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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이 아픈 경씨는 낮에 지하보도에서 떡을 판다
 무릎이 아픈 경씨는 낮에 지하보도에서 떡을 판다
ⓒ 성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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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 넘치는 거리, 전북대학교 앞. 496개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이 곳은 낮에는 학생들이 활동하는 거리지만,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유흥의 거리로 변한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웃고, 반가워하고, 얼큰하게 취한 모습들이다. 마냥 즐거워만 보이는 사람들로 넘치는 이 거리에 세상사에 대한 근심 걱정은 없어 보인다. 단 한사람만 빼고.

'근심 걱정'의 주인공은 바로 경문자(73)씨. '떡 할머니'로 더 유명한 경씨는 매일 이 거리에 나타난다. 전북대 앞에서 술 한 잔 걸쳐 본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이가 없다.

경씨는 매일 떡과 도너츠가 든, 무거워 보이는 갈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말한다. "학생, 떡 하나만 팔아줘."

경씨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다. 그에 대한 오해만 낳은 근거없는 소문들.

"그 할머니 밤 되면 외제차 타고 다닌대."
"사실은 익산에 빌딩 한 채 갖고 있다던데?"
"그 할머니 그렇게 떡 잘 파니까 돈 엄청 잘 벌 것 같지 않냐?"


42년째 떡장사... "학생, 하나만 팔아줘"

"내가 31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어. 내 나이가 지금 73살이야."

햇수로 42년째다. 현재 전미동에 살고 있는 경씨는 오전 8시에 집에서 나온다. 남부시장에 들러 떡을 사고 전북대 앞에 와서 장사를 시작한다. 이 때가 보통 오전 9시다. 오랫동안 장사를 한 탓에 무릎이 아파 낮에는 지하보도에서 팔고, 어떻게든 떡을 다 팔아야 하기에 저녁부터 새벽 늦게까지 학교 앞 술집을 돌아다니며 판다.

"생활력이 없는 남편 때문에 시작했어. 내가 오죽 힘들었으면 이 일을 여태까지 하고 있겠어?"

젊은 시절부터 힘든 일만 했다. 처음엔 돈을 벌 능력이 안 됐던 남편을 대신해 일을 시작했다. 그가 아니면 돈을 벌 사람이 없었기에 31살 젊은 나이에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만 하는 이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자식들이 성장하면 그만 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장한 후에도 그만둘 수 없었다.

"할머니 왜 이렇게 일을 오래 하세요? 자식들이 다 성장했을 거 아니에요."

갑자기 경씨의 눈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주름 속에 가려진 눈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는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지만 아픔이 많았다. 세 딸들은 다 시집가서 잘 살고 있지만 두 아들은 아픈 상처를 가졌다.

"작은놈 죽고나서 나도 죽을라고 했었어, 근데 못 죽었어"

'떡 할머니' 경문자씨
 '떡 할머니' 경문자씨
ⓒ 성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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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놈이 둘 있는데 한 놈이 스물일곱살 때 약 먹고 죽었어. 그 놈이 일곱 살 때부터 내가 떡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 놈이 살기 싫다고 완산칠봉 올라가서 잡초죽이는 약(제초제)을 먹었어. 한 아들은 마누라가 있었는데 유방암으로 죽고. 손주만 둘 남았어. "

말이 끝나자마자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들놈이 약을 먹었는데, 나는 그 때 그것도 모르고 다방 돌아다니면서 떡 팔고 있었어. 다방을 돌아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누가 나를 계속 찾고 있더라는 거여. 왜 그런가 하다가 중앙시장에서 집에 갈라고 버스를 타려는데 누가 나한테 와서 말해주더라고. 작은놈이 대학병원에 실려갔다고."

경씨의 작은아들은 대학병원으로 실려갔지만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그는 둘째 아들의 죽음이 가슴에 잊히지 않는 가장 큰 아픔이라고 했다.

"나는 이 때를 평생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햐. 자식은 가슴에 묻혀. 지금도 이 속에 있어."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작은놈 죽고나서 나도 죽을려고 했어. 약 사놓고 죽을라고 했었어. 그런데 못 죽었지. 어떻게 죽어. 그래서 그냥 사는 거여. 가슴에 묻어놓고 사는 거여."

가슴속에 묻어 둔 둘째 아들이 떠올랐는지 경씨는 자식 얘기를 하다가 얘기를 멈췄다. 갑자기 딴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눈물나게 고마운 그 분은 터미널 단골 손님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물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야 많지."

42년간 떡을 팔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텐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 오죽 많을까. 질문을 바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한 명만 꼽아달라고 했다.

"내가 떡 팔면서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 저기 시외터미널이야. 거기에서 꼭 떡을 사주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생각나. 지금도 눈물나게 고마워."

42년간에 만났던 수많은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니 대체 어떤 분일까.

"진안 사시는 할아버진데 시외버스터미널에 올 때마다 떡을 사줬어. 수년 동안 명절 되면 명절 잘 보내라고 5만원씩 쥐어주고 그랬어."

얼마나 고마운 분이었는지 경씨는 '그 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학도병이라는 게 있었어. 그 때는 학도병 가면 다 죽는 거였어. 그런데 그 분은 그 시체밭 속에서 살아 돌아왔어. 그래서 국가유공자 됐어. 다쳐서 뇌수술도 여러 번 했어. 지금도 서울로 약 타러 다니고 그러는 분이야. 나보다 연세도 많으신데 항상 도와주시고 너무 고마운 분이야. 너무 눈물나게 고마워서 평생 못 잊어."

하루 종일 팔아야 3만원 정도 남는다
 하루 종일 팔아야 3만원 정도 남는다
ⓒ 성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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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2만~3만원... 손자 등록금 1년만 더 대면 그만 둬야지"

손자 얘기를 꺼냈다.

"지금 손주 두 놈이 있는데 한 놈은 군인 가 있고, 한 놈은 대학 다녀."

그래도 다행히 잘 성장해준 손자들이 고맙다고 했다. 아내를 아들은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쉬어야만 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막내 손자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대학 등록금이 비싸잖아. 한 학기에 400만원씩 내야 돼."

400만원이라는 그의 말에 갑자기 눈이 떡 바구니로 쏠렸다. 떡 한 봉지에 2000원인데 400만원을 벌어야 한다면 대체 얼마나 벌어야 하는 걸까?

"이거 하루에 한 바구니 다 팔면 얼마나 버세요?"
"차비 빼면 2만원에서 3만원 정도 돼."

귀를 의심했다. 하루에 3만원씩 번다고 계산해도 대충 134일 가량을 일해야 한다. 4개월이 넘는 시간이다. 그는 넉 달 내내 일해서 고스란히 다음 학기 등록금으로 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1년만 더 하면 돼. 막내 손주가 이제 1년만 다니면 졸업하니까 등록금 안 벌어도 돼. 그 때까지만 하고 이 일도 이제 그만둬야지"

경씨는 이제 이 고생도 1년밖에 안 남았다며 웃었다.

"할머니, 떡 하나 주세요"

사람들 사이에 퍼지던 소문들과 달리 경씨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픈 상처와 한을 가졌지만 손자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막내 손자가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경씨는 떡 파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때가 오면 경씨는 떡을 팔지 않고 집에서 손자들과 오순도순 살게 될 것이다. 1년 뒤. 전북대 앞 술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떡 할머니' 경문자씨를 추억할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도 경씨는 떡을 판다. 석양이 뉘엿뉘엿해질 무렵, 그는 아픈 무릎을 끌며 떡을 팔러 다닐 것이다. '떡 할머니'를 만난다면 이제 좀 더 흔쾌히 얘기하시라.

"할머니, 떡 하나 주세요"라고.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sun4in.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떡할머니, #전북대, #전주, #선샤인뉴스, #지하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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