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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씨의 행적은 굴곡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고 한다.

4살 때인 1945년 11월 가족들과 함께 시모노세키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올랐지만, 정원을 초과한 배는 그만 쓰시마섬 앞바다에서 가라앉고 말았다.

 

가족들이 '무일푼'으로 고국에 돌아온 뒤 한국전쟁 와중에 이 당선자의 손위 누이와 남동생이 미군 폭격에 희생되는 등 불운은 계속됐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환경미화원과 행상 등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맡은 1964년에는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를 주도했다가 넉 달간 옥살이를 한 '열혈 운동권'이기도 했다. 석방 두 달여 만에 어머니 채태원씨가 세상을 떠난 것도 그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암울했던 개인사, '왕회장' 만나면서 '인생 역전'으로

 

암울했던 개인사는 이 당선자가 이듬해 '왕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면서 '인생 역전극'으로 바뀐다.

 

1965년 9월 구 현대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 공채1기로 입사하며 기업인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현대건설에 입사하려고 할 때, 회사에서 그의 운동권 경력을 문제 삼으려고 하자 그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젊은이의 '사회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편지를 쓴 일도 있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입사면접 당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정 회장의 물음에 "창조"라고 답했다.

 

이 당선자가 현대건설에서 29세 상무-32세 전무-33세 부사장-35세 사장-46세에 회장으로 이어지는 초고속 승진을 한 데에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추진력이 발판이 됐다.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 앞에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후보가 현대건설의 태국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폭도로 돌변한 현지 인부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쳤을 때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는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소개됐지만, 정주영 회장은 92년 회고록에서 "이명박씨는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다소 엇갈린 진술을 남겼다.

 

92년 민자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정계 진출

 

이 당선자는 27년간 한솥밥을 먹었던 정주영 회장에 대해 복잡한 심중을 가지고 있다.

 

그는 3월30일 연세대 경영대학원 총동창회 조찬강연에서 "정 회장과 함께 한 27년은 하늘이 나에게 준 축복"이라며 "그야말로 진정한 1세대 벤처기업인"이라고 치켜세우는 등 고인에 대해 깎듯한 예의를 갖췄다.

 

그러나 16일 공개된 2000년 광운대 강연 동영상에 따르면, 그는 "나와 정주영 회장이 '부자 관계다' '바늘과 실이다'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많은데 천만에 얘기"라며 "정이 들어서 같이 있는 게 아니라 회사에 도움 되니까 같이 있었다"고 양자가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강압으로 현대그룹의 발전설비 부문을 대우에 넘길 때도 정 회장 대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이 당선자였다. 이 당선자는 광운대 강연에서 "역시 위기에서 나쁜 일은 남을 시키는구나, 좋은 것은 자기가 하고"라고 오너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을 술회했다.

 

이 후보와 현대그룹의 결별설이 처음 나온 것은 91년 8월 12일. "13대 국회에 진출한 형 이상득 의원의 뒤를 이어 (당시 방송되었던) TV드라마 <야망의 세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동생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이 민주자유당(한나라당의 전신) 공천으로 14대 총선 출마를 검토 중"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노태우 정권의 대기업 정책에 불만을 품은 정주영 회장도 그 무렵 정치 참여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정 회장은 이듬해 1월 3일 경영 은퇴 선언을 한 뒤 통일국민당 대통령후보로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에 맞섰다. 같은 날 현대건설을 떠난 이 당선자도 92년 민자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된다.

 

민자당은 92년 대선에서 이 당선자에게 TV 찬조연설과 지원유세 등에서 정 회장을 공격하는 악역을 맡기려고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모신 은인에게 그럴 수 없다"며 이를 뿌리쳤다고 한다.

 

 

평탄치 않았던 국회의원 생활... 서울시장으로 도약 계기 마련

 

그러나 이 당선자에게 국회의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93년 3월 공직자 재산을 공개할 때 이 당선자는 62억3000여만원의 재산을 신고했지만 곧바로 "규모를 누락·축소 신고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논란이 된 서울 서초구 서초동 검찰청사 앞 노른자위 땅 470평을 공시지가의 거의 절반 값으로 팔아넘긴 뒤에도 신고액은 188여억 원으로 불어났다. 당시 언론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도곡동 땅 차명재산' 의혹은 여전히 이 당선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96년 4월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서 노무현·이종찬을 누르고 당선돼 정치인으로서의 변신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같은 해 9월 법정 선거비용을 축소 신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98년 의원직을 상실하고 미국으로 떠났는데, 1999~2000년 무렵에 만난 김경준씨와 인터넷금융업을 동업한 것은 올해 대선정국의 최대 이슈가 된 'BBK 사건'의 단초가 됐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사업은 김씨의 수익률 조작으로 좌초했지만, 그는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승리하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재임 4년간 청계천 복원과 버스 중앙차로 등의 성공작을 내놓으며 대중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른바 '여의도 정치'에서 한 발짝 물러나 행정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환경도 대중에게 "말보다는 일 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게 했다.

 

그러나 작년 5·31 선거 직후의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보면, 그는 당 대표를 맡은 박근혜 의원과 고건 전 총리에 이어 3위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당대표 경선에서도 이 후보가 후원한 이재오 최고위원이 박근혜 캠프의 지원을 받은 강재섭 대표에게 패한 데서 볼 수 있듯 당내 기반이 취약했다.

 

하지만 작년 10월 북한 핵실험이라는 변수는 이 후보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다.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국가 안보 위기를 해결하는 데는 여자보다 남자가 적임"이라는 여론이 퍼져나가면서 2006년 말~2007년 초 여론조사에서 50% 안팎의 지지율로 1위를 달리게 된다.

 

1월 들어 고 전 총리가 대선 레이스를 포기하자 중도층 지지까지 받으며 이 후보는 말 그대로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위장취업, 이회창 출마, 김경준 귀국... 끊이지 않은 악재

 

그러나 박근혜 캠프의 정인봉 변호사가 2월 이 후보의 도덕성 검증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박근혜 캠프와 범여권의 검증 공세도 시작됐다. 비서관 출신 김유찬씨의 '위증 교사' 주장, 곽성문 의원이 제기한 8000억원 재산설, 자녀들의 위장전입 의혹, 홍은프레닝 특혜 의혹, 충북 옥천 땅·서울 도곡동 땅 실소유주 논란 등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이 후보의 입지를 위협했다.

 

박근혜 캠프와의 경선 룰 협상 과정에서는 막판 '통큰 양보'를 보여줘 한나라당의 분열 위기를 넘어섰고, 경선 일주일을 앞두고 검찰이 "도곡동 땅 중 큰형 상은씨 지분은 제3자의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을 때는 '정치검찰 음모론'으로 저항했다.

 

경선 당시 여론조사 지지율이 34.9%(14일,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았지만, 이 당선자는 박근혜 의원을 1.5% 포인트(2452표) 차이로 제치며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자리에 올랐다.

 

이 당선자가 한나라당 후보가 된 후에도 마사지걸 발언과 자녀들의 위장취업, 범여권의 '이명박 국감' 공세, 이회창 출마, 김경준 귀국 등의 악재가 이어졌고 선거 막판에는 '이명박 강연 동영상'이 표심을 흔들었지만 '경제대통령'의 앞길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불도저' 이명박, 특검 뚫고 나갈까

 

철저한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이 당선자는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 임기 첫해부터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당선자도 국회 과반수를 넘는 반(反)한나라당 진영의 '이명박 특검'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새해부터 시작되는 특검과 4월 총선을 어떻게 헤쳐나갈 지에 따라 그의 정치력에 대한 점수도 다시 매겨질 가능성이 높다.

 

당선자 자신에게는 유감스러울 수 있지만,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의혹들을 말끔히 정리하지 않는 한 오늘의 영광은 '절반의 성공'으로 기억될 것이다.

 


태그:#이명박,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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