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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델발트행 WAB 열차 창 밖으로 예쁜 제라늄 꽃으로 장식된 스위스의 전통가옥, 샬레(chalet)가 지나간다. 예쁜 풍경을 일컬어 스위스 알프스의 달력 같은 풍경이라고 하는데, 나는 마치 그 달력 속의 기차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 속에 있었다.

 

열차 창 밖, 만년 설산 아래 산기슭에는 녹색 융단 같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노란 야생화가 만발해 있었다. 저 야생화는 녹색 초원 위에 노란색이 예뻐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이 알프스 자락에서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냈다.

 

그린델발트로 향하던 나의 가족은 그린델발트 바로 북쪽에 위치한 그룬드(Grund)에서 잘못 내렸다. 역 이름이 그린델발트 그룬드(Grindelwald Grund) 역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해서, 역에 내려 지나가던 한국 여대생에게 길을 물었다.

 

“여기가 그린델발트 맞나요?”

“예! 여기가 그린델발트예요”

 

역 밖으로 잠시 나갔지만, 내가 여행정보에서 보았던 그린델발트보다 규모가 작고 역사도 사진 속 역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룬드는 그린델발트 지역에 속하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아까 그 여대생은 그룬드도 그린델발트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이곳이 그린델발트라고 한 모양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했고, 다시 가족을 서둘러 열차에 태웠다. 그룬드 역에서 불과 3분 정도 열차를 더 타고 가자 그린델발트 역이 나왔다.

 

 

그린델발트 역은 열차 플랫폼이 2개밖에 없는 아기자기한 기차역이었다. 기차역 철로 바로 앞에 도시의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린델발트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하루 동안 그린델발트를 둘러보거나, 피르스트(First)까지 곤돌라를 타고 가서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위스 융프라우(Jungfrau)의 장관을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이 그린델발트에 잠깐 내리는 사람들이 많다.

 

해발 1034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그린델발트는 원래 마을 앞까지 빙하가 흘러서 빙하 마을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산 위쪽으로 많이 후퇴하였지만, 아직도 그린델발트 주변의 신비한 오버러 글레처(Oberer Gletscher)에서는 수십 년 전에 내린 눈이 쌓여서 만들어진 푸른 빛의 빙하를 만져볼 수 있다.

 

 

나는 그린델발트에서 반나절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노천카페의 커피를 즐기는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노천카페에 가만히 앉아 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알프스 산속 마을의 아름다움을 깊게 느낀 아내는 그린델발트 역 앞으로 이어지는 그린델발트 중심가를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린델발트에 하나뿐인 큰길가를 걸으면서, 나의 눈앞을 정면으로 막아선 3970m 높이의 아이거(Eiger) 산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거를 보면서 엄숙하고 성스러움마저 느꼈다. 이 아이거의 빙벽은 유럽의 등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등반가들의 무수한 도전을 받아들였던 곳이 아니었던가? 그린델발트가 아이거 등반의 거점이 된 이유는 역에 내리면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거는 그린델발트 바로 앞에서 그린델발트를 내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알프스 최고의 관광지답게 큰길가에는 예쁜 노천카페, 치즈를 녹여 빵에 찍어먹는 퐁듀(fondue) 식당, 그리고 전통의 기념품 가게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노천카페들은 좌석에서 아이거가 보이거나 멀리 산기슭에 점점이 박혀 있는 민가들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에 들어서 있었다. 노천카페에서는 한낮의 햇빛과 바람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맥주와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아내를 즐겁게 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이 그린델발트의 작은 거리에는 그린델발트에만 있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독특한 디자인과 색상의 실용품과 함께 알프스의 풍취가 느껴지는 기념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직접 디자인한 컬러풀한 옷과 우산, 나무를 직접 깎아 만든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딸아이의 관심은 이 나무 인형에 집중되었다. 상체만 만들어져 있는 나무인형들은 몸 하체의 나무기둥이 큰 나무통에 박혀 있었다. 사람 손만한 이 나무인형들은 딸아이가 인형 뒤의 조정 막대를 움직이면 돋보기를 아래로 기울이며 책을 읽기도 하고, 술병을 입으로 당겨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건 스위스 인형이 조정막대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연신 술을 마셔 대는 것을 보면서, 딸은 계속 키득거렸다. 신영이는 여행하는 나라들의 국기 모으는 것이 취미인데, 아쉽게도 딸이 찾는 큰 스위스 국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는 호텔 사이에 자리한 가게 몇 곳을 열심히 다니더니 스위스 모자 2개, 붉은색 헤어밴드, 필통같이 생긴 우산, 작은 가방을 샀다. 모두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예쁜 제품들이었다. 쇼핑에 별로 소질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새로운 디자인과 색상이 눈길을 확 끌었다. 게다가 이 그린델발트의 가게 중에는 한국인들을 겨냥해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점원들을 배치한 가게도 있었다.

 

우리는 가게에서 나와 거리를 산책했다. 거리에는 그린델발트의 명물인 샬레 스타일의 호텔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의 호텔들은 삭막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사각형 건물이 아니었다. 스위스 산간의 오두막 형태로 지어진 샬레 호텔은 온통 화려한 제라늄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리를 산책하다 보니 말로만 듣던 글레처 가르텐(Gletscher Garten)이 눈에 들어왔다. 1899년에 문을 연 호텔이니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린델발트의 여행자들을 받아들인 호텔이다. 4대째 운영되고 있는 이 호텔은 1층 식당의 주방장과 그 위층의 호텔 관리자가 모두 한 가족이다. 가족이 운영하는 호텔이니 호텔 내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스할 것이다. 전통의 호텔이 역사가 되는 곳을 여기에서 다시 발견했다.

 

상가와 호텔이 밀집된 거리를 벗어나니 알프스의 전형적인 초원이 웅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융단 같은 초원과 산자락에 펼쳐진 전원마을에는 순박한 목조 샬레가 점점이 박혀 있고, 집집마다 베란다 창문에는 빨간 제라늄 꽃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자연 속에 만들어놓은 인공의 집들이 자연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림 같다거나 엽서사진 같다고 상투적으로 표현하는데, 그린델발트의 집들은 정말 그림 같고 엽서사진 같았다.

 

 

우리는 마을을 한가로이 돌아다니며 소풍을 나온 듯이 즐겁게 여기저기 산책을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초원 위에 벌러덩 누웠다. 우리는 초원에 누워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워서 본 알프스의 하늘에 베터호른(Wetterhorn, 3701m)과 슈렉크호른(Schreckhorn, 4078m), 아이거의 거대한 깎아지른 고봉들이 박력 넘치게 막아서고 있었다. 웅장한 거봉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시야를 차지하고 있었고,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걸렸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산 위로 계속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오솔길 옆으로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 곁을 스치며 파란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이 여유로운 여행객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보냈다. 이런 자연 속에서 만나는 인간들은 서로에게 너무 호의적으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햇살 아래,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맑은 냉기가 섞여 있었다. 이 시원한 냉기 속에는 알프스 빙하의 얼음을 품고 불어오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이 맑은 바람을 담아보았다. 나는 가족과 앉아,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을 즐겨보았다. 나는 아이거에 쌓인 눈과 초록색 평원을 보면서 나른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저 느리게 흐르는 빙하마냥 시간도 느리게 흘렀으면 하고 빌어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그린델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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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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