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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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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찍으면 사표가 돼."

언어에는 한 사회의 사고방식이 녹아있기 마련이다. 이 '사표'라는 말이 그렇다. 한국 근대정치사만큼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두가 알고 있듯,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동등하게 한 표를 갖는다. 이 개인의 선택권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사회적 지위와, 재산, 권력과 상관 없이 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히 개인의 의사에 따라 이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필요한 것은 합리적 판단이다. 다양한 정보를 놓고 토론하는 가운데, 어떤 후보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할 것인지 숙고하는 것이다.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민주주의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합리성의 그림자 '사표'

그러나 한국에는 이 민주적 절차를 해치는 비합리의 그림자가 곳곳에 배어있다. '사표'라는 말에는 '그냥 다른 사람을 따라서 투표하라'는 부당한 요구가 담겨있다. '될 사람을 밀자'는 발상은 후보의 능력이나 자격을 판단하는 '숙의'와 무관하며, 개인의 판단은 '집단'의 이름으로 간단히 무시된다. 

사표논리는 소신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조롱한다. 그것은 '죽은 표'고 쓸모 없는 표라고. 그런 표를 던지러 투표장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이런 집단적 사고가 교묘하게 한국사회를 지배해 왔으며, 정치권은 이 논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활용했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정말 어리석은 자들은 '될 사람을 밀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될 사람'을 뭐 하러 미는가? 안 밀어도 될 사람인데. 투표는 한 개인이 지지를 표하는 것이고, 이렇게 한 표씩 모인 지지의 결과로서 한 사람이 선출되는 것이다. '사표'는 후보를 미리 선출해 놓고 표를 던지라고 요구하는 것만큼 기이한 논리다.

민주주의와도 상관없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사표 논리는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아마도 다수의 무리 속에 속해야 편안함을 느끼는 심리적 동기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짓눌러 온 권위주의적 통치도 한몫했을 법하다. 과거 폭압의 시절에 소수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심리적 불편' 정도가 아니라 육체적 안전까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투표하라

가장 이상적인 투표행위는 이타적 투표일 것이다. 자신보다 적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을 지켜줄 후보를 고르는 것이다. '국익'은 무시하자. 이것은 실체가 없는 말이다. 후보를 고르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선후보치고 '국익'에 숭고한 애정을 보이지 않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이타적 투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타인을 배려하기는커녕, 자기 이익을 대변할 후보를 고르기도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니 욕심낼 것 없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득이 될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 만으로도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를 원하거나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식들에게 기업과 재산을 물려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탈규제'와 '감세' 정책을 내세운 후보에게 투표하면 된다. 부끄러워 할 것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권리다.

민주주의의 적은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를 나온 후보를 뽑는 게 도대체 내 장래에 어떤 도움('대통령과 동문'이라는 자랑 말고)이 되는 것일까? 그 후보가 비정규직인 당신 목을 죄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내세운 사람인데 말이다. 연고지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게  내 고향의 미래에 어떤 도움('일해공원'같은 기념물을 제외하고)이 되는가? 그의 관심이 오직 '수도권'에만 있다면.

노조는 노조 핍박 후보 지지, 연예계는 문화 탄압 후보 지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이 후보와 정책협약을 체결한 뒤 노총 관계자, 한나라당 의원들과 함께 기호2번을 뜻하는 'v'자를 그려보이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이 후보와 정책협약을 체결한 뒤 노총 관계자, 한나라당 의원들과 함께 기호2번을 뜻하는 'v'자를 그려보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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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노총은 한 후보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이들이 선택한 후보는 자신의 '반노조' 성향을 거듭해서 밝혀온, 따라서 노조의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람이었다. 해당 후보는 '지하철 기관사는 쉬운 자리여서 그게 드러날까 봐 파업도 못 한다'는 발언에, '인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부심이 있어서 노조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로 노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다.

이달 초, '한국대중문화 예술인 복지회' 소속 연예인 30여 명 역시 기자회견을 열어 한 후보에게 지지를 선언했다. 이 '후보야말로 대중문화 선진국의 위업을 달성할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보여준 문화관은 '불건전 음악인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올리라'는 주문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한 달에 한두 번 공연하면 나머지는 자유시간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전국의 42개 대학 총학생회장들도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그가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할 최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이 지지자들은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나가 비정규직의 고통을 온몸으로 안게 될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선택한 후보는 집권 후 '기업 경쟁력을 위해 필요하면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사람이다.

모순적인 지지선언으로 말하면 종교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가장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후보는 가장 심각한 도덕적 논란에 휩싸인 사람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주류'와 동일시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될 사람'에게 잘 보이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군사독재시절에 얻은, '밉보여서 좋을 일 없다'는 교훈 때문일까?

앞서 말했듯,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지지를 마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지지 후보의 집권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생각할 일이다.

내일 필요한 것은 사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과거를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 선거만 해도 그렇다. 월드컵처럼 4년마다 돌아오는 일상적인 행사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러나 대선은 20년 전, 우리가 피로 얻어 낸 소중한 권리다. 우리가 대통령 직선제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생각한다면 개인에게 주어진 표를 함부로 던지거나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중한 기회를 활용해 반드시 나의 이익을 지켜줄 사람에게 표를 던지도록 하자.

'사표'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에게 안 던지면 사표가 된다'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어도 '될 사람'이니, 무시하고 당신의 지지를 표하라. 막연히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나, 이유 없이 그 사람을 찍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 수도 있다. 이익에 반하는 선호, 우리는 이것을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될 사람'을 자임한 후보가 사회 변화를 주도한 적은 없다. '될 후보'만을 찍는 국민이 역사를 바꾼 일도 없다. 비록 당신이 던진 표가 이번에 대통령을 만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표는 언젠가 변화를 일구어 낼 것이다. 그러나 '될 사람'을 따라 찍는 유권자들에게는 미래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오직 당신의 용감한 '사표'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대선#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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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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