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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도시 충주에 가다

 

충주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중심으로 통하였다. 역사적으로도 길목의 중심지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러한 역사는 고구려시대까지 올라간다. 신라의 5소경 중 하나도 충주에 있었으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호족 중 중심이 또한 충주였다. 이처럼 충주는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대에 서 있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중원이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중심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남한강이 흐르고 낙동강과 가까우며, 죽령을 지난다는 여러 지리적 이점은 역사에서도 크게 중시되었다. 그렇기에 그에 걸맞은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한 충청도라는 말 자체가 본디 충주와 청주를 합쳐서 만들어 진 것이기에,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충주가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과거 충주의 영광은 대단하였지만, 철도를 놓은 이후부터는 이 또한 쇠락하게 된다. 경부선을 놓을 때 충주는 거리가 멀어, 도청이 청주로 이전하게 되고, 이후부턴 교통의 중심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강과 고개가 더 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고속도로도 이곳을 비켜나가면서 지금은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로서 남게 되었다.

 

 

충주의 새벽은 안개로 가득하다. 남한강이 흐르고 있고 이를 막아 충주호와 탄금호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새벽안개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번에 충주에 들러 중원고구려비에서 시작하여 탄금대까지 걸어가면서 그 사이에 있는 여러 문화재들을 보고 오는 것으로 답사코스를 정했다. 여기에서 장미산성과 누암리고분군은 시간과 코스 관계상 제외하게 되어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다.

 

충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금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새벽안개를 깨치며 길을 나섰다. 새벽의 상쾌함과 신비를 머금고 있는 안개는 어떠한 풍광을 펼쳐줄까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게 하였다. 안개 낀 날은 맑다고 하지만 너무 많이 끼어 있어 과연 얼마나 맑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또한 안개 때문에 남한강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이는 얼마 지난 후에 단순한 기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고구려의 석비

 

만약 고구려의 비석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사람 중 다수가 광개토태왕릉비를 떠올릴 것이다. 현재 중국의 집안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는 그 규모 가 압도적으로 크며, 또한 우리 민족이 역사에서 자랑하는 정복대왕이라는 면에서 강한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 의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남한에도 그러한 광개토태왕릉비처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있다. 고구려 비석으로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모두 두 개로, 앞서 말한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가 그것이다. 고구려는 중원을 점령하고 이곳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기리기 위하여, 또한 남방지배의 거점이 될 것임을 인식하여 이렇게 비석을 세워 놓은 것이다.

 

 

국보 205호로 지정된 이 중원고구려비는 선돌마을 어귀에 서 있었던 돌기둥으로서 1979년 예성문화연구회에 의하여 고구려비로 밝혀졌고,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현지 조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는 마모된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내용을 완벽히 알아내기는 힘들지만, 삼국시대의 역사를 살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예서풍의 글씨를 4면에 모두 새긴 대략 400여자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중원고구려비의 발견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중원고구려비는 마을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모르고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표면에 글씨를 새겨 놓아 울퉁불퉁하였고, 그 때문에 빨래판으로서도 적절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마모된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중원고구려비 주변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교통과 육로교통상 전략적 중요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미산성과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존재한다. 그리고 또한 노은면에서 고구려시대의 금동광배가 출토된 것 등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차지한 후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비석을 세웠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원고구려비는 신비를 머금고 아침안개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동안 서적에서만 그 모습을 보던 것을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본다는 것 자체가 가슴을 떨리게 한다.

 

하지만 하필 방문한 때가 운이 좋지 않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학술자료 구축을 위한 복제 및 보존처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면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두 면은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신 중원고구려비에 대한 설명 안내판 쪽에 중원고구려비를 본떠 만든 모형이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잘 볼 수 있었다. 또한 해석도 쓰여 있기에 어떠한 내용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해석을 보면 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나타난다. 고구려에 비해 신라는 거의 일방적인 관계로서 묘사되며, 이는 당대 상황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비석이 세워진 시기를 장수왕 때, 즉 5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매금'이라는 표현이 신라의 왕을 폄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지금 들어서는 신라에서도 매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확인되어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의 중원지배,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부터 거세게 백제를 몰아친다. 그 와중에서 이 충주의 땅도 고구려에게 예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와 고구려는 고국원왕 이후 철전지 원수지간이었다. 근초고왕이 평양성까지 쳐들어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고 환호할 때, 고구려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바로 복수를 하진 못하고 내실을 다진 후 그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에 이르러서야 복수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남방진출에 있어 충주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다. 그렇기에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국원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개중에서도 장미산성이 국원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장미산성은 육로와 수로를 관장하는 요충지에 자리 잡았으며 그 근처에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점이 그 근거다.

 

국원성이라는 명칭은 국내성과 비교된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처럼 국원성 또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곳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남한강의 하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과도 동일하다. 한강은 백제의 젖줄이라고도 할 정도로 한성백제 시절에는 그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이의 일부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에게도 타격으로 이어진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 대에 백제의 개로왕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때 장수왕은 개로왕의 목을 베는 데, 그때 고구려가 어떻게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다만 남한강 상류에서 그대로 내려갈 경우 그야말로 기습이 되면서 백제왕도 피신하지 못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을 통하여 공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고구려의 중원지배는 생각보다 오래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진흥왕이 557년 이곳에 국원소경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곳은 고구려와 신라의 투쟁지역이었으며, 그랬기에 온달이 이곳을 거쳐서 가야하는 죽령과 계립령을 차지하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중원고구려비에 갔을 땐 아침안개에 새소리만 약간 들렸을 뿐 아무런 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1500년 전 이곳은 한반도에 있었던 강대한 세력의 각축장으로서 그 기능을 하였으리라.

 

고구려는 중원의 지배자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렇게 비석을 남기고 이를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그만큼 중원은 당시 삼국에게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다. 비록 지금은 그 기능이 다하였다고 하지만, 그 넋은 아직도 남아있다.

 

중원고구려비 해석문

(전면)
5월 중 고려대왕(高麗大王)의 조왕(祖王)께서 영(令)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려고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 주부(主簿) 귀도(貴道) 등이 ...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建立處 用者賜之 隨者 ... . 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게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도(貴道)가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 내의 주민을 모아서 ... 로 움직였다.

 

(좌측면)
... 中 ... 城不 ... 村舍 ... 沙 ... 班功 ... 節人 ... 신유년(辛酉年) ... 十 ... 太王國土 ... 上有 ... 酉 ... 東夷 寐錦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홍(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입니다. 11월 4일 충주답사를 갔다와서 쓴 답사기입니다.


태그:#중원고구려비, #고구려, #충주, #장수왕, #국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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