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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사용하는 소방차.
 영국에서 사용하는 소방차.
ⓒ www.ukemergency.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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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 띠 띠~ 띠 띠 띠~."

경보 소리가 시끄럽게 기숙사 내부에 울려 퍼진다. 아직 잠이 덜 깼다. 시계를 살펴본다. 새벽 6시 30분. '이게 뭐야? 뭐, 별일 있겠어…'하며 이불을 뒤집어써본다. 그런데 시끄러운 경보 소리는 끊기질 않는다. 새벽 단잠을 즐기려 이불을 또 뒤집어써보지만 도저히 잠이 안 온다.

어느새 사람들 소리가 밖에서 들린다. 언제 왔는지 "어서 밖으로 나가요! 어서!"라며 기숙사 사감 아저씨가 소리친다. "진짜 불이 났나 보구나!" 걱정이 확 되었다. 허겁지겁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같이 급하게 나온 학생들로 기숙사 밖은 장사진을 이룬다.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나온 여학생, 반바지 차림으로 나온 남학생, 긴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곱이 채 떨어지지 않은 학생 등으로 진풍경을 이룬다. '어? 며칠 전에 본 그 멋진 여학생 맞아?' 잠옷 바람에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려 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불자동차 두 대가 요란스럽게 사이렌 소리를 내며 벌써 기숙사에 도착했다.

런던 대화재의 교훈... 화재 경보 울리면 잠옷 바람으로라도 무조건 대피

학교 기숙사에 부착되어 있는 화재 센서경보기.
 학교 기숙사에 부착되어 있는 화재 센서경보기.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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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처음으로 온 해에 겪은 일이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그날은 '당연히'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난리 안 칠 텐데, 이게 뭐야? 불자동차까지 오고 말이야.' 내 아침잠을 빼앗은 경보기를 탓하며 투덜거렸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대피를 외치는 사감아저씨 말에 너무나도 순순히 잘 따랐다. 이후로도 이런 일은 기숙사뿐 아니라 학교 식당, 중앙도서관 등에서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때마다 학생과 대학 직원들은 순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바깥으로 나갔다. 심지어는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던 학생들도 포크와 나이프를 그대로 놓고 대피 안내를 따랐다. 그때마다 불자동차는 어김없이 그 '신속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화재는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그들의 이런 모습에 처음에는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사고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고, 방심한 그 한 번의 순간에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이 영국 사람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위험한 경보가 울리는 순간마다 방심하지 말고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영국 사람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화재 사건 중 하나다.

1666년에 한 빵 공장에서 발생한 불은 런던 시내로까지 크게 번졌고, 무려 5일간이나 지속됐다. 당시 소방담당자들은 처음에 이 불을 가볍게 여겼지만, 결국 화마는 도시를 집어삼켰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87채의 크고 작은 중세 교회와 1만3000채의 집이 불에 탔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슬럼가가 대거 불에 타버렸고, 이로 인해 당시 찰스 2세는 대규모 반란을 우려할 지경에 놓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정부는 화재 대피시설을 강화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런던 대화재를 그린 작가 미상의 그림.
 런던 대화재를 그린 작가 미상의 그림.
ⓒ 런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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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현장의 철저한 화재 교육과 실습... 통역 서비스까지

영국 사람들이 화재 같은 사고에 철저히 대비하는 모습은 일반 노동현장에서 더 쉽게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다니는 요크대학교에는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행정 업무를 하는 사람들 외에도 식당, 청소, 체육관 등에서 다양한 업무를 하는 직원들이 있다.

이들이 처음에 근무를 시작하면 꼭 받는 교육이 있다. 바로 화재 교육이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행동요령과 소화기 종류 등 이론 수업을 받는다. 이뿐 아니라, 직접 불을 내서 소화기로 불을 꺼보도록 하는 등 실습 수업도 실시한다.

또 화재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인명 피해 여부라고 보고, 화재가 발생하면 직원들이 바로 모이는 집결지(Assembly point)를 꼭 설명해준다. "인원 파악을 바로 해서 누가 화재로 피해를 보고 있는지를 재빨리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학교 측 설명이다. 이 같은 화재교육은 필수 과정으로 재계약을 하거나 승진을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영국은 정말로 다양한 인종이 사는 다문화사회다 보니,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학교 측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화재 교육 때 필요하면 통역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통역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에는 매니저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니?"를 끊임없이 물으며 설명해주고, 숙지 여부를 확인한다.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화재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집결지를 표시한 스티커와 소화기. 학교 식당 안에 부착, 비치돼 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집결지를 표시한 스티커와 소화기. 학교 식당 안에 부착, 비치돼 있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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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발생했을 때 집결지를 표시한 스티커. 학교 식당 안에 부착돼 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집결지를 표시한 스티커. 학교 식당 안에 부착돼 있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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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화재경보기와 곳곳에 있는 대피 전용 출구

학교에는 곳곳에 화재 센서 경보기가 부착되어 있다. 조금만 실내가 뜨거워져도 열기를 감지할 수 있는 센서기 및 이와 연결된 경보기가 24시간 작동된다. 교실, 식당, 체육관 등 사람들이 많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살고 있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가족용 기숙사에도 이 경보기가 작동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센서기가 작동해서 소리를 안 나게 하느라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너무 민감해서 때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식당 등 공공시설은 매주 수요일마다 경보기가 자동적으로 울리도록 해서 작동 여부를 정기적으로 확인한다.

경보기뿐 아니라 학교 곳곳에는 화재 등 사고 대비용 출구들이 곳곳에 있다. 이 문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는 문들이지만, 화재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내부에서 밀면 열리는 문들이다. 바깥에서는 열리지 않지만 안에서 세게 밀면 열린다.

학교뿐 아니라 슈퍼마켓, 옷 가게 등에도 '화재 출입구(Fire Exit)'라는 큼지막한 녹색스티커와 함께 "비상시 문을 밀고 나가라"는 안내문이 그 비상문에 붙어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출구가 없어서 화를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법적 준수사항이다.

화재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용하는 화재 전용 출구.
 화재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용하는 화재 전용 출구.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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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전용 출구에 부착되어 있는 스티커.
 화재 전용 출구에 부착되어 있는 스티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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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안전 위해서라면 작은 불편은 견딘다"... 한국은?

화재뿐 아니라 각종 시설 등의 안전 점검도 철저하다. 학교의 경우, 내부 감독자뿐 아니라 각종 시설들을 정기적으로 학교 외부에 있는 전문가에게 맡겨서 점검을 받는다. 내부자의 경우에는 대충 형식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몇 주 전부터 안전 점검 및 이 과정에서 발견된 결함 때문에 학교에 있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예 차단되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한 영국인 친구에게 "너희들은 왜 다리를 빨리 안 고치냐"고 불만을 표시했더니, 그 친구는 "빨리 하는 것보다는 더 안전하게, 튼튼하게 고치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한국의 이천 참사는 이곳의 한국인들까지도 참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한국에도 물론 안전점검 등에 관한 각종 법률과 제도들이 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설마…', '괜찮겠지'라는 근거 없는 낙관문화가 너무 팽배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인 안전 점검도 형식적으로 하고, 화재 대비 훈련도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로 진행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든 일에 "빨리빨리"를 외치기보다는 좀 늦더라도 차근차근 점검하고 사전 예고 없이 닥칠 그 '한 번'의 사고에 늘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지하철이 죽음의 '지옥철'이 되는 등 세계적인 창피를 당한 대한민국. 부디 이번에는 그 부끄러움을 잊지 말고, 참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국인들이 그렇듯이, 조금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우리 생명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서는 천천히, 그렇지만 깐깐하게 짚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작은 불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꽃보다도 아름답고 소중하지 않은가.


태그:#안전점검, #화재경보, #이천참사, #런던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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