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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경기도 평택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다. 올해도 중학교 3학년들은 이른바 '뺑뺑이'가 아니라 내신과 선발고사 성적에 따라 예비 고교생이 됐다. 지역에는 나름의 서열이 매겨진 소위 '명문고'와 '삼류고'가 있어 고입 전형시험 철이 되면 학교는 학생 유치에, 아이들과 학부모는 학교 지원에 피가 마른다.

 

심지어 일부 학교는 다른 학교를 비방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경쟁 학교의 신입생 유치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래야 우수한 성적의 신입생을 다른 학교에 빼앗기지 않고 자기 학교에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육'이나 '도덕성' 따위는 없다. 약육강식의 무서운 경쟁 논리만 있을 뿐이다. 비평준화가 계속되는 한 이 무서운 경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인근 중학교에서 3학년 담임을 여러 해 맡고 있는 교사들은 이 얘기만 나오면 한결같이 목청이 높아진다. "(중3 담임 노릇) 못해먹겠다"는 거다. 이미 학교 서열이 정해진 상황에서 고교 진학 지도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적에 상관없이 명문고에 일단 원서를 넣고 보자는 막무가내부터 교사의 조언과 지도가 별 소용없는 예가 숱하다"는 것이 교사들의 말이다.

 

고등학교에서 신입생 유치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들 역시 "(신입생 유치가) 거의 전쟁 수준"이라며 고단함을 하소연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사들은 이러한 고통의 원흉을 평택이 고교비평준지역이라는 데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학부모들도 여기에 목소리를 보태 고교평준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명박 새 정부는 자율형 사립고(이하 자사고)를 100개나 만들어 사실상 평준화를 해체한다고 한다.

 

학교 이름 바꾸고, 교육과정도 재검토... 자사고에 대비하라?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교육정책에 핵폭탄급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른바 '통제'와 '규제'에서 '자율'과 '경쟁'으로 전환한다는 것.

 

대통령직인수위는 2월 초까지 교육 관련 새 정책안을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 이명박 당선인의 공약이었던 '고교 다양화 300플랜'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에도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른바 '300플랜'은 농촌과 대도시 낙후지역에 '기숙형 공립고교' 150개 지정, 전문계 특성화 고교인 '마이스터 고교' 50개 육성,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율형 사립고' 100개 설립이 핵심 내용이다. 특히 기존의 자립형 사립고와 비슷한 자율형 사립고는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에 의해 평가를 받는 형태로, 현행 자사고에 대한 재정 규제를 낮추어 최소한 100개를 설립한다고 한다.

 

이명박 당선인은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3월 신년사에서 이미 "강남·북 교육 환경 격차 해소를 위해 강북에 자립형 사립고 3곳을 설립해 2008년 개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가운데 새 정부의 자사고 100개 설립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여러 가지 말들이 들려온다. 자사고로 전환하기 위해 교명 변경을 추진 중인 학교도 있다 하고, 교육 과정을 검토하는 등 자사고 전환을 준비 중인 학교도 있다고 한다. 발 빠른 일부 학원들은 강사진을 보강하는 등 자사고 증가에 맞춰 특목고 대비반을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승리하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하지만 현재로선 새 정부가 밝힌 자사고 정책이 희망의 종소리가 될지는 미지수다. 그 용어가 기존의 '자립형 사립고'에서 '자율형 사립고'로 변했을 뿐 아직 정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때문에 지금은 자립형 사립고에 기준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만약 새 정부의 공약대로 자사고가 100개나 늘어난다면 평택과 같은 비평준 지역에서 교육은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평택에도 한두 개 혹은 서너 개의 자사고가 생겨날 테고 명문고와 비명문고를 두고 경쟁하는 것도 모자라 자사고 진학을 놓고 또 한번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명문고/비명문고' '자사고/ 일반고'의 완벽한 서열구조가 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경쟁하라,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라. 그래야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무서운 생존 논리뿐이다. 이미 무한입시경쟁으로 기본적인 인권마저 무시당한 채 점수 경쟁의 도구가 된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교육 현실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는데도 모두에게 승자가 되라며 '경쟁'을 강요하고 있다. 새 정부의 자사고 100개 설립안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새로운 한국교육 '집도의'... '의료사고'가 걱정된다

 

새 정부는 이른바 "사교육비 절반, 학교 만족 두 배"라는 구호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도 현재의 처지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교육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부모의 경제력으로 진학이 결정되는 자사고를 100개나 만들어 경쟁시키고, 그 곳 출신자들에게 유리한 대학 입시 정책을 도입하면서 과연 교육 양극화 해소와 공교육 정상화를 말할 수 있을까. "사교육비 절반, 학교 만족 두 배"는 특정한 계층이 아닌 모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자사고 100개 확대 정책은 신중히 재검토돼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해 왔다. 심지어 스스로를 '교육대통령'이라고 칭하던 이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오롯이 박수를 받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수술하겠다며 환자를 수술대 위에 눕혀놓고 집도의만 여럿 들락거리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꼴이 됐다.

 

이제 만신창이가 된 한국 교육을 개혁하겠다며 새로운 집도의가 나타났다. 새로운 수술법을 시도하려는 새 집도의를 보며 또 다른 의료사고를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이가 비단 나뿐일까.

 

덧붙이는 글 | 임정훈 기자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태그:#자사고, #300플램, #평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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