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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드라마를 만든 피디나 작가는 다음 작품에서 반드시 듣게 되는 말이 하나 있다. 전작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비슷한 면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기복제라거나 우려먹기라는 말이 쏟아지기도 한다.

 

이러한 말은 결국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는 창조적 역량이 없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한 작품을 일부러 다시 써먹는다는 말이다. 다시 써먹는다는 것은 창조적 역량과는 관계없는 말이다. 앞의 말은 드라마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뒤의 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것보다 도덕적인 면에서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만, 제작하는 처지에서 전작을 아예 도외시할 수 없는 점들이 있다. 무엇보다 일정한 자기의 작품 세계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전작의 코드들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대가의 반열에 올라가고자 하는 이들은 이러한 자기확증의 작업을 하려 한다.

 

또한, 방송사의 생리상 전작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그 성공작의 범주 내에서 제작 방향을 설정하게 마련이다. 적어도 공중파에서는 모험을 싫어하는 경향성이 결합하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초점은 같고 같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가려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산-정조>는 <대장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장금>의 이병훈 피디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아동 사극의 면모를 통해 주목을 받았고, 성공에 관한 이야기들이 도화서 다모 송연(한지민)과 대수(이종수)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에 성공 지향적인 홍국영(한상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과제와 난제의 설정과 해법 찾기는 공통분모다. 그것을 통해 성공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서동요>도 마찬가지였다.

 

<서동요>에서는 <대장금>의 이병훈 피디와 김영현 작가가 모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비교의 대상이었다. 시청률이 안나오면 <대장금>은 이랬는데 이래서 <서동요>는 안된다는 식의 지적이 비등했다. 한편으로는 <대장금>과 같기 때문에 식상해서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산-정조>도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장금>과 <이산-정조>는 다를 수밖에 없다. <대장금>은 일종의 성공 스토리를 담고 있다. 약자의 한, 가족의 정 그리고 꿈이 중요했다. 여기에 의학과 음식이라는 당시의 첨예한 웰빙 트렌드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산-정조>는 완전한 성공 스토리라고 볼 수 없다. <대장금>은 주인공은 서민이었지만, 정조는 왕이다. 지적해야 할 점은 <대장금>과 <서동요> 그리고 <이산-정조>를 거치면서 이병훈 피디의 작품들이 완전히 왕의 이야기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서동은 하층민으로 전락한 주인공이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벌이는 성공기이지만, 이산은 이미 왕세자의 지위에서 왕위에 등극하려 한다. 이는 왕세자의 신분에서 출발한 담덕(배용준)의 <태왕사신기>와 닮았다. 어떻게 보면 서민들의 코드와는 멀어지고 있으며, 성공 스토리와도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여자 주인공의 역할은 부차적이 되고 있다. 가족의 정과 한은 사도세자와 이산을 통해 구현하려 하지만 서민의 코드는 아니다. 여기에 꿈은 이산과 대수, 송연의 어린 시절 꿈의 실현이지만 그것에는 한이 없다. 즉, 절절함이 없는 유아성이 앞선다.

 

아쉬운 것은 이만이 아니라 여성 주인공이다. <서동요>에서 선화 공주는 왕족의 신분에서 벗어나 천민으로 상인으로 거듭나면서 서동을 왕으로 등극시키는 데만 올인(다걸기)한다. 물론 자신의 삶은 부차적이다.

 

이러한 점은 <이산-정조>에서도 같은 맥락이지 않나 싶다. 도화서 다모 송연(한지민)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꿈보다는 이산 정조를 어떻게 보필할 것인가에 더욱 골몰할 뿐이다. 왜 그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도 없다. 그림을 통해 송연은 무엇을 실현하려는 것인가.

 

그 대신 사랑이 중심이 되고 있고, 이는 사극에서 일반적인 특성이었던 남성 중심의 로맨스와 연결된다. <대조영>에서 초린(박예진)이 젊은 여장부에서 결국에는 왕후의 자리에 함몰되고 핏줄에 연연해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물론 <대장금>은 여성중심의 로맨스였다. 이점이 시청률의 외연을 확장한 중요한 포인트였다. 드라마의 채널 주도자는 아직 여성이니 말이다. 더구나 남성중심의 장르인 사극에 여성을 주목하려면 여성의 시선이 중심인 것도 중요하다.

 

여성의 시선은 <왕과 나>에서 과거 <여인 천하>식 궁중 암투로 이어지기도 한다. 윤소화와 인수대비, 정현왕후, 엄귀인, 정귀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여인들의 기세싸움은 왕을 능가한다. 여성 암투와 내시의 명분과 임무가 맞부딪히고, 그 가운데 처선과 소화의 멜로가 섞여 있다.

 

여성들의 수많은 담론이 등장하고, 여성이 중심이지만, 여성의 시각이 배제되어 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대잇기와 왕실에 종속되어 있고, 자기는 없다. 그들을 위해 주인공 내관 김처선은 종속되어 있다.

 

사극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멜로 라인이 뒷심을 받지 못하면서 더욱 이러한 여성 궁중 암투는 심해졌다. 처음에 내시라는 새로운 직업군에 대한 주목과 섹슈얼리티로 주목받은 설정은 모두 권력암투로 수렴되면서 정통사극의 권력싸움과 달라질 바 없어졌다.

 

이 때문에 처선(오만석)의 위치가 애매해지고, 권력적 인간형으로서 가지는 여인 천하의 코드가 강해졌다. 왕실을 위한 처선의 자기 역할 다하기는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박수를 보내기 어렵다. 모두 외연의 확장이 아니라 답보에 머물 요소들이다. 오로지 돌고 도는 비운의 감정만이 드라마를 휘감는다. 비운을 통해 개운해지는 것이 아니라 침잠된다.

 

더구나 단순 명확한 이야기 전개가 아니라 돌고 도는 권력의 쟁탈전은 정치 사극의 범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법이다. 적어도 TV 시청률 경쟁에서는 명확한 사건 전개의 구도이면서 예측이 불가능한 지략대결이 유리한 법이다.

 

복잡한 것은 싫어하는 쿼터리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주몽> <대조영> <해신> <대장금> <서동요>가 인기를 모은 이유다. 단순 명확한 사건 구도와 각종 선명한 대결은 연속극의 특성에 부합했다.

 

<왕과 나>는 한 공간에서 다 찍을 수 있는 서사 전개에 인물의 과장된 연기에 초점을 맞추고만 있다. 다음이 애타게 궁금하지 않으니 불리한 일이다. 주인공이 고뇌하는 인물로만 활약(?)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공연 양식과는 달리 몰입이 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주인공은 위축되고 주인공 외의 권력암투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요즘 각 드라마는 서로 베끼기도 하고, 자기 복제하는 가운데 여기에 새로운 요소들도 선을 보이려 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진보되어가는 면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의욕적인 시도가 결국에는 시청률에 수렴되어 과거의 흥행 코드에 회귀하는 모습들을 보이기도 한다. 자칫 잘못하면 동반 몰락을 할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는 지경이다.

 

정치 과잉의 사극은 더욱 더 그러하다. 앞으로 사극은 당분간 정치에서 미시사로 새로운 모색을 할 시점이 되었다. 대중문화는 쏠림과 식상함에 대한 역반응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여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안에 보낸 글입니다.


태그:#이산-정조, #왕과나, #대장금,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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