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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모습.
 전시실 모습.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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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들에게 흙은 생명과 같다. 농부에게도 흙은 생명이다. 농부는 흙을 일구어 생명을 만들지만 도공은 흙으로 형체를 만들어 자신의 분신을 만든다. 그러나 흙을 만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면서도 고달프다. 늘 삶의 고달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흙을 놓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간다. 아프지만 사랑한다. 그래서 흙은 어쩌면 역설의 미를 함축하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흙에는 사람 냄새가 난다. 도공들은 수만 번의 손길을 주고 또 주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농부들은 수만 번의 발걸음과 마음을 주어 한 알의 알곡을 만든다. 그 손길과 발걸음 속에서 흙은 사람 내음을 몸으로 체득한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를 앙증맞게 만든 유선자 씨의 작품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를 앙증맞게 만든 유선자 씨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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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이기엔 조금 크다 싶지만 그 투박함 속에 묻어나는 질박함이 좋다.
 찻잔이기엔 조금 크다 싶지만 그 투박함 속에 묻어나는 질박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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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농사꾼을 바라보는 마음이나 도공을 바라보는 마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난 본다. 전혀 다른 작업이지만 하나의 자기(瓷器)를 만들고, 한 알의 알곡을 만드는 마음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11월의 가을은 화려하지만 고즈넉하다. 도심을 줄지어 서 있는 울긋불긋한 가로수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에도 때깔 좋은 단풍이 든다. 내 마음에도 단풍이 스멀스멀 물들어온다. 그 마음을 가지고 전주공예품전시관을 찾았다. 그곳엔 열 번째로 호원토가회원들의 도자공예전이 열리고 있다.

도자기에 솟대를 그린 자신의 작품 앞에 서있는 신호철 씨.
 도자기에 솟대를 그린 자신의 작품 앞에 서있는 신호철 씨.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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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들어서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도자공예품들이 살갑게 맞이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전통적인 청자와 백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생활자기까지 다양하다. 그 자기 속에 내 눈에 해맑게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유약을 칠하지도 않고 붉은 황토 옷을 있는 그대로 입고 천진하게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오줌을 누고 키를 둘러쓰고 소금을 얻어러 가는 아이의 모습.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천진하다
 오줌을 누고 키를 둘러쓰고 소금을 얻어러 가는 아이의 모습.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천진하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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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이불에 오줌을 싸 지도를 그려놓고 옆집에 소금 얻으러 간 아이. 조금 부끄러운 낯빛을 하고 키를 뒤집어쓴 작품을 보고 배낭을 메고 들어온 세 명의 아줌마들이 킥킥거리며 이야기한다.

“호호호, 저 녀석 오줌 싸고 소금 받으러 가고 있능게벼.”
“우릴 어릴 때 쪼매 했지. 그땐 무척 창피했는디 요로케 본 게 재밌다 야.”


소녀 같기도 하고 중년 여인 같기도 한 여성이 젓가슴을 드러낸 채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소녀 같기도 하고 중년 여인 같기도 한 여성이 젓가슴을 드러낸 채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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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줌마들은 전시관을 둘러보며 젖가슴을 내놓고 머리에 함지박을 이고 가는 여인네, 오도카니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두 남녀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다. 그러더니 세 아이가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는 작품에 가선 무엇이냐 묻는다.

머리에 냄비를 쓰고 기차놀이하는 모습.
 머리에 냄비를 쓰고 기차놀이하는 모습.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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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공 신호철(군산에서 예인도예 운영)씨가 웃으며 기차놀이라며 설명을 해준다. 세 명의 아이들이 새끼 줄을 허리에 두르고 칙칙폭폭 하며 기차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머리에 쓴 게 양푼이다. 신호철 씨가 모자(양푼)를 벗기자 아이들의 빡빡머리가 드러난다.

그 모습을 보자 어릴 때 지겹도록 기차놀이나 술래잡기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친구들. 그땐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신나게 노는 게 최고였는데 지금쯤은 세월의 무게를 이고 살아가고 있을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신호철씨의 안내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고 그와 이야길 나누었다. 공방운영 올해로 12년째인 그는 지방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도공으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함께 그래도 도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생활요? 어렵죠. 지방에서 도자기 굽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대부분 다 어려워요. 요즘엔 중국이나 이천에서 싸게 나오기 때문에 더 힘들어요.”

얘들아 뭐하고 있니?
 얘들아 뭐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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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도자기 수요가 거의 없어 힘들다고 한다. 특히 예술로서의 자기를 만들어서는 살기가 힘들어 생활도자기를 만들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고 한다.

전북에서도 고려시대 왕실에 청자를 진상했다던 부안 줄포뿐만 아니라 남원, 진안, 전주, 군산 등 여러 곳에서 공방이 차려져 자기를 굽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흙을 이천이나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도자기 하는 사람들 대부분 몸이 많이 아파요. 이것도 고된 노동이잖아요. 그래서 도자기 하는 사람들은 타고 낫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워낙 생활이 어렵다보니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도자기를 전공하는 사람 중 대학졸업 후 공방 일을 하는 사람은 오십 명이면 삼사 명 정도라고 한다. 대다수가 다른 일을 찾아 떠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깝게 말한다.

“요즘은 도자기 공부하러 일본으로 갑니다. 우리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 기술을 전파했는데 지금은 거꾸로 됐어요. 일본에서 역수입하는 현실입니다.”

사실 17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백자 같은 자기(瓷器)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조선과 중국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양란 때 일본의 영주들은 조선의 도공을 붙잡는 대로 일본으로 끌고 갔다. 당시 그들에게 자기는 권위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때 끌려간 인물 중 이삼평이란 분은 일본에서 도조(陶祖)로까지 추앙받고 있다.

조선에서 천민 대접을 받던 이들이 일본에선 극진한 대접을 받는 현실. 그러한 현실에서 조선 도공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거기에 영주들의 지원 속에 자기 이름을 새긴 도자기를 만들기까지 한 도공들에게 일본이란 곳은 슬픈 현실이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의 예술을 꽃피울 수 있는 아이러니한 곳이었을 것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일까?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아이들이 모습일까?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일까?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아이들이 모습일까?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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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의 아리타 마을에 가면 이삼평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신사까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는 도조(陶祖)란 말을 붙였고, 그의 기념비에 오르는 언덕길엔 무궁화를 심어 놓아 400여 년 전에 끌려간 한 조선 도공의 넋을 달래고 추앙하고 있다 한다. 어쩐지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지금 도자기 기술을 배우러 일본에 가는 역현상을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점의 백자와 세 점의 청자 앞에 선 신호철씨. 그의 자기엔 솟대가 그려져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를 자기에 그려놓은 이유를 ‘집안에 들여놓음으로써 가정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군산 임피에서 살고 있는 진범석 씨의 자기들
 군산 임피에서 살고 있는 진범석 씨의 자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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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호원토가회원'은 도예를 전공한 호원대학교 동문들로 올해로 10회 전시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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