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는 인간의 죽음을 두려워 하는 심리와 영생을 바라는 심리가 복합되어 많은 전설을 낳았다. 이러한 바위의 상징에 많은 사람들은 신비한 환상과 전설을 바위의 얼굴에 덧칠한다.
세월이 오래된 '천년 바위'들은 가만히 보면 또 이상하게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오래된 바위에 구도자적인 함축적 의미를 새겨 넣은 바위는, 그 바위의 영원성의 상징에 의해 더욱 신성케 된다.
옛 우리의 선인들은 돌(바위)을 십장생의 하나로 여겨왔다. 바위와 돌멩이들이 유난히 많은 천년의 산, 장산에 올라오면 천년의 바위에 비해, 인간의 두 자리 숫자를 넘지 못하는 나이란, 한갓된 순간이 된다.
조선 시대 선비 중에 허련, 조윤형, 정학교, 박태희, 강진희 등이 즐겨 괴석을 그렸다고 한다. 세계적인 우리나라 사진 작가 '김석중(김아타)'씨도 초기에는 바위를 많이 찍었다. 유명한 김홍도의 '사인암'과 '강세황의 '영통동구'의 바위 그림들은, 이 분들의 어떤 그림보다, 화가의 개성과 혼을 느낄 수 있다.
바위나 돌은 영험과 신격화된 인물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경주 남산과 남해 금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부처의 형상을 새긴 바위들은 바위 이상의 초월성을 띤다. 하지만 어떤 종교 대상이 투영된 바위들은, 사실 바위다운 자연의 미를 잃는다.
그렇다면 장산의 많은 바위들은 바위다운 자연 그대로의 바위. 금강산 만물상이나 설악산의 바위와 달리, 장산의 바위들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처럼, 순수한 바위들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처럼, 이름없이 살아도 경건한 삶의 모습을 닮은 예사롭지 않는 바위들… 가만히 보면 평범하지 않게 생겼다. 평범하지 않아서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 바위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새기는 것을 좋아한다. 산에 가면 사람의 이름은 얻은 바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새기는 행위에 대해 불멸의 생명력을 얻으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무의식 속에 나타난 이러한 바위에 대한 관념들과 달리, "잠시라도 바위 속에서 살아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약점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는, '바슐라르'의 말에서, 바위의 다른 역설적 의미도 새겨 볼 수 있다.
장산의 바위들은, 각각 바위 속의 신령한 영혼이 깃든 듯, 신묘한 느낌을 준다. 다양한 사람의 모양을 한 바위의 형상들이 저마다 살아온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동해의 어룡들이 골짜기의 돌로 변하여 종경 소리를 냈다는 '어산 불영 전설'과, 며느리가 승려가 일러 준 금기를 깨는 바람에 바위로 변하였다는 '장자못' 전설도 덩달아 떠올리기 충분한, 장산의 기묘 형형한 이름 없는 바위의 모양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는 평범한 구도자의 얼굴이 겹쳐진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바위들도 이름을 불러 줄 때 제 존재의 의미를 찾을까. 평범한 우리네 삶 속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장산 바위야' 하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바위는 제 경건한 바위의 삶 속에 내재한 큰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기뻐할 것 같다.
장산의 바위들… 우리네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모습을 닮아서 너무 정겹다. 바위마다 꽃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빌려서 불러보는 겨울 산행길.
문득 뒤돌아 보면, 이제껏 물처럼 아쉽게 흘러보낸 시간들이, 모두 돌이 되어 서 있을 것 같다.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수이 지고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아마도 변치 아닐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윤선도 <오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