 달리 나무계단이 있어 절에 오르기가 훨씬 쉬워졌다. 이 절의 대웅전에서 우리가 올라온 방향을 내려다보니 골짜기를 돌아 들판과 산이 펼쳐진다. 다시 눈을 들어 금오산 쪽을 바라보니 절 뒤로 상사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 이 절을 돌아가다 보니 한쪽에 누운 바위에 선각보살상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물결처럼 흘러내린 옷주름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허리 부분에 끈으로 묶은 방울도 몇 개 보인다.

마애석가여래좌상
 마애석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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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살상을 지나 왼쪽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큰 바위 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이 부처님의 공식 명칭은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바둑바위로 알려진 큰 암반 남쪽 면을 파내서 광배를 만들고, 그 위에 입체형의 마애불을 조각했다. 머리와 몸통 부분은 양각했고, 팔과 손 그리고 옷 주름은 음각했다. 얼굴 표정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데, 앞에서 보면 근엄하고 옆에서 보면 인자하다.

이 불상은 금오산 정상 쪽을 바라보며 있고, 앞으로의 전망이 탁 틔어서인지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뭔가 기도를 한다. 이곳은 남산 전체에서 소위 기도발이 가장 잘 받는 곳으로 유명하다.

상선암과 마애불 뒤의 바위군: 상사바위와 바둑바위
 상선암과 마애불 뒤의 바위군: 상사바위와 바둑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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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이곳 냉골에는 16기의 불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가 보물과 지방문화재 급이어서 문화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높은 편이다. 또 이들 부처의 모양이나 형태가 모두 달라 보는 사람에게도 큰 즐거움을 준다. 우리의 불교 문화재들은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시각적인 즐거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냉골은 남산의 골짜기 중 답사 일번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태그:#냉골, #경주, #선각육존불, #신라,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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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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