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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눈을 맞춘 것은 번듯하게 지어진 건물도 도로도 아니었다. 한참 동안 머물며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비닐하우스 속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태양초 고추와 길가에 널어놓은 메주콩이었다. 이들이 환한 얼굴로 어깨를 껴안은 사람은 물질을 막 끝내고 나온 잠녀들이었다.

 

전라남도는 담양, 장흥, 완도, 신안 네 곳을 칫따슬로(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도시들의 국제적인 조직) 국제연맹에 가입하기 위해 신청했다. 많은 도시들이 실사를 기다리고 있지만 칫따슬로 한국위원회(손대현)의 노력으로 지난 9월 초 칫따슬로 창시자 파울로 사투르니, 로베르토 회장 등 네 명의 실사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이 운동의 출발은 슬로푸드였다. 1986년 패스트푸드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미국의 ‘맥도날드’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이로 인해 상실되어가는 전통문화와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1989년 파리에서 ‘슬로푸드 선언문’이 채택됐다.

 

와인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에 그레베인 키안티, 포시타노 등은 1997년 패스트푸드에 대응해 포도주 생산과 관광으로 부활을 꿈꿨다. 당시 그레베인 키안티 시장 사투르니 등 인근 네 개 도시 시장들이 모여 칫따슬로를 창설했다. 이번 12월 1일 한국의 4개 도시가 등록됨으로 해서 칫따슬로 국제연맹 가입국은 11개국 97개 도시로 확대되었다

 

 
햐얀소금에 눈을 맞추다

짱뚱어 다리를 건넌 실사단이 걸음을 멈춘 곳은 관광객들을 위해 준비해 둔 자전거였다. 이렇게 예정에 없는 일정들이 의외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로베르토 회장과 파울로 사투르니 전 회장이 자전거를 추켜들자 국내외 실사단 10명도 자전거에 올라타 해변을 달렸다.

 

화창한 가을햇살 아래 자전거로 달리는 이들은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감동은 소금밭으로 이어졌다. 소금을 만드는 일은 염전에 바닷물을 가두고 바람과 햇볕에 맡긴 채 기다리는 것 말고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증발지를 거쳐 소금을 만드는 결정지에 이르기까지 염전에 얼마만큼의 함수를 잡을 것인가, 경험과 세월이 가르쳐준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과 자연이 온전히 만나야 만들어지는 것이 소금이다.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어 ‘천일염(天日鹽)’이라 했던가. 소금을 거두는 체험에 칫따슬로 실사단은 푹 빠졌다.

 

해녀의 물질에 넋을 잃다

청산도로 이동하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증도에서 배를 타고 나와 차를 타고 완도로 이동, 다시 배를 탔다. 배가 도청항에 도착하자 김종식 완도군수가 직접 주민 풍물패를 앞세우고 실사단을 환영했다. 증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청산도에 머물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불안했다.

 

영화 <서편제> 촬영장으로 유명한 당리마을로 급히 이동했다. <서편제>의 주인공 유봉, 송화, 동호의 소리인생이 묻어나는 당리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당집 건너편 밭에서 10여 명의 아낙들이 콩 수확을 하고 있다.

 

실사단이 발걸음을 멈춘다. 독특한 문화, 지역음식, 전통적 삶, 커뮤니티(공동체) 등을 강조하는 칫따슬로의 정신을 잘 읽은 것일까. 완도군의 치밀한 준비가 더욱 눈에 빛을 발한 것은 서편제의 롱샷의 배경이기도 했던 황톳길 양측에 있는 밭을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동전화도 되지 않는 작은기미로 이동했다. 몇 명의 잠녀들이 늦은 시간까지 물질을 하며 실사단을 기다렸다. 이들은 가을바다가 뚝뚝 떨어지는 전복과 소라 등 해산물을 테왁에 담아 내왔다.

 

그들의 밝고 활기찬 모습에 실사단은 모두 박수를 보냈다. 이들은 잠녀들의 빗창과 호미, 테왁 등 전통어구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갯가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칫따슬로 국제연맹 회장의 만찬장 짧은 연설로 실사단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이런 도시(청산도)가 칫따슬로에 가입되어도 괜찮겠다고 확신했던 것은 콩밭에서 일하는 주민, 물질을 하고 나온 잠녀들의 감사하고 기뻐하는 ‘눈빛’이었습니다.”


태그:#슬로시티, #칫따슬로, #느리기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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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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