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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합니다. 모두들 쉽고 재빠른 것에만 열광하는 지금, 느림의 미학은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지요. 그럼에도 가느다란 시간의 궤적들을 무덤덤하게 하나하나 그려가는 이들도 있답니다. 푸릇푸릇 청량한 겨울 팔공산에서 앞만 보고 달음박질해 온 속도의 굴레를 한 번쯤 벗어나보는 건 어떨는지요?
 
 
골짜기 가득 향긋한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수태골)
 
오늘 하루만큼은 무턱대고 길을 나선다. 빈틈없이 잘 짜인 답사 길에 이제 조금씩 염증이 나려는가 보다. 별다른 사전 정보도 없이 낯선 길을 헤매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어쩌면 아무런 소득도 없는 한낱 시간낭비일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산행의 목적을 굳이 일러보라면 ‘얽매이지 말고, 발길 닿는 대로, 마음껏 즐기자’이다. 늘 가까이 있어 너무나 먼 당신, 팔공산의 넉넉한 가슴팍에 무시로 안기고 싶다. 팔공산 순환도로를 끼고 달리다 보면 수태골의 짙은 녹음이 골짜기 가득 향긋이 코끝에 전해온다.
 
팔공산(1192m)은 북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군위군 부계면, 칠곡군 가산면에 접해 있고, 남으로 대구광역시를 감싸 안은 대구의 진산이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서 20㎞에 걸쳐 긴 능선이 이어지는데 수많은 하천과 계곡을 한 품에 거느리고 있다.
 

팔공산 등산에서 수태골 코스는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산길이다. 수태골 등산 안내소를 거쳐 계곡으로 접어들자 넓고 완만한 등산로가 솔숲 사이로 내내 이어진다. 옛날부터 이 골짜기에서 기도를 올리면 아기를 얻는다 하여 ‘수태골’이라 했다는데, 실은 계곡의 아름다운 물이끼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10분 정도 왔을까? 울창한 숲속에 놓인 커다란 바윗돌에 등산객들이 몰려들어 웅성댄다. 바윗돌은 윗면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전체적으로 모가 둥근 삼각형인데, 아래쪽에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라 음각된 명문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봉산표석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포근한 산길을 타박타박 걸어간다. 산행기점에서 얼마 멀지 않은 초입임에도 명산의 진면모는 곳곳에 즐비하다. 기암절벽에 아스라이 곡예를 넘는 바위산들이 수직의 사면을 따라 겹겹이 흘러내리는 진풍경이 아찔하기만 하다.
 
순간 거대한 암벽이 하늘로부터 시원스레 미끄러진다. 경사각이 60~70도 남짓한 너럭바위인데,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초심자에게 적당한 훈련바위이다. 널따란 슬래브 곳곳에 등반 흔적이 드문드문한데, 겨울철이라 암벽을 타는 클라이머들의 훈련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바윗골 야영장을 벗어나자 등산로는 점점 좁고 가팔라지는데,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방재사거리를 지나 속도를 붙이니 이윽고 동봉과 서봉의 갈림길이다. 간간이 비탈진 등산로는 아직 살얼음판이라 한 걸음 떼어놓았다가는 미끄러지기 일쑤이다.
 
하늘 향해 날개를 드리운 공산의 물결 같은 산자락(동봉)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으로 얼마나 조바심쳐왔을까? 정상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팔공산의 산정은 비로봉인데 레이더 기지 때문에 사실상 출입이 통제되어 동봉이 주봉을 대신하고 있다. 멀찍이 돌아앉은 약사여래불을 두고 우선 깃대를 꽂으려 정상으로 딛고 오른다.
 
동봉 정상은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친다. 누구 하나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다. 먼빛으로 아스라이 잦아드는 물결 같은 산자락이 너울거리고, 하늘 향해 날개를 드리운 공산의 힘찬 활개짓이 한 줄기 바람을 몰고 와 시시때때로 가슴을 파고 든다.
 

겨울 산의 깊은 여흥이 꼬르륵 배고는 소리에 순간 깨어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어느 덧 점심이다. 정상에서 내려와 적당한 자리에 밥상을 편다. 김밥, 컵라면, 부침개, 과일 등등 작은 배낭에서 연거푸 쏟아져 나오는 풍성한 안줏거리에 어찌 주당들이 잠자코만 앉아 있을까? 달달한 정상주 한잔을 들이키니 향긋한 곡주 내음이 오래도록 입속을 감돈다.
 
팔공산은 약사신앙의 일번지다. 그 유명한 갓바위 부처님을 제외하더라도 오랜 신앙의 흔적은 골짜기마다 여실하다. 대구시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된 팔공산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이 우람한 모습으로 든든히 동봉을 지키고 섰다. 약사여래상 주위는 조그맣게 자리를 마련한 산악회회원들의 시산제 준비로 여기저기 부산스러운 모습이다.
 

시산제가 끝난 뒤 막걸리 한잔으로 간단히 음복을 한다. 벌렁거리는 콧구멍에 꼬깃꼬깃 배추 잎 한 다발을 꽂은 돼지머리가 너스레를 떨며 빙그레 웃음을 흘린다. 못내 아쉬웠지만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염불암과 부도암을 경유하는 동화사 코스로 하산을 시작했다.
 
중생의 심금을 울리는 불보살의 은은한 염불소리(염불암)
 
동화사의 산내암자 염불암은 산자락 가운데 둘러싸여 아늑하고 포근하다. 먼저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마당에 쪼그리고 앉은 자그마한 청석탑이다. 탑은 네모난 유리 상자에 비좁게 갇혀 있는데, 작은 구멍으로 간신히 숨 쉬는 모습이 바라보기에 안쓰러울 지경이다.
 

청석탑을 돌아 야트막한 계단을 오르면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뒤뜰인데, 커다란 바위의 서쪽과 남쪽 면에 각각 여래상과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마애불의 조각수법은 그다지 뛰어난 수작은 못 되지만, 전체 높이가 4m를 넘어서는 대불이다. 부처님 곁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 한동안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여래상은 두툼한 연꽃에 앉아 고요히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얼굴이나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화려한 연꽃대좌의 정교한 조각수법과 발가락의 섬세한 표현 등에서 세심한 손길을 엿볼 수 있다. 좌법은 결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단정히 아랫배에 둔 선정인(禪定印)의 수인을 맺었다.
 
남쪽면의 마애불은 가슴을 타고 흐르는 옷자락이 양 무릎을 덮고 내린다. 머리에는 부채꼴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어 한 눈에 보살상임을 알 수가 있다. 입과 코사이가 짧아 전체적인 인상은 둔중한 편인데, 오른손을 가슴 윗부분에 들어 엄지와 검지로 한 줄기 꽃대를 잡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선각의 두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상서로운 봉황이 깃든 영남승병의 요람(동화사)
 
염불암을 내려와 동화사로 길을 잡는다. 울창한 솔숲과 켜켜이 쌓아올린 돌무지 탑이 힘겨운 산행의 끝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 넣는다. 청량한 팔공산의 맑은 기운을 한 모금 들이쉰다. 가슴 밑까지 가라앉은 세속의 탁한 앙금이 한순간에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린다.
 
팔공산 등산로 중 동화사코스는 명산의 진풍경을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에 더해 또 하나 즐거운 것은 팔공산의 거찰 동화사를 공짜로 입장할 수 있는 행운일 게다. 산도 보고 절도 보고 금상첨화가 아닌가? 서둘러 발품을 팔지 않을 까닭이 없다.
 
경내로 들어서자 2층의 봉서루(鳳棲樓)가 산문을 굳게 지키고, 팔공산의 늠름한 산자락이 견고하게 성벽을 둘렀다. 벽오동에 깃들어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영물이 봉황이라고 하니 오동나무 꽃이 만발했다는 동화사에서 봉황을 마주치는 일이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봉황이 깃들은 봉서루 아래 돌계단을 지나 대웅전 축대에 가만히 걸터앉는다. 유리창 속 푸른 하늘로 활짝 날개를 편 동화사 대웅전이 날렵하게 솟구쳤다. 대웅전 위 아담하게 걸린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란 편액이 절집의 오랜 내력을 어렴풋이 귀뜸해 준다.
 
동화사는 임란왜란 때 영남승군의 총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절집인데, 당시 사명스님이 승군의 총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사명당대장진영(泗溟堂大將眞影)을 비롯해 승병활동의 정황을 알려주는 몇몇 유물들이 지금껏 온전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웅전 외벽은 새롭게 단장한 심우도로 화려하다. 그런데, 소를 다루는 동자의 거침없는 모습이 사뭇 이색적이어서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잡아끈다. 과거 승병이 머무른 절집이라 그런지 마음을 찾아가는 방편도 여타의 산문과는 다른가 보다. 마치 격투기에서나 봄직한 동자의 거센 발길질에 야성의 검은 소가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동화사를 둘러보고 하산하는 길에 따뜻한 감잎차 한잔을 우려낸다. 순결한 백자의 흰 바탕에 향긋한 푸르름이 밀려온다. 정성껏 달여 낸 고운 차 한 잔이 세간의 번잡함을 슬금슬금 녹여내듯, 느닷없이 떠나온 겨울 팔공산에서 마음은 걸음걸음 더디어만진다.
 

덧붙이는 글 |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www.uriul.or.kr). 대구 경북 신년 번개산행의 동행기록입니다.


태그:#팔공산, #수태골, #동봉, #동화사, #염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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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지역 대학생문학연합(효가대 난문학회) 동인/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문화지킴이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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