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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백화산(상)
 

 

크리스마스 저녁, 구 반포에 약국을 개업한 여동생 집들이 때 집사람 동의 없이 추가로 20만원을 써버린 내 처사가 집사람의 심기를 매우 어지럽히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집사람을 달래려면 산행이 좋다. 토요일 오전에 운기조식하고 오후엔 간단한 등산 장비를 챙겼다. 집 앞에서 시작되는 계룡산 설희계곡 우측능선을 지나 615고지-수정봉-금잔디 고개에 이르는 코스를 선택하여 등산을 시작하였다.

 

금잔디 고개를 돌아 집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5시간 산행이었다. 하산 도중 날이 저물었다. 야간 하산 길은 오붓한 정담에 맞는 분위기였으나 집사람의 심기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늦은 아침 식사 후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내 앞에 집사람이 등산 지도책을 내민다. 기분도 전환하고 나들이도 겸할 수 있는 산으로 가자! 때가 때인지라 거절할 수 없다. 억지로 무거운 육신을 움직여 산행 장비를 챙긴다. 헤드랜턴, 지도, 컴퍼스, 버너, 코펠, 아이젠, 스패츠, 스틱, 방한복 등 하드웨어는 내 몫이고, 먹을 것들을 비롯한 소프트웨어는 집사람 몫이다. 집사람의 산행준비를 위한 행동은 물 찬 제비 같다.

 

백화산 등산로 입구를 향하여

 

대덕밸리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니 10시 50여 분이다.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이제 내친 걸음이다! 기왕에 나선 산행이니 집사람 기분을 풀어주자는 생각이 든다. 

 

어흠~ 흠,

 

이번 산행 대상은 백화산이다. 백화산은 겨울철 눈 덮인 모습이 하얀천을 씌운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과거 박해 받은 천주교 교인들이 은신해 살았던 외진 곳이다. 백화산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의 1000m 가 약간 넘는 산으로 괴산군에서 가장 높다.

 

속리산 문장대, 대야산, 희양산으로 뻗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마치 용트림 하는 것 같이 굽이쳐 다시 이화령을 넘어 문경 세재의 조령산으로 연결되는데 이 백화산이 용트림의 정점이 된다. 성철스님이 불교의 진흥을 추진하면서 기거하신 봉점암을 배태하고 있는 희양산이 용트림의 기점이 된다.

 

나는 대상산을 고르면서 읽어두었던 백화산에 대한 얄팍한 지식에다 살을 덧붙여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늘어놓았다. 비로소 집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에라! 기분이다. 집사람이 좋아하는 노래까지 한곡 선물하자!

 

아직도 네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느새 집사람도 노래를 따라 불러 합창이 된다. 나는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흐려진 안개가 된다.

 

사랑하고 싶어요. 살아 있는 날까지

 

집사람의 손목을 꼬옥 쥐어본다.

 

경쾌한 리듬을 탄 우리의 케러밴은 질주하는 한 마리 적토마다. 120, 130, 140km/hour. 어느새 증평 톨게이트이다. 통행료를 받는 아줌마에게 우리의 좋은 기분 전해주고 괴산 길로 접어든다. 속리산, 월악산, 소백산 산행 때 수 없이 다니던 낯익은 길이다. 괴산 시내에 들어서자 백화산 등산로를 확인하기 위하여 차를 도로 한쪽에 세운다.

 

“여보, 지도!”   

 

집사람은 뒷좌석의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건네준다.

 

"어?"

 

분명히 속리산 지도와 충청도 내륙지도를 챙겼건만, 집사람이 건네준 지도는 속리산 지도와 지리산 주변의 지도이다. 넋을 잃은 내 모습을 한동안 즐기던 집사람이 한번 봐준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여보, 지도가 없으면, 초행길인 백화산은 가기 힘들고 시간도 늦었으니 우리가 잘 아는 희양산으로 대상산을 바꾸자. 은티 마을엔 막걸리주막도 있고 하니…….”

 

어떻게 시작한 산행인데, 이런 일로 대상산을 바꾸거나 포기할 수 없다. 대상산은 오늘의 우리 목표다. “일단, 이화령 산장까지 간다.”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도중의 휴게소와 이화령 산장에서도 지도를 살 수 없었다. 포병 관측장교였던 나는 지도가 없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다.


이화령 산장에서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집사람이 상점 점원에게 백화산 등반로를 묻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2km 정도 문경 쪽으로 내려가면 농산물 판매장이 있고, 거기에 가면 백화산 등산로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원의 답변이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집사람에게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농산물 판매장에 이르러 백화산 등반 안내판을 발견하였다. 안내판에 의하면 백두대간 마루금까지 30분, 백두대간 능선으로 백화산 정상까지 2시간 30분 거리다. 정상적인 산행시간으로 왕복 6시간 거리다. 지금은 1시 30분이다. 산에 눈이 많이 쌓여 지체된다면, 저녁 8시 이후에야 이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결론이다.

 

여우를 쫒으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

 

안내판에는 단축 코스로 보이는 오석골 등반로가 표시되어 있다. 찾아가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여보 ! 오석골 코스가 지금 상황에선 더 나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대장이 알아서 하세요.” 

 

내 체면을 고려한 대답이다.

 

문경으로 향하는 도로로 접어들었지만, 오석골 입구는 오리무중이다. 3번 도로에서 977번 국도로 접어들자 가은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는 모두 틀렸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집사람은 사태를 짐작했는지 가은으로 가서 봉정암이나 구경하고 수안보 온천에 들려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우측으로 펼쳐지는 산맥이 백두대간 같다. 아무래도 오석골 뒤편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 차에서 내려 상황 판단을 해보자는 생각에 차를 도로변에 세운다. '백화산 만덕사' 입구라고 새긴 안내 돌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인 등산로 반대쪽으로

 

으잉!

 

만덕사 입구로 접어들어 한동안 가다가 비닐하우스를 수리하는 2명의 농부에게 백화산 등산로를 묻는다. 만덕사까지 차로 가서 보살들이 기거하는 집 뒤로 난 길을 따라 가란다. 대웅전 뒷길로 접어들면 경사가 급해 많은 고생을 하게 되니 주의하라는 경고 안내까지 보태준다. 길을 계속 가다보니 큰길은 끊긴다.

 

 

농로를 따라 걷다보니 감나무에 따지 않았던 감들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다. 별다른 맛이 나는 겨울 정경이다. 한참 걷다보니 조그만 암자가 보인다. 나는 그 절을 만덕사로 생각했다.  집사람은 우리가 걷기 시작한 지점에 만덕사까지 2.6 km 표지석이 있었는데 이상하다고 한다. 우리는 1km를 채 못 온 상태다.

 

지도가 없어 장님이 된 나는 계속 가 볼 수밖에 없다. 절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계곡 쪽으로 난 큰길과 합쳐진다. 이제 감을 잡을 것 같다. 조금 전에 절은 만덕사가 아니고 이 길을 따라 1.6 km 올라가면 만덕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등산을 했왔지만 오늘 같이 시행착오의 연속인 날도 없었던 것 같다. 우울한 마음에 미루(진도개 강아지)를 앞세우고 묵묵히 걷는다.  만덕사에 도착하였다. 대웅전도 있고 보살들이 기거하는 부속 건물도 있다. 만덕사 앞에는 돌하루방이 양쪽에 서 있다. 절에 돌하루방이라?

 

절의 우물에서 목을 축이면서 등반 계획을 점검해 본다. 지금은 오후 3시 20분이다. 그 고생을 했던 장안산 등반 때보다도 더 늦은 출발이다. 겨울철 백두대간 상에서 2시간 이상의 야간등반을 각오해야  할 산행이다. 나는 초행길 야간등반의 의미를 잘 안다. 지금은 겨울철이고 대상산은 1064m의 높은산이다.

  

강행? 아니면 철수?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충분한 준비없는 겨울 산행은 매우 위험합니다. 


태그:#백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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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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