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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궁이 있었던 자리에 비각만이 외로이 서있다.
▲ 풍양궁 풍양궁이 있었던 자리에 비각만이 외로이 서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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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정에서 원기를 회복한 태종이 다시 풍양궁으로 돌아왔다. 가끔 앞산과 뒷산에 사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풍양궁에 칩거했다. 설날이 돌아왔다. 대비를 먼저 보내고 처음 맞는 정월 초하루였다.

"종친의 여러 군(君)과 2품관 이하는 하례 반열에 참예하지 말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태종이 엄명했지만 우르르 몰려왔다. 세종이 흰옷에 검은 사모를 쓰고 밖에서 헌수(獻壽)했다. 종친과 훈신 그리고 재상 등 58인은 모두 길복(吉服)으로 시연(侍宴)했다. 각도에서는 표(表)와 전(箋)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하례가 있은 후, 연회가 펼쳐졌다. 연회에서 비로소 풍악이 연주되었다. 국장 이후 처음이다. 세종은 머리에 꽃을 꽂지 않고 앞의 상에 꽂았다. 상보(床巾)는 검은 것을 사용했고 기물은 흑칠(黑漆)을 한 것을 썼다. 술이 돌아갈 적에 태종이 눈물을 씻으며 대소신료들에게 말했다.

풍양궁이 있었던 자리 앞쪽에 흐르는 개천을 오늘날에도 궐터천이라 부르고 있다.
▲ 궐터천. 풍양궁이 있었던 자리 앞쪽에 흐르는 개천을 오늘날에도 궐터천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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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이 나에게 헌수할 적에는 내전으로 들어와서 헌수하더니 오늘은 그런 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태종이 눈물을 흘렸다. 세종이 상복을 입고 마당에 거적을 깔고 헌수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태종이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좌의정 박은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침울한 상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사람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세종이 부왕을 부축하여 일어섰다.

"온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나를 이렇듯 사랑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또 하랴. 나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세종의 부축을 받고 일어 선 태종이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대비를 잃은 슬픔을 잊고 온갖 시름을 놓은 듯했다.

"성체(聖體)에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예조판서 허조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매일 산을 타고 꿩을 사냥하여도 피곤하지 않다. 이 정도가 무엇이 피로하겠는가?"
"매일 산 타시는 것이 신은 염려되옵니다."

산을 타는 것이 운동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늦은 밤까지 흥겹게 지속되던 연회가 파했다. 세종이 태종을 부축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자시를 넘긴 새벽 2경이었다.

전에는 매년 그믐날 밤이면 번 드는 신하들에게 차는 칼(佩刀)과 활, 화살 등의 물건을 하사해서 내기하여 갖게 하였으나 이 해에는 대비의 상중에 있으므로 실시하지 않았다. 원경왕후 국장 이후 근래에 보기 드문 성대한 잔치였다.

창덕궁 금천교. 임금과 신하는 이 다리를 건너며 마음을 씻었다.
▲ 금천교. 창덕궁 금천교. 임금과 신하는 이 다리를 건너며 마음을 씻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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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으로 돌아온 세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비를 잃고 외로워 보이는 부왕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비어 있는 옆자리가 너무나 크게 보였다. 대비의 상중이지만 시간을 끌어서는 아니 될 것 같았다. 외로움이 병이 되어 몸져눕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세종은 중전과 마주앉았다.

"중전! 아바마마께서 매우 적적하신 듯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비를 저승으로 떠나보낸 태종은 이직(李稷)의 딸 이씨와 이운로의 딸 이씨를 새로이 들였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일찍이 홀로 된 33살 과부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녀일 뿐 대비 자리는 비어 있었다.

"대비마마의 상중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전하께서는 잠자코 계시면 소첩이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아버지를 장가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공비도 이제 수줍은 새색시가 아니다. 대궐에 들어온 관록이 붙은 여인이다. 더욱이 대비가 없는 현재 내명부의 제일 큰 어른이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장가 보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세종이 변계량과 조말생을 불렀다.

"중전이 대비전을 맞아들여 한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

조말생이 찬성했다.

"대비가 이미 돌아가고 김씨도 나가 버렸으니 마땅히 상왕을 위하여 명가의 딸을 가려 빈(嬪)과 잉첩(媵妾)의 자리를 보충해야 될 것입니다."

변계량도 찬동했다. 이 무렵 경녕군을 낳은 효빈김씨는 궁에서 나가 있었다. 대소신료들이 풍양궁에 찾아가 대비를 모셔야 한다고 극력 주청했다.

"늙은이가 장가라니 당치않다."
태종은 불같이 호통 치며 반대했다.

"중전마마의 청이 간절하옵니다."

태종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아름다운 충격이었다. 며늘아기가 시아버지를 위하여 마음을 쓰고 있다니 고맙고 기특했다. 하지만 늙은 나이에 새 장가를 든다는 것은 뭔가 어색해 보였다.

풍양궁터를 지키고 있는 하마비가 외로이 서있다. 세월의 더께일까?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글씨가 마모되어 읽기가 어렵다
▲ 하마비. 풍양궁터를 지키고 있는 하마비가 외로이 서있다. 세월의 더께일까?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글씨가 마모되어 읽기가 어렵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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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될 일이다."
태종의 뜻은 단호했다. 하지만 주청하는 신하들이 물러서지 않았다.

"중전마마의 뜻을 어여삐 봐주시옵소서."

항상 아기만 같던 공비의 뜻이라니 태종의 마음이 흔들렸다. 반대하던 태종이 마지못해 물러섰다. 묵시적 동의다. 즉시 금혼령이 떨어지고 가례색(嘉禮色)이 설치되었다. 조선 팔도에 혼인이 금지된 것이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우의정 정탁, 이조판서 허지, 예조판서 이지강, 병조판서 조말생, 지신사 김익정 등에게 상왕을 위한 빈(嬪)과 잉첩(媵妾)이 될 만 한 자를 천거하게 했다.

상호군 조뇌(趙賚)와 좌랑 장수(張脩)의 딸, 그리고 전 현감 신기(愼幾)의 딸이 추천되었다.

공비(恭妃)가 가례색에서 뽑아 올린 이들을 궁중에 불러들이도록 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될 사람을 뽑기 위해서다. 그러나 덕과 용모를 고루 갖춘 사람을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다.

대비의 자리는 그렇게 녹녹한 자리가 아니다.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중전을 거느릴 수 있는 여인이어야 했다. 내명부의 큰 어른으로서 아랫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할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 풍양궁에서 전갈이 왔다.

"나는 장가들고 싶지 않다. 그리 알라."

마지못해 침묵하고 있던 태종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태종의 완고함을 넘지 못한 조정은 가례색을 폐했다. 세종과 공비도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쉬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로서 태종의 새장가는 없었던 일이 되었다.


태그:#가례색, #공비, #세종, #태종, #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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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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