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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도 달라졌겠지...

 

해남에서 손꼽히는 절은 대흥사. 규모로 보나 경치로 보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유명 사찰 중 하나다. 난 이번이 세 번째. 한 번은 관광버스도 마다하고 마을이 시작되는 곳까지 걸어 내려온 적도 있었다.

 

억새와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이 절경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그저 스치듯 눈길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서둘러 내려왔고 혼자 걷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나를 보고 덩달아 걷겠다는 이들이 나왔고, 그들 역시 즐겁게 내 뒤를 따라 걸어 내려왔다.

 

달라졌겠지. 한편으로 체념을 하면서도 기대는 여전. 그때의 풍광이 내 뇌리에 각인돼 있었으니 어찌 기대가 없었으랴.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남아 나는 게 없었다. 단풍은 고왔지만 예전의 정취는 온데간데 없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조차 욕심이겠지…. 스스로 마음을 달래면서 경내로 들어섰다.

 

작은 연못을 바라보고 사진 좀 찍어달라는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두륜산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길동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서두르기 시작한다. 대웅전은 왼쪽 언덕 아래에 있다. 위에서 보자니 두륜산을 배경으로 한 대웅전 풍경이 근사하다.

 

위에서 찍고, 내려가서 찍고. 난 본래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은 이렇게 찍사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그저 카메라도 없이 배낭 메고 혼자 달랑달랑 가볍게 다니는 것인데. 그러다 좋은 곳이 있으면 앉아서 쉬고,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고. 이렇게 발 닿는 대로 다니면서 즐겼는데, 10년 전 경치가 변했듯 나도 한참 변질되었다.

 

대웅전을 찍고 올라오니, 내 길동무,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간다. 나보다 발빠르게 움직이더니 차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난 미련이 남았다. 대흥사가 얼마나 큰데 그렇게 쉽게 떠나나. 기다려 줄 때까지 혼자서라도 더 돌아봐야지. 다시 천불전도 들어가 보고, 그 옆에 전통차 집도 기웃거려 보는데 아차, 잊은 게 있었다. 일지암이다. 아니 내가 거길 잊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즉시 전화를 한다.

 

"일지암을 가야 하니, 다시 올라오십시오."
"일지암! 얼마나 걸리는데?"
"얼마가 걸리든 일지암을 안 가면 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어서 올라 오세요."
"얼마나 걸리는지 좀 알아봐요. 뭣 하면 봄에 다시 와서 보자구요."
"알아볼 것도 없고 한 30-40분 정도 걸리는데, 차를 타고 이미 떠났어도 나는 다시 돌아와 봐야 할만큼 중요한 곳이니까, 아예 차를 갖고 올라오세요. 이 앞에 차 댈 자리도 있으니까."

 

내 뜻이 완강하니 잠시 후 차가 우물쭈물 올라온다. 차를 절집 앞에까지 갖다대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일이지만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같이 왔으니 같이 다녀가야 한다. 그 새에 전통차 집에 가 정확하게 물어보니 올라가는 데 40분 내려오는 데 20분이란다.

 

초당(草堂)에는 지금도
초의선사 그림자가 서성이는지
알싸한 풀냄새가 볼을 후린다

 

소치(小痴)도 여기서는
시퍼런 풀냄새를 벼루에 갈아
푸른 물 붓에 찍어 난을 쳤으리

 

풀냄새 몇 방울 찻사발에 남겼다가
나그네 찾아오면 잔을 들어 권했으리

 

마음 가득 평화가 몰려오던 곳, 일지암 

 

일지암에 대한 내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아주는 '장인성' 시인의 '두륜산 일지암'이라는 시다. 일지암(一枝庵)은 시(詩), 서(書), 화(畵), 다(茶)에 대한 예도(藝道)가 신선의 경지라 하여 초의사풍(草衣四風)이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고고했던 초의선사가 일생을 보낸 초당암자다. 현재의 초당은 초의 선사 사후 폐허가 된 터를 찾아내 1979년 복원한 것이다.

 

내 머릿속 일지암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앞을 보니 마음 가득 평화가 몰려오는 느낌이었고 그 느낌은 아직도 삼삼하게 남아 있다. '산중 암자, 초가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냐' 하고 그 어른 초의선사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충만감이 내게도 몰려왔던 것이다.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르자니 숨이 턱에 차지만 가끔씩 고개 내밀고 기다리는 단풍잎들의 환호에 기분은 만땅.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던 아주머니가 카메라만 든 우리에게 물을 건넨다. 날씨가 선선해도 물은 필요한 법이라며. 우리가 무척 힘들어 보였나 보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고마웠다. 산에 오면 이렇게 사람도 산과 같아져 저절로 인심이 우러나온다.

 

30분쯤 가니 일지암 삼거리가 나온다. 산중에도 삼거리가 있다니, 길 주인의 친절함에 감동과 신기함을 동시에 느끼며 조금 더 올라가자 좁은 길이 나온다. 그런데 공사판이 보인다. 아니 산중에서 무슨 공사를 하나. 난 걸음을 재촉해가며 무슨 일인가 살핀다. 공사중이다. 그새 못보던 건물(대웅전)이 들어서 있었고 또 공사를 하고 있다.

 

새로 짓는 건물은 아주 우람하다. 차 체험장이란다. 일지암인지 대흥사인지, 어디서 주체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공사를 하고 있다. 이런 건물은 도대체 어디서 허가를 내주는 걸까?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 밑, 대흥사쪽 어디라면 또 모르겠는데 여긴 산 중턱인데 어떻게 이런 데에다 이 큰 건물을 짓는지 식견이 부족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연인의 터에
스님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 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일지암을 짓고 초의선사가 지은 시이다. 산중에 몇 칸 집 짓고 충만한 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시를 떠올리자니 울화가 치민다. 어느 절은 사람떼가 무섭다며 경계하기도 한다는데 여기 일지암은 사람을 떼로 불러들이려는 것일까?

 

그저 한마음이면 모든 것 이룰 수 있을텐데...

 

초의선사는 39세(1824) 되던 해 이 집을 지었고, 81세에 입적하기까지 40년 동안 은거하면서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하면서 차문화를 부흥시켰고, 선의 논지도 바로 세웠다. 일지(一枝)란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에만 의지해 있어도 편하다는 한산시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저 한마음이면 모든 것을 이룰 수도 있을 텐데, 조금씩 조금씩 산을 깎아 집을 지으면서 욕심을 채우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다. 동갑내기 친구인 추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다산 선생님과도 교류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소치 허련 선생이다. 허련은 추사의 제자였다. 추사는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주었으며 나아가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면서 후에 그가 우리나라 남종화의 선구자로 우뚝서기까지 도와주었다. 초의선사는 50세에 허련을 만났는데 허련은 초의선사가 추사 선생님과 만나도록 다리를 놓아 주는 등 모든 역할을 도맡아했다.

 

초의 선사의 본명은 장의순, 15세에 출가해 초의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가 81세에 입적하기까지 네 평 띠집을 지어 40평생을 주적한 곳이 이곳 일지암이다. 일지암은 차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상징을 따라 부흥하는 게 큰 집을 지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는 것이었는지, 그것이 진정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었는지. 내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물거품이 된 기대를 가슴에 안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덧붙이는 글 | 대흥사에는 11월 10일 다녀왔습니다.


태그:#해남,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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