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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언양으로 가려면 남천을 건너게 된다. 남천을 건너면서 바로 왼쪽을 보면 반월성과 경주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를 지나 400m 정도만 가면 바로 오릉 사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부터 왼쪽으로 남산이 펼쳐진다. 남천과 남산이니 내와 뫼가 경주의 남쪽에 있다는 뜻이다.


오릉 사거리 지나 200m를 더 나아가면 왼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이 나타나는데, 그 소로를 300m만 걸으면 나정에 닿는다. 나정이라면 박혁거세가 태어난 장소에 예부터 있던 우물이다. 그런가 하면, 나정(사적 제 245호)에서 불과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포석정이 있다. 포석정(사적 제 1호)이라면 신라 경애왕이 궁녀들과 술을 마시며 놀던 중 견훤의 침입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자결을 하게 되는 비극의 장소이다.

 

허무하게 죽은 경애왕의 무덤도 물론 남산에 있는데, 포석정에서 불과 1km 지점에 있다. 경애왕릉(사적 제 222호) 바로 옆에는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삼릉(사적 제 219호)이 있다. 남산 일원은 국가가 지정한 사적 제 311호인 바, 다름 아닌 신라의 시작과 종말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남산에서 찾은 불국정토의 흔적’이란 주제로 남산 사진전을 연 사진 동호인회가 있어 주목을 받았다. 지난 12월 1일부터 8일까지 대구광역시 반월당 지하철역 메트로센터에서 “경주 남산 사진전”을 연 한빛창작회.

 

지난 3년 동안 주말과 휴일이면 줄곧 경주 남산을 찾아 출사를 했고, 그 결과물 중 47점을 골라 일반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한빛창작회 덕분에 경주 남산에 올라보지 않은 일반인들은 눈으로 역사기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등산을 해본 이들은 지난 추억을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신라문화유산의 보고, 불교유적의 노천 박물관, 경주 남산! 참으로 놀랐습니다. 더 가까이 갈수록 더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진정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크지 않은 산이지만, 불상, 석탑이 100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골마다, 구석구석 불국정토를 찾은 흔적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 중국의 만리장성이 권력의 힘으로 조성되었다면, 경주 남산유적은 서민들의 신앙의 힘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보물입니다. 조성된 불상들의 모습에서 신라의 필부필부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정이 가고 자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집니다.” - 사진전 리플릿의 ‘초대문’ 일부


 

나정에서 600m 가량 더 가면 남간사터 당간지주에 닿는다. ‘남간사터’라고 말하는 것은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는 뜻이니 힘들여 현장을 찾아간 이로서는 어쩌면 허망한 노릇이다. 하지만 절은 없어도 남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남산에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당간지주이고, 국가가 지정한 나라의 보물이며, 아득한 옛날 일념이라는 스님이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쓴 사찰의 터라 하니 이곳을 찾은 발길이 마냥 허허롭지만은 않다.


남산은 4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이다. 두 봉우리가 하나같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니 남산은 정상이 남쪽으로 치우친 직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남산은 동서로도 기울어진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쪽 비탈은 경사가 가파르고 짧은 반면 서쪽 비탈은 완만하고 길다. 그러므로 남산을 덮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와 사적들이 서쪽 비탈에 주로 분포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삼릉과 경애왕릉 사이의 계곡을 지나 금오봉 정상으로 오르는 계곡을 흔히 삼릉 계곡이라 한다. 이 계곡을 오르면 마애관음보살, 목 없는 석불좌상, 마애선각 육존불상, 석불좌상, 선각여래 좌상, 마애석가여래 대불좌상 등을 만나게 된다. 금오산에서 경주교도소 자리로 내려가는 골짜기에서는 약수골 마야여래대불도 만난다.


봉우리의 이름이 금오봉이니 저절로 김시습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만복사저포기' 등이 실린 소설집 <금오신화>를 쓴 바로 그 김시습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스스로 머리를 깎은 뒤 전국을 유랑하던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으로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31세 때이다. 그 후 김시습은 37세 때까지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창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설은 길어서 인용할 수 없고 그 대신 김시습의 시 '용장사'를 한 번 읊어본다.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 없네

보슬비에 대나무는 여울가에 움돋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희롱하는데

작은 창가에서 사슴과 함께 잠이 드네

의자에는 먼지가 재처럼 깔렸지만

깨어날 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제 186호)은 용장골 어디에서나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김시습은 이 탑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지었을 것이다.

 


용장사터에서 남산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면 저 유명한 서출지(사적 제 138호)가 나온다. 서출지라면 소지왕 때 못 안에서 노인이 나타나 서책을 전하면서 궁녀와 중이 왕을 해하려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렸다는 전설이 깃든 못이다. 왕은 노인의 말에 따라 궁녀와 중을 잡아 사형에 처했으니, 이 전설은 곧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 이미 불교가 왕궁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음을 말해주기도 하고, 또는 불교가 기존 세력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경주 남산 사진전'을 연 한빛창작회는 1993년 창립된 사진 동호회이다. 그동안 해마다 사진전을 열어 올해로 벌써 13회 작품전을 개최했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조석호 총무는 “김재성 회장은 산업용 필터제조업, 신종범 부회장은 기계제작업, 김태룡 이귀옥 부부회원은 교직에서 퇴임하였고, 안재운 회원은 경찰관, 나머지 회원들도 주부,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대구예술대 홍상탁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동호인회이기 때문에 가입의 문호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초보자에게는 교육도 시켜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원작'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은 모두 한빛창작회의 '경주 남산 사진전'에 전시된 작품을 정만진이 재촬영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작에 비해 그 이미지가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둡니다.


태그:#남산, #한빛창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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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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