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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대에서 본 상팔담
 구룡대에서 본 상팔담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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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4일 밤 11시 30분에 안양역을 출발해서 6일 밤 11시경 여행을 마치고 안양역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무었을 보고 왔느냐?"고 아내가 묻는다. 친절하고 당당한 북측 여성 봉사원을 만났고 신기한 교예공연을 보고 왔다고 대답했다.

눈을 흘기며 예쁘냐고 묻는다. 봉사원과 공연배우 모두 아름다웠다고 대답했다. 정말이다. 아름다웠다.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는 봉사원들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기를 펼치는 배우들 모두 아름다웠다.

"'철조망이 왜 이렇게 많아?'라는 딸 질문을 받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애 먹었어요."

이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세 살배기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여행객이 이렇게 말했다. 남측과 북측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철조망을 보았다. 얼기설기 엮어진 철조망은 분단 역사를 말없이 표현해 주고 있었다.

분단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세 살배기 눈에는 궁금하기만 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철조망이 많은지!

내가 그 질문을 받는다 해도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을 듯하다. 세 살배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가슴 아픈 분단 역사를 안고 있는 저 철조망에 대해서.

철조망이 많은 이유를 설명 할 수 없었다

얼어있는 구룡폭포
 얼어있는 구룡폭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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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집 앞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내와 열 살 된 딸의 배웅을 받으며 밤 11시경 집을 나섰다. 세 살배기 아들 녀석은 장난감 자동차에 빠져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불효막심한 귀여운 녀석'이다. 선물 목록 중에서 장난감을 빼기로 마음먹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안양역 앞에서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원도 고성을 지나 남측 출입국까지 데려다 줄 버스다. 1차 집결지인 강원도 고성까지는 지루했다.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5일 오전 5시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아산휴게소'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밥 맛보다는 이름이 더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군인에게 말 걸지 마세요. 버스로 이동 중 촬영하지 마세요. 자칫 강제 추방당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전체 관광 못 할 수도 있고요. 핸드폰은 버스에 놓고 내리세요. 금강산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남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현대 아산 직원(조장이라고 부른다)이 겁을 준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었다. 핸드폰 가지고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일상의 복잡함 훌훌 털고 일요일까지 마음 편히 지내리라 다짐했다.

온정각에서 본 일몰
 온정각에서 본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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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경, 동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달리는 버스 안이었다. 비무장 지대를 지나 8시 11분 경, 북측 군사분계선을 통과했다. 나무로 된 전봇대가 세워져 있고 머리가 벗겨져 허연 속살이 보이는 산들이 보인다. 산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그 모습이 대머리를 연상케 했다. 

북측 마을도 보였다. 북측은 마을 외부를 둘러 친 울타리는 있지만 집 울타리는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집 모양이 모두 똑 같다. 최소한  마을 내에서 빈부 격차는 없어 보였다.

북측 마을, 울타리는 있지만 집 울타리는 없다

가족 등반객
 가족 등반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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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13분, 구룡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부터는 사진 촬영이 허락된다. 구룡연 코스 산행 출발지는 음식점 목란관이다. 목란관에서 출발하여 각자가 원하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외길 코스다.

화장실이 유료였다. 큰 것은 2달러, 작은 것은 1달러다. 금강산 모든 물은 식수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손을 씻거나 발을 담그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저녘 무렵에는 북측 주민들이 계곡 물을 물동이로 나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수로 사용한다는 안내원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상팔담을 보기 위해 구룡대라는 전망대까지 올랐다. 구룡폭포 위 담소 8개가 이어져 있어서 상팔담이라 부른다. 크고 작은 그릇에 얼음을 담아놓은 형상이다. 물은 모두 얼어 있었다.

구룡연 코스를 마치고 목란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처음 맛보는 금강산 음식이다. 비빔밥과 파전을 먹고 반주로 들쭉술을 곁들였다. 모두들 시장했던 터라 게눈감추듯 음식을 먹어 치웠다. 굳이 음식 평을 하자면 '정갈하다'고 표현하면 적당할 듯.

북축 안내원과 대화중인 등반객(오른쪽이 안내원)
 북축 안내원과 대화중인 등반객(오른쪽이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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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끝내고 '금강산 온천'으로 직행했다. 금강산온천은 지하 200m에서 나오는 100% 순수한 온천수를 이용한다. 10달러에 대중탕을 이용할 수 있다. 피부가 매끈해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4시30분,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상설 공연 중인 '금강산 교예단' 교예공연을 관람했다. 금강산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생각 할 것도 없이 '교예공연'을 꼽을 것이다. 묘기에 가까운 아찔한 곡예였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교예공연'은 음악과 연기 곡예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공연 중 사진 촬영은 금지됐다. 그 이유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배우들 공연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카메라에서 터지는 플래시 불빛 때문에 주위가 산만해지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교예단
 교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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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교예공연 보며 손이 땀에 흠뻑 젖었다

고성항 횟집 회가 일품이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횟집에서 만난 여성 봉사원 친절도 기억에 남는다. 손님들을 가르치듯이 할 말 다하면서도 친절했다. 당당한 친절함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당당하고 친절한 봉사원 덕에 일행들 모두 과음했다.

오전 6시10분, 해금강으로 향했다. 해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서다. '붉은 해가 바다 밑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런 광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붉은 해는 구름 속에서 나왔다. 날이 훤하게 밝은 다음에 구름 속에서 느릿느릿 모습을 드러냈다.

해금강 해맞이(구름속에서 해가 나오고 있다.
 해금강 해맞이(구름속에서 해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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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속에서 나온 해
 구름속에서 나온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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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 행사 이후 갈등에 시달렸다. 금강산 온천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 할 것인가! 아니면 일행들을 따라 삼일포로 갈 것인가! 해맞이 행사가 끝날 때까지 숙취가 풀리지 않아 고생했다. 나와 함께 고성항 횟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일행 중 2명은 일찌감치 온천행을 택했다.

난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끝에 삼일포로 향했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삼일포가 부르는 소리를 외면 할 수 없었다. 살짝 얼어있는 삼일포를  내려다보니 숙취가 풀리는 듯했다. 오기를 잘 했구나 생각했다.

회 맛보다 더 좋은 봉사원의 '당당한 친절'

삼일포 전경(가운데가 소우도)
 삼일포 전경(가운데가 소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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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아름다운 곳에 마음을 빼앗기고 온 탓인지 버스 안에서 멀미도 났다.

북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촬영 금지 구역에서 나이어린 학생 하나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것이다.

북측 군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무슨 말인가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셔터를 누른 학생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디지털 카메라에 있는 사진을 모두 지운 후에야 소동이 끝났다.

버스가 안양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경이다. 지난 4일, 집에서 나온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멋진 여행이었지만 외국을  여행하듯이 복잡한 출입국 수속을 밟은 것이 아쉽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땅을 다녀왔을 뿐인데…!

집에 돌아와 보니 떠날 때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세 살배기 아들 녀석은 아예 잠을 자고 있다. 열 살 딸내미는 북측 과자를 가방 가득 담아온다는 전화를 받은 탓인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반긴다.

이 녀석들 모두 데리고 금강산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살배기 아들 녀석이 철조망이 왜 많으냐고 질문할 것에 대비해 미리 답도 미리 준비해야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세 살배기에게 분단 상황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것, 분단의 상징인 철조망을 아직도 시원하게 걷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 하는 것은 너무 힘들 것 같다.

우리 민족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시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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