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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계단을 내려가 국망봉에 이르는 길

 

 

비로봉 주변은 모두 나무 계단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 땅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우리는 도계를 따라 동북쪽 국망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번 탐사의 도계는 백두대간과 일치하니 능선을 따라 국망봉과 상월봉을 지나 형제봉 방향으로 가면 된다.


먼저 계단이 북쪽 방향으로 나 있다. 이 계단을 약 5분쯤 따라가면 작은 언덕이 나오고 왼쪽으로 충북 단양군 가곡면 새밭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우리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저 멀리 보이는 국망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기서 국망봉까지는 고도차가 별로 없이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이라 누구나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약 5분쯤 가니 왼쪽에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길은 계속 동북쪽으로 이어진다.

 

이곳부터는 상고대로 불리는 설화가 철쭉 가지들을 하얗게 만들고 있다. 눈도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쌓여 있다. 소백산 연화봉 천문대에서 측정한 기상자료에 따르면 소백산의 1월 평균 최저기온은 영하 9.3℃이다. 연 평균기온도 4.6℃ 밖에 되지 않으니 상당히 서늘한 편이다. 그리고 사시사철 계절풍이 불어 연화봉에서 비로봉을 지나 국망봉까지 능선에는 상록교목들이 자라기 어렵다. 일부 사람들은 소백산을 바람의 산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곳 소백산 정상 지역은 철쭉과 같은 낙엽관목이 주를 이루는 초원지대가 된 것이다.


지금은 겨울인지라 야생초들은 눈에 덮여 보이질 않는다. 능선을 따라 좌우에 철쭉 군락이 한겨울의 칼바람을 맞고 있다. 5월 말 6월 초순이면 만개할 철쭉들이 혹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봉오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철쭉은 겨울 추위 속에서 내공을 쌓아야 봄에 좀 더 화려한 꽃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1시간 30분 눈길을 헤쳐 나오니 전망 좋은 넓은 언덕이 나온다. 앞으로 국망봉 정상이 지척에 보이고, 오른쪽으로 석륜암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초암사와 죽계구곡을 만날 수 있다. 순흥에 은거해 살던 안축(安軸: 1282-1348)이 죽계별곡(竹溪別曲)을 통해 노래한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이 시의 내용은 살구꽃 분분하고 방초(芳草)가 무성한 늦은 봄 초여름 풍경을 노래한 것이어서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국망봉에서 알게 된 세 가지 이야기

 

석륜암골 삼거리에서 다시 10분 거리에 국망봉이 있다.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길에도 역시 나무계단이 있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계단에서 지나온 비로봉 쪽 능선을 보니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비로봉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고, 국망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요동치고 있다. 비로봉에서 국망봉을 보나 국망봉에서 비로봉을 보나 백두대간의 용틀임은 역시 장관이다.

 

국망봉 정상에는 용의 비늘 같기도 하고 용의 지느러미 같기도 한 바위가 비스듬히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1996년 6월에 세운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에 따르면 국망봉의 높이는 1420.8m이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60대의 정동주 선생님은 생생한데, 30대의 오대명씨가 좀 힘든 모양이다. 체력은 나이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표지석 옆에는 국망봉과 관련된 전설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국망봉(國望峰)이라면 나라 또는 나라님을 바라본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인지 소백산 국망봉에는 신라, 고려, 조선의 왕과 관련된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단양군지>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런 연유로 국망봉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 때 이의(李議)라는 사람이 이 봉우리에 올라 선왕을 경배하는 절을 네 번 올렸다고 해서 국망봉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의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한 기록이 있는지를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확인할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야기가 <풍기읍지>에 나온다고 하는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배순이라는 인물은 역시 확인할 수가 없고, 나라에서 내렸다는 정려도 찾을 수가 없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명종 1년 배순이라는 사람이 순흥 배점에 와서 대장간을 차려놓고 좋은 철 물건을 만들어서 양심적으로 수요자에게 공급했다. 특히 행실이 착하고 어버이에게 효와 조상을 모시는 정성이 지극하여 퇴계선생님께서 불러 ‘과연 들은 바와 같다’ 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퇴계선생이 돌아가심에 철물로 상을 만들어 놓고 3년복을 입었으며 선조대왕이 승하하시자 매월삭망(每月朔望)에 정성들여 장만한 음식을 들고 뒷산에 올라 북쪽 궁성을 향해 곡제사(哭祭祀)를 3년 동안 지냈다. 그 슬픈 소리가 궁안에 까지 들리어 나라에서 정여(旌閭)를 내리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그가 음식을 들고 올라 궁성을 바라보며 곡(哭)을 했다는 산을 국망봉이라 한다.”

 

소백산에 대한 기록은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온다. 충청도 영춘현 산천(山川) 조에 보면 “소백산은 현의 동남쪽 40리에 있고, 경상도 풍기군과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국망봉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1750년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국망봉은 충청도 영춘현에 있고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그러나 현재는 국망봉이 소백산에서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2일, 도계탐사를 하면 백두대간 길을 걸었다. 풍기읍 삼가리 비로사에서 출발 비로봉을 오른 다음, 국망봉 상월봉으로 해서 마당치 방향으로 탐사를 했다. 조사 내용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 중 두번째 글로 비로봉에서 국망봉까지 백두대간 탐사이다.  


태그:#국망봉, #철쭉, #나무계단, #영춘현, #풍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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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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