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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라
▲ 잔설이 희끗희끗한 가야산, 정상에 올라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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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커야 그늘이 크다. (한국속담)

경남 합천의 가야산은 내게는 원정이라 새벽 일찍 일어났다. 부산 지하철 개금역에서 일행과 약속한 오전 7시 정각에 차량은 출발했다. 가야산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잠시 눈을 붙일까 했는데 차창 밖의 겨울 풍경에 미혹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 여행은 일상의 탈출이다. 잠은 왜 청하려 하나…. 이 겨울 풍경을 다음 겨울에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길은 영원하지만 우리의 삶은 일회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야산의 숨막히는 절경
▲ 말문이 닫히는 가야산의 숨막히는 절경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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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길은 남해고속도를 거쳐 구마고속도로를 지나면서 정겨운 마을의 이름 창녕, 달성 등의 이정표를 지났다. 합천에 가까울수록 흙냄새와 거름냄새, 낙엽과 건초 썩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가야산 입구의 초소에서는 문화재 관람료라면서 주차비를 받았다. 일행 중 등산에 식견이 많은 이가 앞장을 섰다. 해인사의 왼편 계곡을 타고 눈이 덮인 산길을 올라갔다. 맑은 시냇물과 눈 덮인 겨울 가야산의 하얀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부산에서는 정말 귀한 눈이다. 희끗희끗한 잔설의 겨울산은 자유로운 시공 속을 흐르는 섬처럼 아름답다. 여기 올라오니 숨 막히는 절경에 모두 넋을 잃는 표정.

산하
▲ 상왕봉에서 내려다본 산하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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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산이 유달리 많고, 그 산마다 고유한 기품이 있다. 바다를 발아래 둔 부산의 금정산과 장산, 황룡산은 바다와 하늘이 합입된 삼천대계를 바라보게 한다면, 가야산은 구비구비 산맥의 어깨들이 지느러미처럼 솟구쳐서 비상하려는 그 찰나를 사진기에 잡은 모습이다.

투명한 살얼음이 깔린 맑은 계곡을 향해 떨어지는 물소리는 목탁소리보다 더 청아했다. 앙상한 계곡의 나뭇가지들은 고드름을 주렁주렁 주렴처럼 내리고 있었다. 청록의 나무에 하얀 눈송이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아름답고, 비탈진 계곡의 앙상한 크고 작은 나무와 푸른 대나무 잎들은 눈 옷을 겹겹이 껴 있고, 얼음 밑 장을 뚫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는 나귀처럼 눈이 덮인 숲 속에서 희미한 말방울소리를 듣는 듯.

칠불봉
▲ 가야산 칠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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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봉
▲ 가야산 상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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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은 겨울산의 정취에 흠뻑 젖어 콧노래를 모두 흥얼거린다. 그런데 흥에 겨워 산을 오르다 보니, 누굴 만나든 즐거워서 먼저 큰소리로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청한다.

상왕봉까지 올라오자 준비해 온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맛이 이렇게 괜찮은 맛이었던가, 의아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거푸 두 잔을 마셨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과 아담한 마을과 잔설을 덮은 겨울산이 보여주는 화엄에 넋을 잃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위험에 아찔해하기도 하면서, 꽁꽁 얼어서 제대로 내려오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데 일행 중에 누가 여분으로 준비해온 '아이젠'을 빌려 거뜬히 상왕봉에 오르고 칠불봉을 올랐다.

칠불봉은 해발 1433m이고 상왕봉이 해발 1430m이니, 칠불봉이 가야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가야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정복했다는 감회에 찰칵찰칵 여기저기 카메라 찍는 소리가 박수소리처럼 들렸다.

미끄럽고 위험하지만 산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네요.
▲ 겨울산행 미끄럽고 위험하지만 산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네요.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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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봉(七佛峰) 정상에 내려다보니 저 멀리 사바세계가 내가 두고 온 속세인가 싶다. 다들 이 높은 산에 올라오니 허기가 진다고 점심을 먹자 한다. 아니 시간이 벌써 늦은 2시다.

점심을 먹기 위해 억새가 우거진 자리를 찾아가지고 온 저마다 각자 다른 도시락을 꺼내 놓는다. 어떤 일행은 새벽잠을 설치며 아내가 마련해준 통닭찜을 어떤 일행은 형수가 준비해 준 돼지 족발과 김밥을, 어떤이는 오곡밥을…. 모두 꺼내 놓은 점심을 신문지 위에 차리니 진수성찬이다.

그리고 누군가 힘들게 배낭 속에 넣어온 막걸리 셋 통은 술 맛이 아니라 꿀맛이었다. 여행은 혼자 해야 한다고 여럿이 다니는 여행을 싫어했던 선입견이 이 순간 와르르 무너지면서, 겨울 산행은 혼자 해서는 기필코 안 되고 반듯이 여럿이 해야 한다는 것을 얼어붙은 등산로를 내려오면서 서로 잡아 주는 손에서 다시 느끼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산문에 기대어
▲ 가야산 해인사 산문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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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와 해인사 경내를 구경했다. 십 년 전인가 온 적 있는 해인사. 그러나 전혀 와 본적인 없는 것처럼 낯설다. 탑돌이 하는 광장을 지나, 대웅전에서 함께 온 일행들은 법당 안에서 불공을 드리고, 나는 사찰의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일주문의 길목에 있는 영지(影池). 영지는 전설이 깃든 일명 그림자 연못. 그림자 연못은 꽁꽁 얼어서 거울 못이 되어 있다. 환한 거울처럼 전생의 기억을 되비추어 주는 영지는,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모정이란 황후이든 범부이든 똑같다고 내게 이야기한다.

꽁꽁 얼어서 거울 못이 되어 있네요.
▲ 그림자 연못 꽁꽁 얼어서 거울 못이 되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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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아름다움
▲ 영지의 전설 사랑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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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의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후의 아름답고 지고한 사랑처럼, 두 사람은 혼례하여 많은 자손을 두었으나, 그중에 일곱 왕자가 허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처음 입산 수도하게 된 곳이 가야산 칠불봉이다.

허황후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왕자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곳을 수차례 찾아와 만나고자 했으나, 이미 출가하여 세상을 잊은 지 오래인 일곱 왕자를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황후는 왕자들이 수도하고 있는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비치는 이 연못에서 그림자만을 보고 애달픈 마음을 달래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왕자들은 지리산으로 수도처를 옮겨 그곳에서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에도 이와 같은 영지 전설의 내용이 남아있다.

아름다운 전설과 유래가 깃든 장소는 선사들의 영혼이 깃든 장소. 그래서일까. 아릿한 황후의 모정에 그리운 것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해 다소 감상적이 된다.

하얀 고드름
▲ 어머, 부산서 보기 어려운 하얀 고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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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일행과 함께 왔다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리고, 겨울 풍경에 넋을 잃고 제법 깊은 계곡에 들어와 고드름 주렴에 매혹되어 어린아이처럼 고드름을 뚝뚝 떼어먹는다. 정말 시원한 아이스크림보다 맛있다.

우리가 사는 계절은 겨울은 겨울답게, 봄은 봄스럽고,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는데, 따뜻한 부산에서는 고드름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가만히 생각하면 물은 인간의 심리를 닮은 것이다. 뜨겁게 끓다가 저렇게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음송곳이 될 수 있다니….

쌓인 눈 먹으니 너무 시원하네요.
▲ 댓잎에 쌓인 눈 먹으니 너무 시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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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지만, 어느 한순간은 혼자이고 싶은 것은 절대 모순이다. 함께 온 일행의 걱정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고 얼어붙은 계곡에 점점 어둠이 내린다.

이러다 길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조바심치면서 산길을 더듬거리며 내려오는데, 숲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 들려온다. 애타게 찾는 음성에, 볼을 후비듯 바람은 차가운데, 마음은 점점 따뜻한 난로 앞에 불을 쬐는 것처럼 훈훈하다.

겨울 산사는 은은한 종소리를 울리고, 나는 메아리처럼 들리는 내 이름에 잠시 행복해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가야산을 두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쉽다. '그래, 내년 겨울에 넉넉한 시간을 만들어 모두 함께 다시 와야지….' 새삼 나와 연결된 모든 인연이 감사하다.

우주의 질서와 윤회가 담겨 있네요.
▲ 탑을 도는 마음 속에 우주의 질서와 윤회가 담겨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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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를 놓쳐버리고 탑을 돈다.
시간의 파지가
휴지처럼 굴러다니는
이 탑을 돌고 또 돌면
놓쳐버린 그 차를
다시 탈 수 있을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 둘 탑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나 마지막 남은 탑이 되어
천년을 다시 기다릴 수 있을까.
생과 사가 맞물려
돌아가는 윤회의 바퀴소리
요란한데 묵묵부답의
탑은 자꾸 멀어지며
손을 흔든다.

- 자작시 '탑돌이'

덧붙이는 글 | 가야산은 지난 18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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