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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비가 있는 곳은 바람이 제법 차구나.

 

네가 있는 곳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어서 내심 걱정이 되는구나. 다행히 올해는 수능 한파가 없다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구나.

 

지금 시각은 14일 오전 10시. 아침 식사 후 잠시 쉬어야 할 시간이지만 너는 이 순간에도 책과 씨름하고 있겠구나. 교과서라는 것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지혜를 주지 못하고, 가슴 훈훈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어서 졸음이 몰려오기 딱 좋은 물건인 것을 아비도 잘 안다.

 

아들아, 최선을 다하되 일등을 탐하지 말거라

 

그렇게 지루한 것과 하루 종일 마주하고 있는 아들이 대견스럽다. 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있는 아들이 자랑스럽구나.

 

아비는 아들이 그것을 과감하게 팽개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요구가 무섭단다. 더불어 일류만 요구하는 이 사회의 끈질긴 야심이 두렵다. 아비는 그런 세상이 싫어 산촌에 살고 있지만, 너를 그런 세상에 내보낸 것이 미안할 뿐이다.

 

아들아,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험악하지만은 않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추악한 면도 있지만 실은 아름다운 면이 더 많단다. 이름없는 별들이 있어 밤하늘이 아름답듯 세상도 그런 이들이 있어 아름답단다.

 

오늘은 예비소집일이더구나. 시험을 치르는 학교를 미리 가 보는 일은, 흥분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될 것이니 홀가분하게 다녀오도록 해라. 오늘 밤을 보내면 아들이 준비한 모든 것을 털어내야 하는 시간이다. 아낌없이, 후회없이 비워내기를 바란다.

 

아들아, 인생은 짧은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살아가야 한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가야 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내일 치러질 시험은 삶에 있어 한 번의 호흡을 토해내는 일과 같음을 잊지 말거라. 그러니 지나치게 긴장할 일도 아닌 것이다.

 

시험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일등을 바라지만, 일등이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등이라는 자리로 살아갈 일도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니 삶을 가꾸는 데 있어 최선을 다하되 일등을 탐하진 말거라.

 

지금까지 지켜본 아들은 적어도 아비의 학창시절보다 멋있고 훌륭하다. 시험이 끝나면 결과가 곧 나올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길을 선택하거라. 일등이 아니라도 좋고 일류가 아니라도 좋다. 아비를 위한 길이 아닌 너만의 길을 찾도록 해라.

 

아들아, 헛된 것과 절대로 타협하지 말거라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사랑하는 아들 승범아.

 

이제 아들도 세상을 두루 둘러볼 때가 되었구나.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세상은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도 알아차리기 힘든 세상이다. 미혹당할 수 있는 일 또한 도처에 널려 있다.

 

거짓말투성이의 세상에서 섣불리 진실을 캐려 하지 마라.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고 역사를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단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역사는 그것을 밝혀내고 마는 힘이 있단다. 그러하니 아들도 자신의 역사를 쓰는 일에 소홀해서는 아니 된다.

 

아들아, 세상엔 불의도 많단다. 불의를 참지 말되, 헛된 것들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말거라. 타협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을 향한 아들의 뜨거운 열정을 아비는 믿을 것이다.

 

이제는 봄인데

왜 이렇게 추울까

겨울이 아까워서

못 가고 있나봐

 

이제는 봄인데

제비는 왜 안올까

겨울이 무서워서

못 오고 있나봐

 

우리들을 위해

눈을 한 번이라도

더 내려주고 싶어

겨울은 못 가고 있나봐 

 

- 강승범 동시 '못 가는 겨울' 전문

 

아들아, 위의 동시 기억하니? 이 작품은 1998년 3월 18일에 쓰였더구나. 아비는 이 작품을 500원에 구입했고, 아들은 작품 값으로 받은 돈을 들고 슈퍼로 뛰어갔지. 98년이면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해더구나.

 

그 무렵 동네의 책 대여점에서 버린 헌책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던 아들의 모습을 아비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단다. 아비가 읽을 책도 있다면서 손을 잡아끌던 그 표정은 하도 귀여워서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란다.

 

아들아, 미련도 후회도 버리고 멋지게 웃거라

 

아들과 얼굴 마주한 지 두어 해 되지만 초롱하던 눈망울이 눈에 선하구나. 이젠 아비보다 훌쩍 큰 키를 하고 있지만, 아비에게 아들은 여전히 맑은 눈과 웃음을 간직한 아이일 뿐이다. 그러던 아들이 어른으로 가기 위한 관문 하나를 통과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 하고 있구나.

 

아비는 아들을 믿는다. 아비는 아들의 정신을 믿고, 아들의 참됨을 믿는다. 또한, 아들이 지니고 있는 곧은 마음과 착한 심성을 믿는다. 설령 내일 치러질 수능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낙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한 후엔 언제나 웃는 모습을 보이거라. 미련도 후회도 모두 버리고 멋지게 웃거라. 그것이 너의 본 모습이기에 그 순간을 아름답게 기억해라. 그리곤 앞으로 닥칠 난관에 대비해라. 살아가면서 아들에게 어떤 난관이 닥칠지 모른다. 그 난관을 헤쳐나갈 지식보다는 세상에 맞설 수 있는 곧은 지혜를 터득하거라.

 

세상은 끊임없이 너의 실력을, 너의 마음을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세상이 요구한다고 해서 다 들어줄 이유는 없다. 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낄 때만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거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룰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목숨을 걸거라. 그리곤 후회 말거라.

 

시험이 끝나면 고단했던 너의 몸을 푹 쉬게 하거라. 다시 신발끈을 맬 때까지 쉬면서, 못다 읽은 책을 펼치도록 해라. 책엔 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 들어 있단다. 시험을 잘 쳤다고 해서 들뜨지도 말 것이며, 시험을 못 쳤다고 해서 인생의 실패라고 눈물을 떨굴 이유도 없단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거라. 아비는 누구처럼 너를 위해 백일기도도 하지 않았다. 너를 믿기에, 이 나라의 공교육을 믿기에, 그동안 학원 한 번 보내지 않았음을 이 아비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비는 너를 데리고 학원에 간 적이 있었다. 학원에 가서 물으니, 학원교사는 학교 교육과정보다 일주일 먼저 선행학습을 시킨다고 했다. 그때 아비는 아들에게 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똑같은 교육을 두 번씩 받을 필요 있겠니? 그러니 우리 학교와 학원 중 한 곳만 다니도록 하자."

 

아비는 아들에게 그렇게 제안했고, 아들은 학원 대신 학교를 선택했다. 친구들이 학원으로 달려가는 시간 너는 동화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옳은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아들아, 겸손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거라

 

얼마 전 아비와의 전화통화에서 아들은 모의고사 성적만큼만 수능성적이 나오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시간만 나면 책 보라고, 밤 12시 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라고만 말했던 아비였는데, 고마웠다. 그리고 다른 집 아비처럼 원 없이 챙겨주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그러나 어느 집처럼 학원 한 번 보내지 못한 아비의 속된 마음이 원없이 풀어지는 소식이기도 했단다. 설령 시험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비는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란다. 아들이 최선을 다했기에 그 결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너의 고단함을 풀어주련다.

 

아들아, 시험 끝나면 아비와 함께 등뼈만 남은 산야를 여행하자꾸나. 빈 것으로 남은 나무가 새 봄을 준비하듯,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의 삶에 이 아비도 동참하고 싶구나.

 

아들아, 내일 시험 잘 치르길 기도하마. 그리고 그동안 고생했다. 최선을 다한 아들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구나.

 

사랑한다, 아들아!

 


태그:#아들,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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