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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부산공장)에서 일했던 엄아무개씨가 지난 2월부터 10월까지 9개월간 메모한 기록.
 삼성SDI(부산공장)에서 일했던 엄아무개씨가 지난 2월부터 10월까지 9개월간 메모한 기록.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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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 부산공장에서 일해온 엄아무개씨는 지난 11월 2일 떨리는 손으로 사직서를 썼다. 다섯 달만 더 있으면 '장기근속 30년'을 채울 수 있었지만, 회사측은 '손수레 사건'을 빌미로 그를 결국 '아웃'시켜 버렸단다.

'손수레 사건'이란 엄씨가 회사의 폐자재를 이용해 손수레 모형을 만들자 회사가 '회사 물품 반출'이라며 그를 징계위위원회에 회부한 일을 말한다. 하지만 그는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회사측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 제출은 엄씨에게 '해고'라는 불명예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반면 회사측은 명예퇴직을 거부하던 중간간부 한 명을 '구조조정'하는 성과를 올린 셈이 됐다.

"회사 오래 다녔으니 정리해라"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엄씨의 메모록에 깨알같이 적힌 충격적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를 명예퇴직시키기 위한 삼성SDI측의 '작업'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메모록은 올 2월 엄씨가 명예퇴직자로 선정된 때부터 10월 '손수레사건'으로 해고 위협을 받던 때까지 일어난 일을 꼼꼼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면담한 간부 이름과 날짜, 시간, 주요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심지어 회사측에서 보내온 문자메시지까지도 기록돼 있다.

이는 그동안 삼성SDI측은 "전환배치만 있을 뿐 명예퇴직 등 인적 구조조정은 없다"고 공언해왔지만, '엄 과장의 메모록'은 이와 배치되고, 소위 '삼성식 구조조정'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엄씨는 지난 2월 13일 자신의 상관인 김아무개 제조그룹장으로부터 명예퇴직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그는 제조그룹의 파트장(과장)을 맡고 있었다.  

"구조조정 기준이 고과다. 엄 과장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당시 엄씨를 비롯해 30여명의 중간간부들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엄씨가 명예퇴직을 거부하자 그로부터 며칠 뒤 자신을 명예퇴직자로 통보했던 그룹장과 팀장으로부터 각각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정리하고 가라. 회사 오래 다니지 않았느냐."(김아무개 그룹장)
"회사가 고심해서 결정한 사항인데 바뀔 것 같나?"(이아무개 팀장)

엄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첫 직장인 삼성SDI 부산공장에 들어와 29년간 생산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일을 맡아왔다. 그는 명예퇴직을 통보받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토로했다.

"그때가 설 직전이었다. '설날 집에 가서 상의한 뒤 사퇴해라'고 하더라.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두 가지 이유를 댔다. 회사에 오래 다녔다는 것과 인사고과가 안 좋다는 것이었다. 오래 근무한 거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인사고과건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데리고 있던 직원들의 인사고과는 좋은데 그들을 통솔한 파트장의 인사고과가 안 좋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한마디로 해고시키려고 인사고과를 안 좋게 준 것이다."
 
'엄 과장 메모록' 중 일부. "엄 과장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2월) "편한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가"(10월) 등의 메모를 통해 회사측이 그에게 '명예퇴직'을 압박했음을 알 수 있다.
 '엄 과장 메모록' 중 일부. "엄 과장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2월) "편한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가"(10월) 등의 메모를 통해 회사측이 그에게 '명예퇴직'을 압박했음을 알 수 있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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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원하냐"에서 "모임에 참석하지 마라"까지

회사측은 수차례의 면담을 진행하며 엄씨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는 명예퇴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청춘을 바쳐 30년 가까이 근무한 직장이어서 그랬고, 아직도 뒷바라지해줘야 할 자식들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내가 입사할 때 삼성은 '인재제일, 평생직장'을 얘기했다. 나도 이곳이 첫 직장이었고, 다른 곳에 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애들 대학공부 할 때까지 다녀야 하는데 갑자기 해고를 통보해 황당했다."

하지만 회사측은 엄씨의 '진짜 마음'은 외면한 채 '명예퇴직금을 더 달라고 버티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4월 17일자 메모록에 적힌 정아무개 인사그룹장의 발언에서도 드러나 있다. 

"원하는 게 뭐냐. 얼마를 원하냐. 1.5억 주면 내가 (나)가겠다."

엄씨는 이 발언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당시 돈을 얼마 주겠다는 등의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인사그룹장이 '얼마 주면 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네 그렇게 돈 많으냐, 그렇다면 3억원 달라'고 얘기했더니 그룹장이 그렇게 대꾸한 것이다. 당시 나는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 직장을 더 다니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당시 회사측에서 제시한 '명예퇴직금'의 경우, 차장급은 1억500만원, 과장급은 9500만원, 대리급은 8500만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씨는 끝까지 명예퇴직을 거부한 데 이어 구조조정 대상으로 찍힌 중간간부들이 만든 '부산스카이' 모임에도 참여했다. 엄씨는 이 때부터 회사측이 '협박'과 '회유'의 양면작전을 구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극단으로 가지 말고 절충점을 찾자."(날짜 미상)
"끝까지 해볼 셈이냐. 이 정도에서 정리하자."(날짜 미상)
"일자리 찾고 있소? 일 줄 테니 일하면서 천천히 일 찾아봐라."(4월 17일)


'부산스카이'와 함께 삼성SDI 천안공장 중간간부들을 중심으로 '삼성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사람들의 모임'(삼역모)이 결성되자 회사측의 긴장도는 더욱 높아졌다. 엄씨도 회사측으로부터 "모임에 참석하지 마라"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 들어야 했다.

"브라운관 모임('부산스카이'를 가리킴-편집자주)에 가지 마소."(4월 10일)
"좁혀 봅시다. 모임 참석하지 마라."(4월 18일)
"모임 왜 하냐? 싱글에 불필요한 글 쓰지 마라. 구두경고다."(7월 26일)
"모임에 가는 걸로 아는데 안 갔으면 한다."(8월 30일)


삼성SDI의 부산공장.
 삼성SDI의 부산공장.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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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2일째 대기중"... "해고되고 싶으냐? 맘대로 해라" 

그런데 '무노조 삼성'이 '구두경고'에만 만족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삼성SDI측은 먼저 '붙들기작전'을 구사했다. 식사 등을 미끼로 엄씨를 만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도록 조치한 것.

"저녁 한끼 먹자."(8월 23일)
"저녁 같이 하자. 모임 가지 마라."(10월 12일)


또한 회사측은 '감시작전'을 병행했다.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전국금속노조에서 마련한 '삼성·포스코 노조 설립을 위한 설명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에 전아무개 노무과장과 우아무개씨(노사협의회 사원대표)가 이틀 동안 엄씨의 집 앞에서 죽치고 있기도 했다.

"집 앞에 차량에서 감시. 2名 ."(10월 13일 새벽 6시 30분)
"집 앞에서 2일째 대기중이다. 전화해주라."(10월 13일, 문자메시지)


전아무개 노무과장은 노기어린 어조로 "저도 집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어린 자식이 있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까지 보내며 엄씨를 압박했다. 그는 이틀 뒤 "주말에 어디에 갔었나, 집에도 못가고 과장님 집 앞에서 대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와중에 앞서 언급했던 '손수레사건'(10월 22일)이 터졌다. 엄씨를 내쫓을 거리를 찾고 있던 회사측은 이 사건을 빌미로 명예퇴직을 압박했다고 한다. 당시 메모록에 기록된 정아무개 인사그룹장의 발언이다.

"회사 물품 반출은 장갑 한 켤레, 하이타이 한봉지도 해고 사유다. 자진해서 사표 쓰면 희망퇴직금이라도 받게 공장장께 건의할 것이고 징계위에 가면 한푼도 없다. 큰 돈이니까 판단 잘 해라."(10월 23일)

"생각해봤느냐? 해고 되고 싶으냐? 맘대로 해라. 규정대로 하겠다."(10월 25일)

엄씨의 상사였던 김아무개 그룹장은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나흘 전(10월 29일) "편한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가"라며 "마음을 바꾸면 내가 건의해서 금전적 해결을 하겠다"고 '명예퇴직'을 권유했다.

결국 엄씨는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1월 5일 29년간 근무했던 일터를 떠났다. 그리고 9개월간에 걸친 그의 '명예퇴직 거부'도 끝이 났다.

"내 동기들은 10년 전(IMF 때)에 집에 갔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쫓겨 나니 섭섭하다. 가족들은 거의 30년 근무했으니 이제는 쉬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쉴 상황이 아니다. 당분간 정리 좀 하고 일자리를 구하려 다녀야 하지 않겠나?"

한편 삼성SDI부산공장 측은 여전히 "전환배치만 있을 뿐 명예퇴직 등 인적 구조조정은 없다"고 밝혔다. 엄 과장 문제 역시 개인적으로 사직서를 쓰고 나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성SDI 천안공장 중간간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삼역모. '부산스카이'도 삼역모와 마찬가지로 구조조정 대상으로 찍힌 과장급 중간간부들의 모임이다.
 삼성SDI 천안공장 중간간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삼역모. '부산스카이'도 삼역모와 마찬가지로 구조조정 대상으로 찍힌 과장급 중간간부들의 모임이다.
ⓒ 삼역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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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삼성SDI, #엄 과장 메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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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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