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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터인 도서관에서 내려다본 배다리 헌책방골목입니다. 세거리 모퉁이에 있는 <한미서점> 간판이 잘 보입니다.
▲ 배다리 헌책방골목 우리 일터인 도서관에서 내려다본 배다리 헌책방골목입니다. 세거리 모퉁이에 있는 <한미서점> 간판이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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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백 해

금요일 저녁, 도서관 문을 닫고 동네 마실을 나갑니다. 한쪽 어깨에는 사진기를 멥니다. 아침부터 이른저녁까지는 도서관을 지키며 책하고 씨름을 했다면, 해 떨어진 늦은저녁과 밤에는 동네 골목길을 구비구비 더듬으며, 골목집 사람들 삶터를 하나하나 담아내며 지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곳 골목집들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찍는 골목집 사진은, 사라져 버릴까 걱정스럽고 안타까와서 남기는 발자국일 수 있지만, 사라질까 아슬아슬한 골목길이라서 사진으로 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찍습니다.

이 골목길이 마흔 해를 묵었건 쉰 해를 묵었건 예순 해를 묵었건, 또는 백 해나 이백 해를 묵었건, 바로 이 길을 밟거나 거닐며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한 목숨이 저승으로 떠나면 한 목숨이 이승으로 왔기 때문에 사진으로 담습니다. 눈물이 맺혀 있는 길이지만 웃음도 맺혀 있는 길입니다.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 아저씨 할아버지가 새벽바람으로 비질을 하여 청소부가 따로 없어도 지저분하지 않은 골목길이고요. 아주머니 아저씨가 새벽비질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도 좋지만, 비질을 마치고 전봇대 한켠에 얌전하게 세워 놓는, 그냥 바깥에 그렇게 세워 두며 한삶을 이어내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도 좋다고 느낍니다.

페인트 벗겨진 담벽도 좋고, 시멘트 바른 모습 그대로 있는 담벽도 좋습니다. 녹이 다 슬어서 쇠가시그물 구실을 못하는 녀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담벽도 좋습니다. 덩굴풀이 마음껏 자라날 수 있는 담벽도 좋습니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집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담벽 또한 좋습니다.

담벽을 따라 죽 벽돌을 쌓고 흙을 담아 와서 마련한 손바닥 텃밭에 심은 나무가 어느덧 지붕 위로 훌쩍 키를 높인 길도 좋습니다. 향긋한 장미나무도 좋고, 냄새없는 장미나무도 좋습니다. 알뜰히 자란 푸성귀 꽃그릇도 좋고, 이름도 모르면서 꽃이 이쁘니 키운다고 하는 스티로폼 꽃그릇도 좋습니다.

벌써 열세 해째, 집안에 텔레비전을 키우지 않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저녁에 도서관 문을 닫고 밤마실을 나와서 골목길 집터와 삶터를 돌아봅니다. 시원하거나 따순 방에 앉거나 드러누워서 연속극 바라보는 일도 즐거울 수 있겠지만,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걷다가 한동안 가만히 서서 골목길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도 즐겁습니다. 흐릿한 거리 등불도 좋고, 아주 밝아 배드민턴을 쳐도 될 만한 거리 등불도 좋습니다.

제 살림집이 깃든 건물은 1957년에 세운 녀석. 기찻길 바로 옆에 있기에 새벽부터 밤까지 덜컹덜컹 소리 높으며 때때로 건물이 흔들흔들 합니다. 하지만 쉰 해라는 세월을 잘 버티어 왔고 앞으로도 잘 버티리라 봅니다.

이 건물 둘레에 70∼80년대에 지었던 아파트는 벌써 모두 허물고 새 아파트를 올렸지만, 그 새 아파트라는 곳들도 앞으로 열 해쯤만 지나면 벌써 헌 아파트 소리를 들으며 재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요. 하지만 제가 깃든 이 건물 같은 작은 집들은 쉰 해뿐 아니라 예순 해를 묵었어도, 헐어버린 다음 새로 올릴 걱정이 없습니다. 앞으로 스무 해뿐 아니라 서른 해도 끄떡없습니다.

사람 사는 집이라면 적어도 백 해, 아니 이백 해, 아니 삼백 해 앞쯤은 내다보고 지어야지 싶어요. 우리가 손에 쥐어들고 읽을 만한 책이라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어도 백 해, 아니 이백 해, 아니 삼백 해 뒤에 태어나서 살아갈 사람들이 펼쳐들어도 ‘참 좋네요. 이래서 바로 책이네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책을 꼼꼼히 가려내고 살피며 읽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우리가 하는 일도 앞으로 삼백 해 뒤 사람들도 할 만한 일, 우리가 즐기는 놀이도 앞으로 삼백 해 뒤 사람들도 즐길 만한 놀이일 때 한결 아름답거나 신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닐까요?

헌책방골목에서 책방 안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들여다보기 헌책방골목에서 책방 안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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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어린이책에는 무슨 이야기를

골목길 마실에 앞서 잠깐 헌책방에 들르기로 합니다. 집 코앞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나들이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헌책방입니다. 도서관 지키랴 글쓰랴 바쁘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일 때문에 바쁘기보다는 저부터 마음을 느긋하게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싶어요.

〈한미서점〉에 들어섭니다. 헌책방 아저씨한테 꾸벅 절을 하며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먼저 오른쪽 골마루로 들어갑니다. 책방 아저씨가 곳곳에 걸어놓은 원두커피주머니에서 퍼져오는 냄새가 납니다.

두리번두리번 요 책 끄집어내고, 조 책 들추어봅니다. 오늘은 어린이책을 좀 살펴볼까 하는 마음으로 어린이책 있는 골마루로 옮겨 갑니다. ‘학습만화위인전(세계편)’ 18번인 <조재룡 그림,이주훈 글-시튼>(동아출판사?)이 보입니다. 판권이 없군요. 전집으로만 팔던 책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만화가 퍽 어설퍼서 소가 소인지, 이리가 이리인지 까마귀가 까마귀인지 알아볼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척 좋아하는 어르신 가운데 한 분인 시튼이라는 분 삶을 아이들이 만화로 살필 수 있도록 엮어낸 책이기에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봅니다.

― 왜 이렇게 슬플까. 나는 결코 이긴 것이 아니야. 로보의 사랑에 지고 만 거야. (34쪽)
― 그러나 시튼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까마귀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 슬픈 사건은 시튼의 머리에서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 (55쪽)
―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하루라도 빨리 1달러를 모아서 저 책을 꼭 사야지. (63쪽)
― 돌아가자! 동물 곁으로 돌아가자! 동물들의 뛰어난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슬픔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꼭 가르쳐 주어야 한다! (133쪽)


만화는 엉성궂어도, 줄거리가 알뜰하다면 봐줄 만할까요? ‘소년소녀 위인전기(한국편)’ 가운데 <신동우 그림, 오영석 글-김옥균>(금성,1990)과 <신동우 그림, 이희춘 글-슈바이처>(금성,1990)를 고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쟁이인 신동우 님 그림이 담겼기에 고릅니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신동우 님. 흔히 ‘신동우 화백’이라고들 말했습니다. 소시지 광고 만화도 그리고 책 겉그림이며 사잇그림을 무던히 많이 그리셨던 신동우 님. 저한테는 신동우 님 그림이 담긴 보자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일하던 출판사 사장님이 무슨 물건을 싸 주면서 함께 딸려 온 보자기인데, 겉에 “민주정의당 강서지구당 창당대회기념, 1980.12.23. 위원장 남재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요.

한복판에는 신동우 님 만화가 그려져 있지요. 그림을 보면 안경 쓴 할배가 북을 치며 사람들을 이끌고, 뒤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이웃을 알고 이웃을 돕자’라는 글이 적힌 걸개천을 들고 따라옵니다.

이 보자기를 끌르던 그때 그냥 보자기이니까, 돌려드릴까 하다가 다른 보자기를 드리고 이 보자기를 살짝 챙겼습니다. 역사에 남을 만하다고 느껴서.

책방 곳곳에 걸어 놓고 향긋한 냄새가 퍼지도록 마음을 기울여 줍니다.
▲ 원두커피 주머니 책방 곳곳에 걸어 놓고 향긋한 냄새가 퍼지도록 마음을 기울여 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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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그림사회’라는 어린이책 가운데 <남아시아>(계몽사,1983)와 <북아메리카>(계몽사,1983)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북아메리카>를 들추니, “미국인 세계 인종 전시장”과 “감추어진 편견”이라는 풀이말이 보입니다.

.. 최초의 미국 대륙의 주인은 인디언이었다.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자 처음에는 영국, 아일랜드, 도이칠란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로 유럽에서 사람들이 옮겨 왔다. 그리하여 농업이 성해지고, 특히 남부에서 대규모의 목화 재배가 시작되자 많은 일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많은 흑인 노예가 끌려왔다. 그 뒤 서부가 개척되면서부터 중국인, 필리핀인 등이 역시 노동자로 끌려왔다. 물론 그밖의 나라에서도 많은 종류의 인종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그런 관계로 미국은 갖가지 인종과 문화가 한데 뒤엉켜 마치 인종 전시장처럼 되었다.

워낙 여러 인종이 섞이게 되자 풍습도 종교도 제각각이었다. 이러한 형편은 어떤 면에서는 퍽 좋은 것 같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선 갖가지의 인종들이 섞여 백인ㆍ황인ㆍ흑인ㆍ회색인 등 피부색에 따라 서로가 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것이 곧 인종차별이라는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미국인이라도 피부색에 따라 사는 형편이 다르다. 특히 흑인의 경우는 가난하다. 이러한 데서 오는 편견이 곧 인종 사이의 우수함과 바보스러움을 나누려는 나쁜 태도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미국 병이다 ..  (42∼44쪽)

1983년에 이 책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책 도움을 받았을까요. 책에 실린 이야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키웠을까요.

말은 ‘북아메리카’라고 하지만, 캐나다와 미국 두 나라만 다루고, 다른 나라들은 한쪽에 아주 조그맣게 다루면서 겉핥기로, 그것도 속을 하나도 들여다보지 않는 대충대충으로 다루어 버립니다.

[자메이카] 이 섬나라는 콜롬부스가 발견하여 에스파니아가 기지로 삼았다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1655년 영국이 점령하여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총독이 다스리다가 최근에 독립하였다. 이 나라는 설탕, 바나나, 코오피가 주산물이지만, 농산물은 모두 수입하기 때문에 생활이 좀 어려운 편이다. (113쪽)

2007년 오늘날 북아메리카를 다루는 어린이책을 펴낸다고 한다면, 요즈음 어린이책 엮는이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깃든 나라들을 얼마나 고르게 나누고 얼마나 속깊이 헤아리며 얼마나 차근차근 그곳 사람들 삶과 삶터를 보여줄까요. 자메이카라는 나라에 유럽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식민지로 삼기 앞서도 이 나라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바깥에서 사와야’ 했는지 아닌지를 한 번이나마 생각해 보기는 할까요?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아니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우리는 어떤 책을 바라고 있는가요.
▲ 어떤 책을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아니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우리는 어떤 책을 바라고 있는가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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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무엇이 헌책인가

<마를리스 멩게/최상안 옮김-동독의 통일 혁명>(을유문화사,1990)이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1990년에 나온 이 책은 지금도 새책방에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서독 기자들이 쓴 글에 따르면, 엘베강에서 북해로 흘러들어가는 유해물질들은 동독과 소련에서 유입되는 것이라고 한다. 반대로 동독 신문들은 서독이야말로 북해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비난하면서 서독이 바다에 흘려보낸다는 중금속과 염산의 양을 엄청난 숫자로 열거했다 ..  (47쪽)

<동독의 통일 혁명>이 나오기 앞서는 동독과 서독은 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글쓴이는 동독에서 태어나 서독에 있는 신문사에서 일하던 사람. 두 곳을 부지런히 오가며 하나가 되기 앞서 독일(이 가운데 거의 동독)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찬찬히 들려줍니다.

.. 그 친구는 서독인들이 페레스트로이카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데 대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잘 아는 동베를린 사람이 내게 들려준 말이 생각난다. 고르바초프가 결국은 서독사람들의 마음속에 또다시 동독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 주게 될 것이라는 씁쓰레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독일인들은 소련사람을 열등한 종족으로 취급해 왔어. 히틀러의 선전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일 거야. 그런데 지금 동독사람들은 그 못난 소련인들이 실천하고 있는 일조차 해낼 능력이 없단 말일세!”

나는 혹시 동독의 직장에서 콜 수상의 모스크바 방문 소식이 화제거리로 등장하느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뭣 하러 그런 얘길 꺼내겠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지? 너희 정치가들이 입버릇처럼 떠들어대는 재통일을? 그건 너도 믿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 친구는, 자기 집 세탁기를 아직도 수리해 주지 않았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동독 내에서 불만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뭔가 의욕이 있기 때문에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의욕조차 꺾여 버린 상태이다. 요즈음 그들은 우울하고 시무룩한 마음으로 체념에 빠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독 시민들도 날마다 서방 세계의 매스컴을 통하여 소련, 헝가리, 폴란드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소식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라들과 비교할 때 동독은 홀로 요지부동으로 경직되어 있다.

이런 마당에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아무리 많이 따온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이 300만 호의 주택을 지어 개인에게 분양해 준 사실이라든가, 사치스러울 만큼 거창하게 치른 175회 라이프치히 승전 기념 행사는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  (27∼28쪽)

두 해만 더 있으면 어느덧 스무 해 앞선 때 이야기입니다. 이제 동독과 서독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된 뒤로도 ‘다르게 살아왔던 한 겨레 두 나라’ 사람들 앙금은 쉬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을지 모르고, 앞으로도 풀리기 어려운 실타래가 있을지 모릅니다.

‘다르게 살고 있는 한 겨레 두 나라’인 우리들은, 아니 ‘한 겨레 다섯 나라’ 또는 ‘한 겨레 여섯 나라’쯤 되는 우리들은 어떠할까요. 남녘과 북녘뿐 아니라, 재일조선인과 중국조선족과 러시아조선족과 중앙아시아조선족 들은 어떠할까요. 우리들을 서로 잇는 끈이란 무엇이며, 우리들한테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니 ‘집 300만 채 짓고 사람들한테 거저로 나누어 주는 일’이란 없겠지만, 새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이, 또 예전에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아파트를 수백만 채 지어서 집없는 사람들이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읊던 그런 다짐과 이야기들은 우리한테 얼마나 살갗으로 와닿는 이야기였을까요.

수영선수 박태환이, 피겨선수 김연아가, 야구선수 박찬호가, 골프선수 박세리가, 우리들 기쁨과 슬픔을 달래고 어루만져 주는 반가운 소식들인지요.

끈으로 얌전하게 묶인 채 새 임자를 기다리는 책들.
▲ 묶인 책 끈으로 얌전하게 묶인 채 새 임자를 기다리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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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파파넥/한도룡, 이해묵 옮김-인간과 디자인>(미진사,1986)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나온 지 몇 해 되지 않았으나 벌써 시중 새책방에서 판이 끊어져 버린 <인간과 디자인의 교감, 빅터 파파넥>(디자인하우스, 2000)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빅터 파파넥이라는 디자인쟁이가 책상물림 지식인이 아니라, 온몸으로 사람들 삶터를 부대끼며 손품을 들이는 디자인쟁이임을 느꼈어요. 그래, 이런 책이 진작 나왔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에 집습니다.

.. 필요성은 일반대중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디자이너의 머리나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잘못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된 답이 나온다. 이들 해답들은 비인간화시켜 버리는,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리고 고도의 기계화해 버리는 답변일 때가 흔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 타는 자동차, 거주하고 일하는 건물들은 종종 인간적인 측면이 결핍되어 있따 ..  (100쪽)

오늘 만난 빅터 파파벡 <인간과 디자인>은 1993년에 중판을 찍었고 책값이 4500원으로 찍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 찾기를 해 보니, 요즘 시중 새책방에서는 1만 원에 팔립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판이 끊어지지 않아서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녹색위기>(조형교육,1998)라는 다른 책도 하나 있음을 새로 알게 됩니다.

2000년에 나왔으나 판이 끊어져 사라지고 만 책과, 1983년에 나왔으나 판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도 꾸준하게 만날 수 있는 책, 이 두 가지 책 가운데 어느 책이 헌책이고 어느 책이 새책일까요.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쌓이는 책일지 모릅니다만,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책이기도 합니다.
▲ 쌓인 책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쌓이는 책일지 모릅니다만,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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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달톤이라는 한 학생은 조립라인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다른 근로자들을 관찰하였다. 실제 작업에 참여해 보고 조합 담당자와 대화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안면보호기를 개발해냈다 …… 성능이 보다 우수하고 외관상 보기에도 좋은 장비에 대한 욕구는, 근로자로부터 직접 나와야 하며, 그러한 욕구는 디자인팀에 근로자의 진술이 반영되어 더 좋은 제품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  (46∼47쪽)

앞으로 2050년이 되고 2100년이 되더라도 빅터 파파넥 이분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고이고이 이어지면서 우리들한테 좋은 깨우침과 가르침을 선사해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 길

고른 책을 주섬주섬 챙겨서 셈대에 올려놓습니다. 책값을 치릅니다. 고른 책은 품에 안아서 도서관에 올려다 놓습니다. 가벼운 몸차림으로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철길을 건너 도원동으로 가 볼까, 철길을 따라 걷다가 숭의동으로 가 볼까. 아니면 산업도로 공사터를 따라가다가 송현동이나 송림동으로 가 볼까. 아니면 싸리재를 넘어 신포시장을 지나 북성동으로 가 볼까. 야구장을 가로질러 국민학교 적 동무가 일하는 체육사로 찾아가 술 한잔 하자고 부추겨 볼까.

사진기를 메고 걷는 길은 더딥니다. 걷다가 멈추어 찰칵 한 장. 또 걷다가 또 멈추어 찰칵 두 장. 어두운 밤골목을 찍기 때문에 셔터빠르기는 0.5초, 1초, 2초, 때로는 4초까지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골목길 벽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찍어 보지만 셔터빠르기 2초나 4초를 버티어 내기는 어렵습니다.

골목이 끝나면 큰길이 나와 자동차가 씽씽 달립니다. 자동차 다니는 큰길을 건너 다시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골목길로 접어드니 차소리가 모두 끊어집니다. 올망졸망 붙어 있는 골목집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 주는 소리막이벽이 되어서 차소리를 끊어냅니다. 창문 안쪽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오고 도마질 소리가 흘러나오며 아이들과 어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부부싸움 하는 소리,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이 동네가 온통 뒤엎히고 아파트라는 새옷을 입게 된다면 무척 심심하고 쓸쓸해지겠지요.

밤마실을 하는 골목길.
▲ 밤 골목길 1 밤마실을 하는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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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골목길에서 만나는 온갖 꽃그릇들.
▲ 밤 골목길 2 밤 골목길에서 만나는 온갖 꽃그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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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인천 배다리 〈한미서점〉 / 032-773-8448



태그:#헌책방, #한미서점, #배다리, #인천,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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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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