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무렇게나 버려진 배추 시래기들. 나 어렸을 적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배추 시래기들. 나 어렸을 적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쌀 한 톨의 무게가 수미산보다 더 무겁다

내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시절이었다. 힘들게 논농사를 짓고 밭농사를 지어도 허기진 배를 채울 길이 없었다. 불가에 전해내려오는 "시주의 쌀 한 톨의 무게가 수미산보다 더 무겁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거나 허튼 말이 아닐 정도로 곡식이 귀했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수미산은 세계의 중앙에 솟아 있는 산을 말한다. 밥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밥알이나 김치 쪼가리를 흘렸다간 당장 할아버지에게서 벼락이 떨어졌다.

"옛날엔 구정물 통에 있던 밥알까지도 다 건져 먹었단다."

초등학교 시절엔 보리나 벼를 수확한 후 논 주인이나 밭 주인이 땅에 떨어트리고 간 보리 이삭이나 벼 이삭을 주우려고 온종일 들판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5학년 때였던가. 교과서에 실린 19세기 프랑스 사람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이삭줍기'라는 그림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내게 밀레의 그림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먼 나라의 풍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삶의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모자란 식량은 밥의 형태를 다양하게 했다. 꽁보리밥, 무밥, 시래기 죽 등등. 난 까칠까칠한 보리밥이 정말 싫었다. 쌀 10%에다 송송 썰어 넣은 무채 90%를 섞어서 짓는 무밥은 더 싫었다. 무밥은 남은 반찬을 몽땅 버무려 비벼먹도록 하기 위해 태어난 밥의 형태였다.

이런 식의 밥들은 그저 헛배만 부를 뿐이었다. 분명히 고봉으로 퍼준 밥 한 그릇을 먹었건만,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배가 푹 꺼지곤 했다. 꽁보리밥이나 무밥에 이골이 나기도 했다. 흰 쌀밥 한 번 고봉으로 먹어봤으면 원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할머니는 "네 뱃속엔 거지 삼시랑이 들어 있는 갑다"라고 핀잔을 주곤 하셨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다양한  '이삭줍기'

아파트 베란다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시래기.
 아파트 베란다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시래기.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우리들의 '이삭줍기'는 벼나 보리 이삭을 줍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밭 주인이 캐고 난 밭고랑을 살살 더듬어서 고구마나 감자 등을 줍기도 했다. 배추나 무를 뽑아가고 난 밭을 돌면서 시래기를 줍고 다니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시래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거리였다. 아니, 국거리를 넘어서 일종의 식량이었다.

제 밭에 심었던 배추나 무에서 나온 시래기와 남의 밭에서 주운 시래기를 두름으로 엮는다. 그리고 처마 끝에다 대롱대롱 매달아 놓는다. 시래기는 육지에서 나는 굴비였다. 싱싱한 푸성귀가 부족한 겨울을 나는 데 필수불가결한 살림 밑천이었다. 겨우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시래기들은 부엌으로 불려갈 차례를 기다린다.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단련된 시래기일수록 더 쫄깃쫄깃한 맛이 났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세상이나 시래기 세상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의 이치인지 모른다.

짧고 가느다란 겨울 햇살이 텅 비어 무색투명한 내 위장을 렌트겐 광선처럼 통과하는  저녁 무렵이면, "밥 먹어라"고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마을 공기에 잔잔한 균열을 내면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리고 밥상머리에 앉아서 찬찬히 메뉴를 점검한다.

"애개개, 오늘도 또 시래깃국이야?"
"음식 타박하는 사람치고 잘사는 사람 씨도 없더라. 세상엔 시래기국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도 쌔고 쌨다."


내가 시래깃국에 정말 물렸다는 표정을 지으면 할머니는 슬그머니 메뉴를 바꾸신다. 시래기죽으로. 시래기는 물리적 변화가 고작이었다. 절대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래기에다 쌀을 넣고 끓이는 시래기죽이 무밥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아무튼 시래깃국은 충직한 머슴처럼 한겨울 가난한 우리집 밥상을 지켰다. 이상한 일은 입이 몹시 짧아 아무리 맛있는 것에도 금세 질리고 마는 내가 시래깃국이나 시래기죽에는 질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긴 우리 집의 맛 있는 된장도 한 몫 거들었던 것인지 모른다.

경복궁 옆 사간동 근방, 무슨 궁중요리 전수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하는 식당에서 된장국을 먹어본 적이 있다. 거기서 아주 세련된 된장국 맛이었다. 그러나 내 혀는 '우리 할머니의 된장국 맛만은 못하다'라고 도리질을 쳤다.

손자 하나 키우시고 훌훌 가셨으니

<유심> 2005 가을호 표지.
 <유심> 2005 가을호 표지.
ⓒ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관련사진보기

남들 다 버린
무 배추 잎을 주워 와서
새끼줄에 곱게 엮어 둔 것이
누렇게 시래기가 되었었지.
무서리 내리고 눈발이 성성 비치면
시래기 한 다발씩 가마솥에 넣어
푹 고아 내셨었지.

이제 할머니는 먼 길 가시고
나는 장터거리 주막에서 시래기 국 먹는다.
눈발이 성성 날리고
막걸리 잔은 벌꺽벌꺽 잘도 넘어가는데
뜨거운 시래기 국 위로
눈발처럼 떨어지는 그리움,

남들이 버린 허드레 배추 잎이며 무 잎을 주우시던
그 꺼칠꺼칠한 손
툭수바리 같은 손,
그 손에 손자 하나 거뜬히 키우시고 훌훌 가셨으니
막걸리 사발에도 눈물나고
시래기 국 사발에도 그리운 눈물난다.

- 김종 시 '그리운 할머니' 전문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펴내는 월간 잡지 <심상> 2005년 가을호에 실린 김종 시인의 시 '그리운 할머니'는 내가 쓰고 싶은 소리를 대신 읊어준 시나 다름없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김종 시인은 <모닥불> <다시 또 눈 내리고> 등의 시집을 상자한 바 있다. 신춘문예를 거치고 <현대문학> 추천까지 받은 김종 시인은 내가 젊었을 적만 해도 동향의 김준태 시인 못지않게 촉망받던 시인이었다.

한동안 뜸했던 그의 시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무척 감회가 새롭다. 내가 그의 시에 특별히 보탤 말은 없다. 눈보라 치는 날 저녁, 너무 뜨거워 호호 불어가며 말아먹는 시래깃국이 제일 맛있었다는 말 외엔.

할머니의 추억을 더듬는 김종 시인의 시는 일종의 애가(哀歌)다. 시래기는 물리적 변화밖에 모르는 단순한 음식 재료지만, 시래기를 노래하는 시는 종종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겨울을 견디는 시래기는 민중의 표상이다

지난 시대와 다르게, 우리는 지금 포만의 시대, 비만의 고통을 겪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에 따라 대중들의 음식 재료인 시래기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재조명할 필요도 생겨났는지 모른다. '사랑의 시인' 도종환이 지난 8월에 내놓은 시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에 실린 '시래기'라는 시가 그런 시가 아닐까.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랜덤하우스코리아

관련사진보기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도종환 시 '시래기' 전문

도종환 시인에 따르면 시래기는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 간다. 그런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래기들은 사람에 의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을 받는 억울함을 겪는다.

그러나 시래기들은 그런 대접에서 초연하다. 운 좋게 사람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시래깃국으로 환생을 꿈꾸는 시래기들은 사람들의 냉대를 애써 기억하지 않는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면서 마지막 헌신을 기다릴 뿐이다.

시의 끝자락에 이르면 시인은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라는 반문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시래기는 민중의 표상이다. 순교자란 다름 아닌 민중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는 시래기를 거의 순교자적 위치에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시래기는 이제 저만큼 흘러가버린 과거의 음식인가? 아니다. 시래기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재의 음식이다. 오늘도 시래기 된장국, 시래기 사골국, 오모가리탕, 메기탕, 추어탕 등에 담겨서 힘찬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 기름기 많은 음식에 물린 탓일까, 아니면 진심보다는 교태가 판을 치는 세상사에 질려버린 탓일까. 시래기의 담백한 맛이 새롭게 각광받는 까닭은 기호의 문제라기보다 본질적인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사이 시골을 가거나 도시의 주택가를 거닐다 보면 시래기 두름을 걸어놓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때마다 난 "저 집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시래깃국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사후에는 자식들에게 한 그릇의 음식으로 추억되는 존재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시래깃국이나 시래기가 담긴 요리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추억하곤 한다. 어린 시절,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시래기였다.

처마끝에 걸린 시래기는 우리 할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아이콘이다. 좀 더 겨울이 깊어 눈발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처럼 휘날리는 저녁이 오면 시래기죽 한 그릇으로 절절한 그리움을 달래리라.


태그:#시래기, #할머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