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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야(野)에 별성(星)을 호로 쓰는 강창덕 선생의 팔순 잔치가 5일 대구 황실호텔에서 열렸다. 선생의 벗들은 옹의 호 야성(野星)을 ‘들풀은 밟고 밟아도 다시 살아나고(野草躝復生) 별빛은 밤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星光夜唯明)’고 풀이한다. 잔치에는 가족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선생의 어려웠던 지난 세월을 함께 기렸다.

 

 

“변혁으로 가마솥처럼 들끓었던 대구·경북 지역이 언제부턴가 사회 문제에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가 5·16 군부 쿠데타와 박정희 독재 정권의 혹독한 탄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었던 대구 지역에서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와 통일을 위해 마지막 여생을 불사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에게는 ‘반일·반독재와 평화 통일’을 외치며 치열하게 살아온 역사의 현장이요, 투쟁적 삶의 무대입니다. 나는 일제 시대부터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독립과 통일․민주화 운동으로 무려 7차례나 구속됐고, 13년간이나 복역하며 반민주․반통일 정권에 맞서 항쟁해 왔습니다.”

 

 

강창덕 선생은 1927년 11월 30일(음) 경산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머슴처럼 막일을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13세 때에는 여름이면 철도 공사장에서 자갈 채취를 했고, 겨울이면 무학산에서 나무꾼으로 살았다. 그리고 틈틈이 장날이 되면 짚신장사를 했다.

 

14세 때에는 우체국에서 전보 배달원을 했고, 철공소 공원, 과수원 잡부로도 일했다. 17세 때에는 독학 끝에 시험에 합격하여 식량검사소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해방 직후인 1946년(19세)에는 경상북도 농업경제과 부검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대구상고 야간부에 다녔다.

 

그 후 1952년 건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영남일보와 매일신문의 기자로 일했다. 매일신문 기자 시절에는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을 다룬 기사를 전국 최초로 취재하여 보도하기도 했다. 1960년 5월 22일자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첩첩이 쌓인 백골, 학살은 대구 근교에서, 총소리 매일 산골 울려, 압량 코발트 폐갱 속에 추산 1000여 해골”

 

 

나이 17세에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여러분, 침략 제국은 곧 망합니다. 우리 모두 독립을 준비합시다.”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며 ‘독립 준비’를 전파하고 다니다가 1944년 8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해 활동했는데 이 단체는 여운형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비밀리에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해방 2개월 전에는 입대 영장을 거부하고 도피했다가 결국 구속되었다.

 

20세이던 1947년에는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애국 학생 여러분, 미국에 의해 UN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진 우리 조국이 두 동강 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국 분단을 결사 반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고 연설했다가 ‘미국 등 연합국을 비방한 죄’(포고령 위반)로 미 군정에 의해 대구형무소에 구속되었다.

 

 

여운형 선생의 암살에 이어 김구 선생도 암살당하는 것을 보고는 공무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와서 건국대에 입학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면서는 학생 신분임에도 이승만에 반대하는 정치 거목 서상일 국회의원의 비서로 일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무력 통일을 반대하는 말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직후인 1961년 4월에는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는 장면 정권에 반대하는 대구역 광장 집회 건으로 불법 집회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1961년 5월 10일 장면 정권의 허가를 받아 대구 시내 만경관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5·16 직후 지난 일을 문제삼는 군사정권에 의해 다시 구속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974년 5월 6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8년 8개월을 복역하였다. 모두 7차례 투옥에 13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82년 12월 출감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고, 옹은 다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고생만 하던 아내가 1987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출근길 만원버스에 밀려 떨어져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나로 인해 한 평생 옥바라지에 아이들 교육에 헌신했는데…….” 옹은 “지금도 아내를 생각하면 눈물이 이슬방울처럼 흘러내린다”고 고백한다. 오랜 수형 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진통제를 일상적으로 복용하는 형편이지만 고생만 하다가 비명에 타계한 아내를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아내의 타계 이후 경제적 수입이 없어진 그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었는데 1995년부터는 문중에서 제공한 산지기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옹은 그래도 “내가 평화통일의 깃발을 들고 가시밭길을 걸어오는 동안 세 아들은 비교적 잘 자라주었습니다. 첫째 상호는 거문고, 둘째 상우는 대금, 막내 상구는 대금 연주자로 모두 국악인입니다. 민주통일 투사의 아들들이 그래도 ‘우리 것이 최고여’ 하며 국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하고 말한다.

 

 

옹은 지금도 젊은이에 결코 뒤지지 아니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 활동가이다. 2007년 현재의 직함만 살펴보아도 이는 확연히 증명된다. 대구경북 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고문, 영남개혁 21 고문, 한반도포럼 대구경북 상임고문, 남북 정상회담 경축 국민대회 고문, 민생정치포럼 대구경북 고문, 개성 평화 통일의 숲 가꾸기 행사 참여, 남북평화나눔운동본부 고문, 대구경북 민주언론 시민협의회 고문,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대구경북본부 고문, 민주평화통일가문회의 상임위원, 6·15 공동선언 10·4 선언 실천을 위한 평화통일 국민회의 고문, 평화통일 대구시민연대 상임고문, 대구광역시 남북교류협력위원회 부위원장. 80연세에도 아랑곳없이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옹의 열성을 보면 그 누구도 다음과 같은 당신의 고백을 놓고 진정성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일제로부터 독립된 이후 60년간 오직 평화통일의 깃발을 들고 한 우물만 파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변화 마디에 혁신 정당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 정당들이 평화통일을 적극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통일의 진리는 평화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평화통일의 길은 책이나 그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직 역사와 정의, 그리고 양심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자주적으로 우리 민족끼리 화해와 협력으로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평화통일을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 무슨 일이든 찾아나섭니다.”

 

2008년 1월 5일, 옹의 팔순 잔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선생의 백수를 기렸다. 심훈의 시 <그 날이 오면>을 인용한 인사말을 하던 옹의 눈가엔 결국 이슬이 맺혔다.

 

“저는 끝까지 불꽃 한번 못 내고 연기만 내고 마는 젖은 짚단처럼 한평생 못난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 구석 자위하는 마음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거칠고 험상궂은 황야에 젖은 짚단의 한 줄기 연기일지라도 그 연기가 행복한 삶을 꿈꾸며 투쟁하고 전진하는 민족, 민주, 민중의 암울하고 엄혹한 행로의 길잡이로써 담배씨만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지 하는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남은 여생 망구(望九)의 몸이라 해도 일제 시대 조선 사람 애국 시인 심훈의 '그 날이 오면'이라는 시의 구절에 있는 것처럼 살고 싶습니다.”

 

옹은 격정의 긴 세월을 돌이키면서 스스로 눈시울을 적셨지만, 팔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또한 옹의 겸손하고 뜨거운 인사말을 들으며 한결같이 가슴을 적실 수밖에 없는 밤이었다.


태그:#강창덕, #경산 코발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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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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