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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를 지나 천천히 찻길을 걸어갔다. 아침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그렇게까지 앞이 잘 보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상쾌함은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었다. 소매가 연한 안개에 적셔지는 것을 느끼고, 안개냄새를 맡으며 중원탑을 향해 걸어갔다.

 

논길이나 찻길이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문화유산을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면서, 정작 이러한 모습을 찾아 떠난 적은 없는 것 같다. 돈으로도 주고 보지 못하는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빠진다.

 

들리지 않는 가야금 소리에 안개가 춤을 추더라

 

 

어느덧 발걸음은 탄금호로 흘러들었다. 탄금호는 충주호의 보조댐을 만드느라 생겨났다고 하며, 탄금대에서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탄금호에서는 물안개가 살포시 피어나고 있었다. 안개는 너울너울 노니며 가볍게 피어오르고, 또는 슬며시 호수에 그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탄금호에 도착하자 아침을 깨운 것은 나 같은 길손이 아닌, 강태공임을 알게 되었다. 강태공들은 모두 한자리씩 차지하고 낚싯대를 탄금호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탄금호의 물안개와 새소리는 반갑기 그지없었으리라. 평화롭고 잔잔한 호수, 그리고 풍경화를 보는 듯한 이러한 모습은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탄금호의 안개를 바라보며 든 생각은 내가 과연 땅 위에 있는지, 구름 위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분명 땅 위에 있지만 구름과도 같은 안개는 살짝 혼란을 초래한다. 시간만 있다면 술 한병 놔두고 따로 안주를 찾을 필요 없이 이 안개만 바라보며 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다.

 

탄금호의 안개를 바라보며 문득 목포의 문예역사관에서 본 임전 허문(林田 許文 : 1941 ~ )선생의 작품이 떠오른다. 운림산방 4대의 임전 허문선생은 동양화에 서양화의 원근과 명암을 접목한 운무산수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어 낸 사람으로서, 그의 그림은 자연을 단순화시키고, 구름과 안개를 이용하여 여백의 미를 매우 잘 이용한다. 짙은 구름과 안개는 그의 그림의 주된 요소이다.

 

예술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나이지만, 임전 허문선생의 그림을 보고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다. 과감한 여백의 사용과 흑백의 찬연한 조화, 그리고 그 단순한 풍경이 낯설지 않게 하는 그의 그림은 볼 때마다 시원함, 그리고 명산에서 우러러보는 아래의 진풍경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감동을 선사해준다.

 

사실 임전 허문선생의 그림을 보면서 그러한 모습이 실제로 존재할까란 약간의 의구심도 들었었다. 하지만 탄금호에 와서는 그러한 그림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분명 길은 있지만 길이 사라졌으며, 산은 있지만 산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세상을 덮은 게 아니라 세상을 감싼 것이며, 그 속에서 잔잔한 감동을 선물해준다.

 

안개는 늘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의 포금함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그 몸을 이동하는데, 흡사 바다의 파도가 해안에 닿아 스르르 부스러지는 것처럼, 안개 또한 지상에 닳아 퍼져나간다.

 

푸른빛이 돌자 무파(霧派)가 잔잔히 퍼져나간다

 

 

하늘에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안개는 점점 걷혀지지만, 역으로 안개가 더욱 눈에 잘 띄게 한다. 안개는 가렸던 산에게 그 몸을 비켜나간다. 산도 안개에 몸을 씻고 나온 듯, 그 수려한 자태를 뽐내며 아침을 맞는다.

 

안개는 수면을 치면서 퍼져나가니, 이를 무파(霧派)라고 하겠다. 안개의 파도는 더없이 황홀한 관경을 선사한다.

 

조용했던 탄금호를 또다시 깨우는 것은 새들의 지저귐이다. 푸르르 날아가는 새와 짹짹거리며 아침부터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새소리는 더없이 상쾌하다.

 

 

철새조망대에서 이러한 안개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다. 철새의 모습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안개가 그 철새를 대신해주면서 좋은 그림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탄금호의 안개를 바라보며 김기수(金綺秀 : 1832 ~ ?)가 쓴 <해사록(海槎錄)>에 나오는 ‘비를 만나 충주에 머무르며(遇雨留忠州)’라는 시를 떠올려본다. 김기수는 조선시대의 수신사로서 구한말 일본에 갔다온 바가 있다. 일본에 가면서 쓴 글을 엮은 것이 바로 <해사록>으로서, 이 시는 일본으로 가면서 충주에 들러 비를 맞았을 때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낙숫물이 줄줄 흘러 개울을 이루고          簷鈴滴歷亂成流
먼 안개 자욱하고 날이 개지 않는구나      遠靄微茫苦未收
무심한 비야 왕사가 급한 줄 알리오         雨意豈知王事急
인정으로 고향이라 머무르라 하는게지     人情亦爲故鄕留
탄금대의 물빛은 말갛게 불어나고           琴臺水色晴初漲
월악산의 봄빛은 파랗게 비쳐나네           月岳春光翠欲浮
마음 가득 이제 사신된 것 부끄러워라      多情自慚今杖節
십년 전엔 포의로 놀았던 곳이라네          十年曾是布衣遊

 

경치를 찾는 길손들이여, 그대들도 한번 탄금호를 찾아가는 게 어떠하겠는가. 맑은 술 한병 내어 그 경치를 감상하며 하루동안 신선이 되 보는 것은 또 어떠하겠는가.

덧붙이는 글 | 2007년 11월 4일 충주 탄금호에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탄금호, #충주, #임전 허문, #운림산방,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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