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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만날 집에만 있는 우리 안 불쌍해요? 김밥 싸서 가까운 곳이라도 놀러가요!"
"너희들이 아버지 잘 못 만나서 그래. 팔자려니 생각해라."

 

주말이 가까워 오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못갈 걸 뻔히 알면서도 한 번씩 빈 낚시를 던진다. 팔짱을 끼고 우리들 대화를 듣고 있는 아내의 표정에는 한심이 가득하다. 주말을 맞는 슬인이(초4)네 집 보통 풍경이다.      

 

깊어가는 가을, 늘 바쁘다는 핑계로 변변한 가을 여행을 가지 못한 걸 참회하며 지난 주말(28일) 곶감으로 유명한 충북 영동을 다녀왔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친한 벗을 보기 위함도 있었고, 내 몸 속에 잠자고 있던 신명을 끌어낸 난계국악단의 소리가 그리워서다.

 

언젠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영동에 적을 두고 있는 난계국악단 공연을 접했다. 국악이라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전유물, 늘어지는 가락 정도로 여기던 내 상식을 그들의 소리는 비웃듯 배반했다. 팝과 트롯은 물론 뉴에이지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흥에 취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인 준석씨] "우리 소리 마약보다 중독성 강해요"

 

경부고속도로 옥천IC를 빠져나와 20여분을 달려 영동 땅에 발을 디디자 국악의 고장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제일 먼저 반겨 분명한 지역색을 드러낸다. 이어 난계 국악기 제작촌, 난계 박물관, 난계 국악기 체험 전수관으로 이어지는 국악의 거리는 우리 소리를 보고, 듣고, 만지고, 연주해보는 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체험 장소에 '난계'란 단어가 붙은 이유는 이곳이 난계 박연 선생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박연(1378~1458년) 선생은 조선 초 태종ㆍ세종 때 궁중 음악을 정비했으며 국악의 기반을 구축해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동에선 박연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해마다 9~10월경에 난계국악축제를 연다.

 

제일 먼저 들른 난계국악기 제작촌에서 우리 소리의 대중화와 새로운 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연구에 정성을 쏟고 있는 장인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주인공은 지난 30년 동안 우리 악기를 만들고 새로운 악기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조준석(47)씨로 이곳의 대표를 맡고 있다.

 

우리 악기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수성을 소개하는 조 대표의 눈이 반짝이고 목청에 힘이 들어간다. 우리 소리를 말할 땐 해금을 연주하는 듯 하다가 새로운 우리 악기 개발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질타할 땐 꽹과리를 두드리는 듯하다.

 

"우리 소리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해요. 마약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다니까. 자연에서 소재를 찾고 자연의 소리를 내는 건 우리 전통악기가 유일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계적으로 음악치료를 하는 의사들이 우리 악기로 연주된 우리 소리를 제일 선호해요."

 

우리 악기와 소리를 향한 조 대표의 가치관은 신앙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쉽고 편하게 우리 소리를 연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조 대표의 목표다. 작업장 한쪽에 개인 연구실을 만들어 연구에 매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 대표의 연구 결과물 중 대표 격이 도자기 해금이다. 전통 해금의 경우 울림통 가격만 수십만원에 달하고 재료가 나무이기에 계절과 기후변화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또한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단점을 지녔다.

 

도자기 해금은 울림통을 도자기로 만들어 수십만원에 달하던 울림통 가격을 2~3만원대로 낮췄다. 이에 따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대중성을 확보했으며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다. 또한 계절이나 기후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 항상 일정한 소리를 내는 장점이 있다. 도자기 크기 조절이 쉬워 연주용은 물론 장식용으로도 제작이 가능하다.

 

조 대표는 11월 1~4일까지 '국악기와 도자기의 만남'이란 주제로 전북 순창고추장민속마을 야외공연장에서 연주회를 연다. 이날 도자기 해금이 첫 선을 보일 예정이며 전통 해금과의 이중주도 감상할 수 있다.

 

이밖에도 조 대표는 해금, 거문고의 구조, 개량 해금 등 3건의 특허와 현악기의 문양 고정구조를 비롯해 7건의 실용신안을 출원할 정도로 우리 악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다. 아직도 그의 연구는 진행형이다.

 

"중국이나 일본 특히 북한은 전통악기 연구에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30년이 뒤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건 초등학교부터 우리 악기 연주를 의무화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것을 지키려는 실천이 있을 때 지켜지게 아닌가요?"

 

[친절한 영예씨] "악기 만들기 체험, 꼭 예약하고 오세요"

 

제작촌에선 현악기뿐만 아니라 타악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볼 수 있고 장구를 매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올해만 4만8000여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금요일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악기 만들기 체험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어린이나 학생들이 처음 이곳을 방문하면 저에게 '선생님 장구를 딱풀로 붙였어요, 본드로 붙였어요?'라는 질문을 해요. 웃음이 나다가도 우리 악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슬프죠. 하지만 장구를 한번 매보면 백 마디 설명 필요 없이 금방 이해를 합니다."

 

미니어처 타악기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노영예(41)씨의 말이다. 이곳에선 약간의 힘을 필요로 하는, 줄을 묶는 마지막 작업을 제외하곤 모두 손수 장구를 매게 한다. 그래야 기억에 오래 남고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 영예씨의 설명이다.

 

영예씨는 악기를 함께 만들면서 각 부위의 명칭이며 역할에 대한 세심한 설명도 빠트리지 않는다. 또한 체험자들은 영예씨의 안내에 따라 장구채 잡는 법이며 자신이 직접 만든 악기를 이용해 기본적인 장단도 배울 수 있다.

 

부분별로 나누면 한꺼번에 200명 정도가 체험이 가능하고 비용은 모두 1만원이 소요된다. 평일에는 주로 어린이들과 학생 등 단체로 방문하고 주말이면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영예씨는 전한다.

 

"예약을 하고 오지 않으시면 재료가 떨어지거나 다른 체험자들 때문에 구경만 하다가 가는 경우가 있어요. 이럴 땐 찾아주신 분들께 정말 미안해요. 악기 만들기 체험을 하실 분들은 꼭 예약을 하고 오세요."

 

[우리 소리 백화점] 난계박물관에서 옥계폭포까지

 

국악기 제작촌 우측으로 자리 잡고 있는 난계박물관은 박연 선생의 뜻과 업적을 기리고 국악과 관련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762.12㎡ 면적에 2층 규모로 2000년 9월에 완공해 개관했다.

 

박물관에는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 14종과 타악기 37종, 관악기 19종 등 100여종의 국악기와 국악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문묘제례악 등에 쓰이며 웅장하고 날카로운 금속성 음색을 지닌 편종을 직접 연주해볼 수도 있다.

 

또한 '세종실록'과 '대악후보', '악학괴범', '가곡원류', '가곡원류', '금보' 등 국악 관련 고문서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2인의 명인 명창을 사진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영동과 난계, 난계의 삶, 난계의 업적에 관한 영상이 준비돼 있으며 한국 음악에 대한 각종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박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연휴 때는 휴관한다.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및 군인 300원, 어린이 200원이다.

 

박물관 우측으로 자리하고 있는 난계사는 박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73년에 지어졌다. 박연 선생의 난계라는 호는 그의 정원에 난초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사당 주변에서는 난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난계사를 방문하면 잘 꾸며진 정원에서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행복한 표정에 손을 맞잡은 연인들과 여유로운 가족 단위 관광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낮선 사람들이지만 '안녕하세요. 행복하세요'란 인사를 건네 봄도 좋을 듯….

 

난계사를 나와 왼편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길 맞은편으로 난계국악기 체험 전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수관은 대지면적 1983㎡에 연면적 1490㎡(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지난해 3월 개관했다. 전수관은 136석 규모의 소공연장과 15종 363점의 체험용 국악기를 비치한 국악기체험 전수실, 개인연습실, 영상세미나실,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전수관은 한꺼번에 50명이 묵을 수 있는 콘도미니움 형태의 숙소(81㎡)가 3층에 마련됐다. 숙박료를 내고나면 모든 것이 무료여서 누구나 일정기간 머물며 국악기를 체험하고 전문 강사에게 연주법을 배울 수 있다. 이 때문에 방학기간이면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는 이용을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특히 전수관 1층 국악기 체험공간에서 가야금, 거문고, 해금, 대금, 피리, 편종, 편경, 단소 등 8가지 국악기를 터치스크린을 통해 악기의 음과 동영상을 접하는 특별한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이행구(42) 난계국악박물관장은 "터치스크린을 통해 듣고 싶은 우리 악기의 음과 동영상을  접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라며 "국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이곳을 돌아보면 듣고, 보고, 느끼기 때문에 깊이 있게는 아니더라도 우리 소리의 맛은 보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수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박연 선생이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는 옥계폭포가 장관이다. '박연폭포'로도 불리는 이곳은 깎아지는 듯 한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무려 20여m에 이르며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난계 박연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모여 옥계폭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글을 많이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방문했던 날은 꽁지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악공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단소를 연주하며 박연 선생의 뒷자락을 지르밟아 가고 있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내 아이들이 가장 먼저 접한 악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다. 피아노나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내는 건반악기가 처음이었을 게다. 이런 현상은 전부 어른들의 책임이다. 피아노 학원은 면 단위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지만 우리 악기, 예를 들어 해금전수관은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악기 우리 소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천연기념물처럼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소가치가 높은 것으로 변해가지 않길 간절히 기원한다.

 

국악기 제작촌에서 앳된 고등학교 여학생이 연주해주던 해금소리. 가슴을 에는 듯한 슬픔 뒤로 첫 입맞춤의 감미로움이 엄습하다 때론 흐느끼고 때론 앙증맞은 음색이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바쁜 와중에도 긴 인터뷰에 응해준 조준석 대표와 노영예씨의 친절에 감사드리고, 특히 가는 곳마다 안내하는 수고를 기꺼이 해준 친구 문재오씨에게 고맙다는 인사 전합니다.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기사입니다.


태그:#국악, #난계 박연, #충북 영동, #테마여행, #가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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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이 세 아이가 학벌과 시험성적으로 평가받는 국가가 아닌 인격으로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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