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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단칼에 반토막을 내었다는 큰 바위덩어리. 단석산 정상 인근에 있다.
▲ 단석 김유신이 단칼에 반토막을 내었다는 큰 바위덩어리. 단석산 정상 인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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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아침, 경주 건천 단석(斷石)산으로 간다. 단석산(827m), 이름만 듣고도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산이다. 끊을 단(斷)에 돌 석(石)이니 누군가가 칼로 내리쳐서 돌을 잘랐다는 뜻이다.

경주 가기 전 건천 인터체인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 산내면 방향으로 조금 가면 송선 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를 지나면 지방도로를 왼쪽으로 벗어나는 좁은 마을길 들머리가 나타난다. 그 입구에는 “단석산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마애불(磨崖佛)이라 했으니 커다란 암벽이나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단석산 등산로는 이 송선지가 끝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 건천 송선지 단석산 등산로는 이 송선지가 끝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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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초입에는 경주시가 마련해둔 공영 주차장이 있다. 멀리서 온 관광객과 등산객들을 ‘청포를 입고 찾아온 손님’처럼 배려한 경주시의 마음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다. 1월 1일이라 그런가.

공영 주차장이 마을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동네 안으로 차를 끌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먼지를 일으키며 국보 199호 마애불이 있는 신선사(神仙寺)를 향해 차를 몰아댄다. 신선사라면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 사찰이라는 뜻이고, 여기서 신선이란 곧 미륵불을 의미하는데, 저렇듯 중생이 사는 마을 한복판을 홍진(紅塵)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경지라면 신선사에는 가면 무엇하리.

마을을 출발하여 신선사까지 닿는 데에는 사십여 분 걸린다. 그리 멀지 않지만 맑은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줄곧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온몸은 충분히 땀으로 젖는다. 산에 오면 정신의 노폐물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이렇듯 땀까지 나서 몸의 찌꺼기마저 없애주니 이만하면 요산요수의 경지가 따로 없다. 다만 사찰 지근거리까지 오가는 지프차들 때문에 맑고 향기로운 산 속 기운이 반감되는 것은 진정 아쉬운 일이다.

그런즉 ‘급경사- 4륜구동 차량 외 진입 금지. 4륜구동 차량은 4L로 진입 바랍니다’하고 팻말까지 세워가며 친절을 베푸는 사찰 측의 보시가 나같이 속 좁은 도량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선사가 바라보이는 산 속 가파른 갈림길에서 낯선 체험을 한다. 여느 등산로나 사찰 들머리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신선사는 오른쪽에 보이는데 풍경 소리는 왼쪽에서 난다. 호기심이 일지 않을 리 없다. 눈에 보이는 사찰이야 조금 후에 가보면 아는 일이니, 귀에 들려오는 풍경 소리부터 확인을 해야겠다.

왼쪽 오솔길로 들어서면 작은 암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신선사로 가서 국보인 마애불상군도 보아야 하고, 그 길을 더 올라 단석산 정상까지 가서 김유신 장군이 칼로 내리쳐 두 동강이로 만들었다는 커다란 바위도 보아야 하는데, 내려오는 길에 다시 이 길로 들어 암자를 찾을 게 아니라 올라가는 길에 마무리를 해야 한다.

모름지기 산은 오를 때에 이곳저곳 찾아야지 내려갈 때에는 곧장 하산을 해야 마땅하다. 하산 무렵에는 몸이 피곤하고, 특히 겨울철에는 땀이 식으면서 추위가 몰려오고, 순식간에 어둠이 산 전체를 덮어버리기도 하는 까닭이다.

왼쪽 오솔길로 접어든다. 낙엽이 잔뜩 깔린 오솔길을 걷는 재미를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다. 발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길이 왼편으로는 온통 절벽이어서 나도 모르게 다리가 새곰새곰해진다. 혹여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에 발은 앞으로 땅을 밟으며 나아가기는커녕 질질 오른쪽으로 바닥을 끌면서 쌓인 낙엽을 밀어내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등 뒤에 산비탈을 두고 오른발로 낙엽을 슬슬 오른쪽으로 밀면서 왼발은 따라서 움직인다. 앞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걸으니 게[蟹]가 따로 없다.

풍경, 저 멀리 깊은 골짜기 속에 숨어 있는 암자 아닌 곳에서 명징한 울음 토하다

단석산 신선사 가는 길목의 독립운동가 김대지 옹의 묘소. 풍경 하나가 나무에 매달려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귀에 맑은 소리를 들려준다.
▲ 독립투사 김대지 옹의 묘소 단석산 신선사 가는 길목의 독립운동가 김대지 옹의 묘소. 풍경 하나가 나무에 매달려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귀에 맑은 소리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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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소리는 여전하다. 낙엽을 밀치느라 땀 같지 않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문득 눈을 들어 앞으로 바라보니 계곡 건너편 양지 바른 산비탈에 무덤 하나가 호젓이 놓여 있다.

작은 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상수리나무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니 금세 무덤에 닿는다. 이 무덤을 지나 어디로 가야 암자를 만나나?

문득 마음 속에 의문이 일어나지만 귓가를 때리는 풍경소리는 그런 궁금증을 단숨에 해소해준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지금은 마치 저 옛날 초등학교 다니던 무렵에 듣던 “학교 종이 땡땡땡” 할 때의 수업 종소리만큼이나 쟁쟁하게 들려오는 풍경소리 덕분이다.

풍경은 바로 지척에 있다. 풍경은 저 멀리 깊은 골짜기 속에 숨어 있는 암자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부근에서 명징한 울음을 토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드니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하나가 허공에 새파랗게 매달려 있다. 겨울 바람을 맞아 반쯤 얼어붙은 듯 추위에 시든 모습이다. 그러나 소리만큼은 오히려 맑디 맑다.

풍경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김대지(金大池) 옹이다. 김대지 옹이 누군가? 비석에는 1891년 10월 7일 밀양 출생, 1942년 10월 26일 타계라고 새겨져 있다.

옹은 1917년 만주의 길림, 봉천 등지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동삼·조소앙·이시영·이회영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임시정부 내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20년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김원봉·곽재기·이성우 등과 함께 폭탄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였다.

한편 1921년 11월 베이징에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의 내무총장이 되어 이상룡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3년 이후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주요 간부로서 무장항일 투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 영고탑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해방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독립운동가 김대지 옹, 과연 김유신이 혼자서 도를 닦으며 삼국 통일을 염원했다는 단석산에 머무르실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돌아서 신선사로 가야겠다. 왔던 길을 단숨에 돌아 예의 그 갈림길로 간다. 역시 길은 갔던 길을 뒤따라 밟는 것이 쉽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노래했을 것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隨作後人程(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날 다른 사람의 길이 된다.)’

국보 199호가 새겨져 있는 단석산의 상인암. 지금은 하늘이 열려 있으나 신라 시대에는 기와 지붕을 이은, 신라 최초의 석굴 사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 단석산 상인암 국보 199호가 새겨져 있는 단석산의 상인암. 지금은 하늘이 열려 있으나 신라 시대에는 기와 지붕을 이은, 신라 최초의 석굴 사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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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사는 아주 자그마하다. 오래된 고찰의 느낌도 없다. 절의 이름이 신선사인 것으로 보아 이곳 단석산은 옛날 신라 때 화랑들이 수도를 하던 곳이었던 듯하다. 단석산이라는 이름이 그 첫 번째 증거이지만, 신선사 바로 옆에 있는 마애불상군은 그 두 번째 증거이다. 높이 8m, 입구 폭 3m, 깊이가 10m의 거대한 ㄷ자형 암벽 틈으로 들어가면 삼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어마어마한 암벽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도 대단하려니와, 김유신이 중악(단석산)에서 수도를 했다는 바로 그 연대인 7세기 전반기 불상이라는 1구의 부처상과 8구의 보살상을 눈앞에서 대하노라니 비록 불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들 저절로 엄숙해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법하다.

단석사로 가기 전 이곳을 안내하는 책자를 여러 권 읽었다. 책자들은 불상군 주위에 김유신 등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대부분은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읽을 수 없다는데 아마추어인 나의 눈에야 오죽하랴. 심지어 내 안목에는 불상들조차도 제대로 또렷이 들어오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과 너무 가까운 사람은 그가 비록 위인이라 할지라도 본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더니, 이토록 거대한 불상이 바로 눈앞에 딱 밀착하여 존재하고 있으니 내 눈이 그만 반쯤 심학규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암벽이 너무나 웅장하고 불상마저 이토록 크니 카메라도 이 놀라운 광경을 도무지 담아내지 못한다. 그저 눈에 새기고 돌아갈 도리밖에 별다른 수가 없다.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이 암벽의 이름은 상인암이다. 전문가들은 이 상인암을 신라 최초의 석굴(石窟) 사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토함산 석굴과, 흔히 제2 석굴암이라 불리는 경북 군위의 삼존불보다도 200~300년 앞선 시대의 석굴 사원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은 하늘이 뻥 뚫려 있고, 그 터진 곳으로 들어오는 비바람 때문에 석불이 손상될까 봐 보호막을 씌워 두었지만 옛날에는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기와 조각이 당시에 이곳이 석굴 법당이었음을 증거한다.

커다란 바위를 단칼에 베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하늘에 보호 장치를 해두었다.
▲ 단석사 상인암의 미륵장륙상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하늘에 보호 장치를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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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굽혀 참배를 하고 석굴 밖으로 나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이던 17세 때 이 석굴에서 수련을 하다가 난승(難勝)이라는 도사를 만나 도를 깨친 후 산 정상으로 뛰어올라 커다란 바위를 단칼에 베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로 그 단석(斷石)을 찾아가는 길이다.

길은 숲 속으로 이어져 있고 그늘이 많아 심한 경사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한결같이 푸른 잎새와 붉은 외피를 지닌 채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엄 있게 달래주는 소나무와, 아직은 꽃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매듭이나 껍질 하나 거칠게 드러내는 법 없이 매끈하기만한 줄기를 북풍한설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진달래나무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가파른 경사가 걱정이 되는 듯 나무 사이에는 ‘단석산 2번 구조 신고 지점,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이곳 위치(번호)를 119로 신고하시고 이동하지 마십시오. 신속하게 구조하여 드리겠습니다. 경주소방서장’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단석산 3번 지점……’ 안내판이 나오는데, 그 오른쪽을 쳐다보면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이 뒤엉킨 듯이 말려서 올라가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흰눈이라도 내리면 암벽 등반 훈련을 하기에 아주 적격일 듯싶은 거대 암벽이다. 그 암벽 사이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그래, 등산을 왔으니 여기를 그냥 비껴갈 수는 없다. 곧장 걸어서 암벽 사이의 샛길로 들어선다. 왼쪽 바위덩어리 위에 누군가가 쌓아 놓은 작은 돌탑이 보인다. 아직은 새끼 돌탑이다. 저기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하고 바라보니 큰 소나무 한 그루가 휘영청 굽은 채 온몸을 암벽 쪽으로 비스듬히 하고 누워 있다. 손으로는 저 소나무를 붙들고 발로는 저 암벽을 디디면서 저기까지 올라갔겠군.

사진 왼쪽 꼭대기에 단석이 보인다.
▲ 꼭대기에 단석을 이고 있는 단석산 정상의 암벽 사진 왼쪽 꼭대기에 단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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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맞은편의 더 커다란 암벽을 노려본다. 꼭대기로 사람을 끌어올리려는 듯이 교차로 튀어나와 있는 암벽의 돌출부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릇 암벽이 저처럼 가로세로로 갈라져 있으면 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 법이다.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암벽의 자태를 훔쳐본다. 과연 암벽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적당한 간격으로 틈을 만들어주고 있다. 나는 약간 끙끙대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암벽 꼭대기로 올라선다.

암벽 꼭대기는 기이하게도 편편하다. 마치 누군가가 산신제 같은 제사를 지내려고 일부러 돌을 납작하게 다듬어놓은 것만 같다. 나는 그 위에 올라서서 몸을 벌떡 일으켜 본다. ‘영남의 알프스’라고 부르는 가지산(1240m), 운문산(1181m) 등이 한눈에 들어와 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의 기개를 한껏 부추겨준다. 이 맛에 산을 오르는 것이다.

거대한 바위 한복판을 단칼에 휘둘러 좌우 한 치 오차없이 갈라놓은 이는?

가지산, 운문산 등 세칭 '영남의 알프스'가 단석 위에 서면 한눈에 들어온다. 왜 화랑들이 경주에서 백제로 가는 길목인 청도 입구 단석산에서 훈련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 단석산 단석 위에서 바라보는 '영남의 알프스' 가지산, 운문산 등 세칭 '영남의 알프스'가 단석 위에 서면 한눈에 들어온다. 왜 화랑들이 경주에서 백제로 가는 길목인 청도 입구 단석산에서 훈련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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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센 바람이 불어와 자칫하다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다. 나는 슬그머니 평석 위에 주저앉는다. 추워서 손이 저절로 양쪽 겨드랑이로 간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옛날에 화랑들도 이런 곳에서 도를 닦을 때면 허리를 꼿꼿이 한 채 양손은 주먹을 쥐고 나처럼 이렇게 교차하여 어깨에 얹었으리라 하고 생각해 본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평석이 좌우로 정확하게 직선으로 쫙 갈라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랜 세월 동안 그 틈으로 흙이 들어가고 낙엽이 쌓여 얼핏 하나의 바위인 양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한가운데가 날카롭게 반 토막 나 있는 단석이다. 엉금엉금 기어서 바위의 가장자리까지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거대 바위가 아래로 끝까지 반으로 쫙 갈라져 있다.

누군가가 이 거대한 바위의 한복판을 단칼에 휘둘러 좌우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갈라놓은 것이다. 바로 김유신이다. 나이 17세의 김유신이 이곳에서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훈련을 하면서 마침내 결의를 모아 단칼로 이 거대 바위를 자른 것이다.

두부 자르듯 칼로 한복판이 베어진 채 남아 있는 단석의 모습
▲ 단석 두부 자르듯 칼로 한복판이 베어진 채 남아 있는 단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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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을 맞으며 나는 오늘 1월 1일, 와~ 와~ 몰려가는 바다로 가서 일출을 구경하려 들지 않고 이곳 단석산으로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한다. 올 한 해도 성실하게 일하여 바위 같은 어려움까지 모두 깨뜨려야겠다는 각오를, 이곳 단석 위에서 다진다.

특히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는데도 옆에 서서 저 멀리 눈부신 전망을 즐기던 일행이 “여기야말로 정말 1월 1일에 와볼 만한 곳이다!”하고 큰소리로 외쳐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이야말로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가 아니고 무엇이랴!


태그:#단석산, #김유신,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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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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