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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생각만해도 마음 한구석에 그리움이 묻어나는 곳이다.

 

한때 번성기를 누렸지만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이용객들이 줄고 자연스럽게 폐선이 되어버린 간선들, 그 간선들이 지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작은 간이역들이 있었다.

 

이용객이 줄어 이제는 기차가 서지 않게 되어버린 간이역. 더 이상 지나는 기차가 없어 폐선 위의 간이역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지난 시절의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간이역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도 있다. 가을이 깊어가기 시작하는 지난 10월 초 <은하철도 999>의 '철이'를 연상케 하는 그를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릴 적부터 기차를 좋아했습니다. 떠나는 기차를 보면서 미지의 시계나 여행에 대한 막연한 꿈을 키웠던 것 같아요. 얼마 전 일본 홋가이도에 가서 ‘은하철도 999’가 그려진 랩핑 열차를 타보고는 알았습니다. 기차는 저에게 ‘꿈의 종착역’이었다는 것을요.”

 

KTX가 서울 부산간을 다섯 시간에 주파하는 요즘, 작은 것, 느린 것, 촌스러운 것들은 우리들의 먼 기억 속에나 있을 법한 빛바랜 추억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열차사랑(www.ilovetrain.com)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해 온 임병국씨(35세·nhn 근무)에게 간이역은 사라질 기억도 과거의 추억도 아니다.

 

“홈페이지를 처음 만들던 때만 해도 철도에 대한 제 개인적인 감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녀온 간이역에 대한 정보에 공감을 하고 성원을 보내며 틀린 정보를 지적까지 해주는 네티즌들의 열성적인 모습을 보면서 개인의 감성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1999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철도 여행과 간이역에 대한 감상과 정보를 올리기 시작했다는 임병국씨. 그의 홈페이지에는 한국에 있는 모든 철도노선과 간이역은 물론 사라진 폐선에 대한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다.

 

 

기차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주머니를 털어 찾아다니며 모으고 정리한 정보가 철도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가 된 것이다.

 

“저도 처음엔 철도여행의 소비자로 시작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단순한 여행자의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그동안 모은 자료를 가지고 역사성 있는 철도 역사(驛舍)에 대해서는 문화제 지정을 요청하고, 철도와 간이역을 연개한 새로운 관광 상품 개발에 도움을 주며,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사라진 간이역 복원운동까지 하는 등 철도 여행 문화의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죠.”

 

철도와 간이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가 사라지는 간이역에 대해 안타까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2006년 무단 철거되었다가 지역 주민들과 철도 동호인들의 힘을 합한 노력으로 최근 복원이 결정되었다는 태백선 함백역. 그 복원 뒤에도 철도를 사랑하는 그의 노력이 있었다.

 

 

함백역은 1957년 함백 탄전을 개발하면서 만들어진 역이다. 하루 이용객이 800여 명에 이를 정도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도 있었지만 1993년 폐광 이후 간이역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간이역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6년 10월 철거를 맞게 되었다.

 

“철거를 하기에 앞서 좀 더 많은 고민을 했어야 합니다. 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둘러 철거에 나서기보다는 간이역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가치나 역사성 그리고 주민들에게 주는 상징적 의미를 배려했어야지요.

 

다행히 함백역은 주민들의 모금과 주변의 노력으로 복윈이 결정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이역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철거 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보존가치가 있는 간이역이라고 생각되면 문화재청에 건의도 하고 철도청에 제안도 하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 철거될 간이역을 지켜내기엔 역부족이지요.”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보존과 관리까지 관심을 갖는 그는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문화재청의 문화재 지킴이 역할도 자원해서 하고 있다. 전국의 철도노선과 간이역들을 손금 보듯 꿰고 있다는 그에게 가볼 만한 간이역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군산선 임피역과 전라선의 춘포역을 꼽는다.

 

“동호인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지요. 1917년에 준공한 춘포역은 우리나라에게 가장 오래된 역으로 역사적 의미도 깊은 곳이구요. 1936년 준공된 임피역 역시 문화재적 가치는 물론 여행객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정감이 묻어나는 곳입니다. 두 곳 모두 가보시면 후회하지 않을 곳으로 추천합니다.”

 

가난했던 시절 기차역은 희망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사람들…. 그 속에는 그리운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와 형들의 모습이 있었다. 이제는 가는 사람도 돌아오는 사람도 없이 그저 하루에 한두 번 지나는 기차를 맞는 것이 전부가 되었지만 임병국씨처럼 잊혀져 가는 이야기를 조용 조용 들려주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다.

 

  

“지난 세대들에게 기차는 교통수단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애잔한 삶의 현장이었기에 그리움과 추억으로 남아 있지요. 하지만 요즘 10대들은 조금 다릅니다. 문명과 기계, 기술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은 잘 모르고 있지요.”

 

이런 안타까움으로 그는 올해부터 자비를 들여 매달 한 명의 청소년을 뽑아 철도답사여행비를 지원하고 있다. 철도와 간이역을 잘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과 작은 것, 느린 것, 촌스러운 것에 대한 정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빠르게, 복잡하게 진화되어가는 세상에서 간이역이나 열차에 대해 관심을 갖는 그는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그리움을 강조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술이 진화할수록 돌아가고픈 기억의 창고는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는 사람이 외롭지 않듯이 힘들고 어려울 때 훌쩍 떠날 추억의 장소를 간직한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열차 사랑 임병국씨는 자신은 물론 그리움과 추억, 꿈의 소중함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추억의 창고를 마련하는 사람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잊혀진 철로와 간이역을 따라 묵묵히 발길을 옮기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풍요롭게 하는 또 한 사람의 우리 이웃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빛과 소금' 11월 호 에도 실렸습니다


#열차사랑#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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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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