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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봄을 잊지 못한다. 4월26일 서울에서 강경대 학생이 공권력에 희생되었다. 4월 29일 광주에서 전남대학교 2학년이던 박승희 학생이 공권력의 폭력에 침묵하는 국민들에게 미국 반대와 단결투쟁을 화두로 남기고 분신했다. 박승희 학생 이후 11명의 청년학생들이 폭력에 대한 불감증을 질타하고, 반미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살랐는데 역사는 당시를 ‘분신정국’이라고 한다.

서럽게 보낸 5월이었다. 나라 잘못 만난 죄로 제 몸에 불을 붙여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절망은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고통이었다. 그 때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들고 뛰어다니며 공권력을 부수고자했던 젊은이들의 열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더구나 자살의 배후가 있다는 신부님, ‘죽음의 굿판’이라고 매도했던 시인, 유서를 대필했다며 젊은이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세웠던 권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던가!

1991년 5월 19일, 박승희 학생이 죽던 날 이루어낸 ‘운암대첩’은 학생 운동사에 승리의 한 장으로 기억된다. 국민이 공권력을 상대로 싸워 이긴 사실을 ‘대첩’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불경죄(不敬罪)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대첩’이라는 표현을 자랑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청년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때의 정부가 군부독재의 연장이었지 결코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잇는 정부가 아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총회에 모인 사람들
ⓒ 김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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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12일, 토요일 오후 6시 전남대학교 제2학생관에는 페퍼포그에 맞서 맨주먹으로 ‘운암대첩’의 승리를 이루어냈던 주역들이 다시 모였다. 정부가 자존심을 걸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막고자했던 박승희 학생의 도청노제를 하기 위해 쇠파이프를 들었던 당시 예비역 학생들이 이제는 사장, 교사, 교수, 의사, 공무원, 학원 원장님이 되어 다시 모였다.

2007년을 결산하고, 2008년의 계획을 세우는 정기총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가면서 솔직히 내심 불안했던 나에게 12일의 모임은 뜻밖이었다. 대선 후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 즉 어떤 모임에도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부가 아이들을 동반하고, 아직 미혼인 젊은이는 애인과 함께 교수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집행부의 노력도 돋보이는 잔치였다. 그러나 뜻 없는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그렇게 모일 수는 있었을 것인가!

 어른들의 축사
ⓒ 김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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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행사는 풍물패가 열고 대학생들은 노래로 화답하고, 결산보고와 신년계획을 승인한 총회는 간단했다. 정희곤 회장의 인사, 진보연대의 오종렬 공동의장과 전국 추모연대의 박중기 회장의 축사, 박승희 열사 아버지의 인사에 모인 사람들은 환호했고 건배는 여전히 점잖으면서도 씩씩했다. 한 회원의 설장구 무대와 회원이 되기로 약속한 마술사의 공연에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은 앞으로 몰려 넋을 잃은 채 손뼉을 치고 있었다.

 회원의 설장구 공연
ⓒ 김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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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이었다. 분노와 고통으로 보냈던 젊은 날의 이별이 이제 축제의 장으로 승화되어 또 한 세월의 한 마디를 다듬고 있었다. 100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던 집행부가 부랴부랴 자장면 30개를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감동하고 있었다.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진도 홍주 판매행사에 선뜻 지갑을 꺼내는 모습이나, 즉석에서 홍주 병을 터서 어른들과 선배를 찾아다니는 후배들의 모습도 아름답기만 했다.

나는 1991년 봄, 전대 병원 위세척실을 잊지 못한다. 광주 전남에서 분신했던 박승희, 윤용하, 김철수, 정상순의 모습을 그곳에서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 이후 네 명의 청년 학생들이 영안실로 갈 때 울면서 동행했던 기억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 것인가. 통곡하며 보낸 장례식을 또 어떻게 잊을 것인가. 내가 겪었던 5월은 그대로 91년 광주 5월의 역사였다.

어렵게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를 만들고 꾸려왔던 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1월1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담양댐 주변의 식당에서 빙어를 먹었던 일, 회원체육대회, 동학 혁명전적지답사 등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이제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는 자리가 잡혔다고 본다. 박승희 학생의 외쳤던 단결과 반미구호가 잊히지 않고 있음은 진실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여 제 몸을 태운 많은 젊은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변변한 추모 모임조차 꾸리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이 나라의 민주화가 앞당겨졌음에도 그들의 죽음은 당시의 청년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마술공연
ⓒ 김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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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91년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이 조작이었음은 밝혀졌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젊은이에게 정부가 사과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피 터지는 투쟁을 매도했던 ‘유명한 사람’들과 억울한 누명을 쓴 젊은이에게 실형을 선고했던 법원도 조용하기만 하다.

차기 대통령은 과거 정권과 연결선상에 있는 세력이 기반이다. 요즘 인수위의 행보를 보면 차기 정권이 어떤 모습을 보이리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민주와 개혁을 외쳤던 사람들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세월이 될 것이다.

진보와 개혁을 외쳤던 사람들도 새로운 각오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현실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 첫 순서이리라. 그리고 진보와 개혁 세력이 왜 국민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밀렸는지 반성하자. 다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그 과거의 역사 속에 제 몸을 불살랐던 젊은이들과 화염병을 들었던 젊은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박승희의 분신과 운암대첩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 블로그에 올릴 예정



태그:#박승희, 분신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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