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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남, 박수근, 박인숙.
 박성남, 박수근, 박인숙.
ⓒ 박성남씨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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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억2천만 원에 팔려 한국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 작품 '빨래터'.
 42억2천만 원에 팔려 한국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 작품 '빨래터'.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 박수근 화백(1914~1965)의 손자 박진흥(35)은 호주에서 촉망받는 화가다. 아버지 박성남 화백(60)과 함께 '화가 3대'로 살아가는 그를 인터뷰했다.

최근 '박수근·이중섭 가짜그림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구속되고, 삼성그룹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으로 고가 미술품을 구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 등을 지켜보는 박수근 화백 손자의 심정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박진흥은 "정작 할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시고 51세에 돌아가셨다"면서 "아버지와 나도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 호주에서 쇼핑센터 청소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한평생 '인간의 선함과 정직함'을 주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던 박수근의 작품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최근 그의 작품 '빨래터'가 옥션경매장에서 42억2000만원에 팔려 한국 최고판매가 기록을 갱신했다.

Such is life... 인생은 다 그런 것!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호주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Such is life(인생은 다 그런 것)"라고 시큰둥하게 말한다. 호주의 임꺽정 같은 의적 네드 켈리가 교수형 직전에 남긴 말인데, 그의 짧은 일생을 그린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박수근은 한국전쟁의 혼란과 극심한 가난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에는 하다못해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맨땅에 마주 앉아있는 노인들, 흰옷 입은 아낙들, 아기를 업은 야윈 소녀들, 여덟 식구의 저녁거리인 보리쌀 서너 됫박과 푸성귀가 담긴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종종걸음으로 귀가하는 어머니…. 한 마디로 박수근의 그림은 한국의 가장 아픈 시절을 그려낸 '시대의 초상화'다.

한 평생 서양화 유화작품을 그린 그가 담배파이프를 문 중년신사나 여인의 누드를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은 것은 아주 특별한 사례다.

그런데도 박수근이 그렸다는 가짜 그림이 등장하고, 그의 작품은 재테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종종 증여세와 상속세 포탈을 목적으로 불법 비자금이 동원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정령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일까?

박완서가 소설로 쓴 박수근의 삶

창신동 시절 거실에서 박수근 부부와 큰딸 인숙.
 창신동 시절 거실에서 박수근 부부와 큰딸 인숙.
ⓒ 박성남씨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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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부부. 성남, 인숙과 함께.
 박수근 부부. 성남, 인숙과 함께.
ⓒ 박성남씨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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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소설가 박완서의 데뷔작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 '나목'. 한국전쟁 통에 미군 PX에서 만난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한 옥희도라는 화가가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2005년 6월 시드니를 방문했던 박완서는 "내 소설 '나목'은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옥희도라는 가난한 화가의 작품으로 화상들만 돈을 버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소설"이라면서 "옥희도의 실제 인물은 박수근"이라고 말했다.

박완서는 시드니에서 만난 박성남한테 가짜그림 사건을 전해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아직도 소설 '나목'의 상황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한동안 박완서의 말을 듣고 있던 박성남은 "여름철에는 런닝셔츠와 흰 고무신 차림으로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였다"고 회상하면서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그림 값이 '억, 억' 하는 화가로 대접을 받으니 가끔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전쟁의 혼란과 극심한 가난에도 굴하지 않고 인간의 선함과 정직함을 그렸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림가격의 거품이 빠졌으면 좋겠다"면서 "아버지는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지 않았던가?"라고 반문했다.

시드니를 방문한 박완서씨가 박성남씨와 가짜그림 사건을 우려하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
 시드니를 방문한 박완서씨가 박성남씨와 가짜그림 사건을 우려하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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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유족은 그의 그림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못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림가격이 쌀 때 다 팔았기 때문이다. 호당 5000원 정도였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등록금을 낸 것. 그런 연유로 박성남이 가끔 아버지의 그림 값에 대해 거품이 끼었다고 말하면 공연한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박성남은 오히려 "아버지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건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다, 그렇게 큰 재산이 있었다면 형제간의 우애도 지금처럼 원만치 않았을 것이고 무척 게으르게 살았을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가난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도 가난하지 않았다면 서민의 모습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후손들에게 갑자기 혼란스런 일이 벌어졌다. 난 데 없이 박수근의 그림 1760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을 현재 거래되는 가격으로 대충 계산해도 2000억원이 넘는다. 그런데 그게 모두 가짜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장남 박성남이 후손을 대표하여 소송을 걸었다. 당연히 그 그림을 소장한 김용수도 맞고소로 대응해왔다. 그러나 검찰은 10월 23일, 박수근의 그림이 모두 가짜로 판명됐다고 발표했다. 기자는 검찰발표 다음날 재판 때문에 서울에 머물던 박성남에게 전화를 걸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2년 간 이어진 가짜그림 소송... "한국미술계에 섭섭"

박수근 화백이 그린 장남 박성남(1952년 5살 때).
 박수근 화백이 그린 장남 박성남(1952년 5살 때).
ⓒ 박성남씨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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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남은 "빤한 가짜 그림을 가짜로 밝히는 데 무려 2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가난하게 살다간 예술가의 영혼을 훔치는 파렴치한 행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 미술계에서 근절되어야 한다"면서 "나는 진작부터 이런 결론을 예상했기 때문에 별다른 감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다만 사태가 이 지경으로까지 오도록 방치한 한국미술계에 섭섭할 따름이다, 더욱이 허술한 사기꾼의 범죄행위를 도와주고 비호한 한국미술계의 내로라하는 명망가들과 언론 등의 도덕불감증에 비애를 느낀다"고 토로했다.

20여 년 동안 호주에 은둔하면서 창작활동만 해온 박성남 화백은 작년부터 한국을 오가면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문득 그의 강한 발언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데 장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려를 표명했더니 예상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예술가의 영혼은 새처럼, 공기처럼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그림 못 그린다, 그래서 예술가의 가난을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업으로 어린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손자 박진흥도 할아버지가 물려준 가난을 탓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그는 "그동안 고생스럽게 미술공부를 하면서 가난을 물려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난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유산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박진흥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엄정하게 가동되는 호주에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둔 가장으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다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는 새벽 5시부터 오전 8시까지 쇼핑센터 청소를 하고, 낮엔 미술과외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다. 그래도 돈은 모자랐다. 대학원 논문을 쓸 때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 한 번 도서관에 갈 때마다 30권씩 책을 빌려왔다. 때로는 화가가 된 것을 후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밀레의 그림책에서 '만종'을 보게 됐다. 그림 속에서는 작은 수확에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만종'은 그보다 더 가난했던 할아버지의 인생을 바꾼 작품이었다. 문득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후로 그는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박진흥의 최근 작품. 험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화가 3대'의 불굴의 정신을 형상화한 건 아닐까?
 박진흥의 최근 작품. 험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화가 3대'의 불굴의 정신을 형상화한 건 아닐까?
ⓒ 박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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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은 작품의 가격을 안다, 거품 끼지 않도록 절제해야"

한편 가짜 그림 사건의 주범이 구속됐다는 소식을 접한 박진흥은 "이런 일이 아버지 대에서 마무리되어 천만다행이다, 할아버지의 창작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아버지도 저렇게 고생하시는데 내가 나섰다면 대응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박진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할아버지 가짜그림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가짜그림 사건의 주체는 김용수씨다. 그러나 일부 미술계 인사들이 그의 불순한 의도에 가세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곪아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일부 언론이 김씨가 원하는 대로 기사를 쓴 것도 씁쓸한 대목이다. 그게 더 실망스럽다."

- 왜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나?
"가짜그림 사건은 문화를 사랑하기보다는 문화를 이용해서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 사람들이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위력을 발휘하면 순수해야할 미술계가 혼란스러워진다. 예술이 순수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 그러나 화가들은 자기 작품의 가격이 오르면 좋지 않은가?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리는 화가라면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가격까지 올라가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화가들에겐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가격이 있다. 거기에 거품이 끼지 않도록 절제해야 투기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 할아버지 그림가격이 계속해서 한국 최고기록을 갱신하고 있는데.
"할아버지의 그림가격이 폭등하면서 기록을 갱신하는 것이 솔직히 싫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예술적 가치가 아니고 골동품적인 가치나 희귀성 때문이라면 의미가 없다."

- 어떤 사람들이 할아버지 작품을 소장했으면 좋겠는가?
"할아버지 그림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림가격만 듣고 좋은 그림으로 오판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단지 비싸기 때문에 그림을 산다. 반대로 할아버지가 누군지 전혀 몰라도 그림 자체가 좋아서 그림을 구입한 사람이라면 소장가로서 자격이 있다."

박성남 그림 '층, 바람 부는 날.'
 박성남 그림 '층, 바람 부는 날.'
ⓒ 박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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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재산'으로 행복하다? 그림 소장할 자격이 없다"

- 최근 삼성그룹이 불법비자금을 조성해서 크리스티경매, 소더비경매 등에서 100억원대의 그림들을 구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울해진다. 마치 땅이나 주식을 사는 것처럼 미술품 구입을 일종의 재테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림을 소장하면서 예술작품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행복해야지, 그림재산을 갖고 있어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건 예술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그림을 소장할 자격이 없다."

- 그렇게 주장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런 사람의 수중으로 그림이 들어가면 십중팔구 일반대중은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런 사람일수록 예술작품이 공공문화자산이 아니라 사유물이라고 믿기 때문에 금고 속에 처박아두기 일쑤다. 게다가 미술작품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최악의 케이스다."

- 최근 한국에서 '미술시장이 대기업 비자금의 은닉처'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한국신기록인 42억2000만원에 팔렸다는 할아버지의 작품 '빨래터'도 누가 팔았는지, 누가 샀는지조차 모른다. 미술품 거래에 비밀의 관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핑계로 비자금이 활개를 쳤을 가능성도 있다."

- 그래도 부자들이 그림을 구입해야 화가들의 생계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소위 큰손들은 생계문제를 고민하는 화가의 작품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해악일 따름이다. 예술가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돈에 절하면(拜金) 안 된다."

박수근 집안의 꼿꼿한 정신

기자는 시드니에서 박성남·박진흥 부자를 만날 때마다 '혈통' 혹은 '혈맥'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의 구체적인 실체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도 땅속 깊은 지하수처럼 면면히 흐르는 꼿꼿한 정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법적인 비자금으로 그림을 구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그 그림을 이용해서 상속세와 증여세를 포탈하는 일부 몰지각한 부자들 때문에 우울한 시기다. 박진흥의 말대로, 불법 재산증식을 위해서 그림을 사는 행태야말로 천민자본주의의 벌거벗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정신을 삼켜버린 시대에, 가난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평생 묵묵하게 그림을 그리는 박수근 '화가 3대'의 꼿꼿한 정신에 공손히 절하고 싶은 건 왜일까?

시드니에 거주하는 박성남과 장남, 차남 가족과 함께.
 시드니에 거주하는 박성남과 장남, 차남 가족과 함께.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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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청소일 하며 그림 공부한 박진흥

박진흥에겐 3대째 화가의 길을 걷는 것 말고도 아주 독특한 이력이 있다. 서울예고 재학 중에 인도로 유학하여 델리미술대학교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고 호주의 웨스턴시드니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는 경쟁률이 높은 델리미술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인도문화부장관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호주로 와서는 학비를 벌기 위해 새벽청소와 어린이 미술과외를 하면서 미술대학원을 졸업한 입지전적인 화가다.

박진흥은 대학원을 졸업한 다음해인 2001년, 블랙타운미술대전에서 9·11테러를 소재로 그린 '회색도시 뉴욕(Grey City NY)'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는 대학원 3학년 때 구축한 자신의 작품세계를 심화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2008년에 열릴 예정인 개인전 출품작을 구상하고 있는 그는 "나는 그동안 작품 속에 무의식의 세계를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앞으로는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조화롭게 표현하고 싶다, 두 가지를 대비시키면 주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드니 화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앉은 박진흥.
 시드니 화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앉은 박진흥.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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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수근, #삼성비자금, #가짜그림, #박성남, #박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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