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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프레임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2007년 대선이다. 그러나 경제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일까. 정치 프레임은 실종되어도 좋은 것인가. 정치가 만개하는 시기에 정치 프레임에 대한 논의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이 사태. 다들 한국 경제만 발전하면 정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 문제를 말하며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정치와 경제의 선순환에 대해서는 다들 침묵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정치 프레임을 통해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은 경제 개혁과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원동력임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 송충식 논설위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충분히 공감할만한 것이다.

“사회적 소수나 약자에 대해서도 단순히 시혜적인 나눔이나 관심을 넘어, 그들의 소외가 공동체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적극적 사고가 앞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안팎으로 도전적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선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모럴을 정립하는 것이 화급한 과제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다가오는 대선의 화두가 '경제'로만 집중되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다.”(송충식 논설위원, ‘민주공화국을 위하여’, <경향신문> 2007.10.2.)

‘공화국’을 매개로 정치 프레임 논의가 점화되려 했으나

물론 정치 프레임과 관련한 논의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한국사회당이 작년부터 꾸준히 제기해 온 ‘사회적 공화주의’, ‘사회적 공화국’ 말고도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논의가 시작될 조짐은 있었다.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서 노회찬 후보는 제7공화국 건설을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 제7공화국 건설을 내건 노회찬 의원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서 노회찬 후보는 제7공화국 건설을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 노회찬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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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회찬 의원이 ‘제7공화국 건설’을 주된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그 슬로건 아래 제시된 과제들이 기존 정책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이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제7공화국’을 내세운 노회찬 의원이 ‘사회공공체제’를 내세운 심상정 의원과 약간의 논쟁을 벌이면서 관심을 끄는 듯 했으나, 경선이 끝나고 이러한 문제의식이 종적을 감춘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또한 경선 과정에서 ‘새로운 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을 썼고, 후보로 확정이 된 후에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통일에 대한 수사가 아닌 새로운 정치 프레임으로 국민들에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다.

‘코리아연방’이 연상시키는 강렬한 이미지는 ‘공화국’을 단순한 후미 수식어 정도로 부차화시키고 있다. 이는 외부 비판자들의 억측이 아니다. 권영길 후보 선본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이용대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 343호에서 아예 ‘공화국’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아닌 ‘코리아연방’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 ‘통일은 밥도 주고 떡도 주는 것’이라는 제목까지 달아서 말이다.

한편, 새로운 정치 프레임으로 ‘공화주의’, ‘공화국’에 주목한 정치인들은 범여권에도 존재한다. 대통합민주신당 유시민, 이해찬 의원도 얼마 전 당내 경선 과정에서 ‘제7공화국’을 말한 적이 있고, 최재천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은 과거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면서 ‘공화주의에 입각한 민주진보정당’의 출현을 부르짖은 바 있다. 같은 당의 정세균 의원은 최근 한 신문의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공화국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내비쳤다.

“이제는 우리도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제 자리를 찾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공화국'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기억은 어둡지만 우리가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해 왔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史實)이다. 기존의 공화국을 부정하려는 인식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강렬한 추구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과 함께 한반도에 평화·번영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공화국'이라는 말의 본뜻을 찾아줄 또 한 번의 기회가 아닌가 한다.”(정세균 대통합민주신당 의원, <서울경제/로터리> 2007.10.9.)

낯선 공화주의, 희화화된 공화국

공화주의의 정치체인 공화국은 라틴어로 '공적인 것'을 뜻하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다. 이는 권력자의 사적 지배 공간으로서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를 번역한 한자어 '공화(共和)'는 '여러 사람이 화합해 공동의 일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 어원처럼 공화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가치공동체를 추구하는 사상을 말한다. 맑스가 말한 ‘자유인들의 연합체’도 큰 틀에서는 이러한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공화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낯설다. 미국 공화당의 지도이념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공화국은 한결 친숙하지만, 공화국의 본래 의미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친숙할 뿐이다. ‘삼성공화국’, ‘부패공화국’ 등이 대표적이다. 또 한편으론 공화국을 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해 경기를 일으키는 수구보수 세력까지 있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17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근대정치사상의 뿌리로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로마공화정과 14∼16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처럼 정치적 실체로도 존재했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추동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도 공화주의다.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내건 20세기 혁명의 시대가 가고,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는 공화주의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폴리스에서 행해진 직접 민주주의에 착목한 한나 아렌트를 선구로 미국 건국정신에서 공화주의를 재발견한 J.G.A. 포코크,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관계를 조명한 리처드 대거와 필립 페티트,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의 공화주의에 착목한 모리치오 비롤리 등은 공화주의를 현대 정치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작년에 모리치오 비롤리의 <공화주의>(인간사랑, 2006.8.)가 한국에서도 출판된 것은 공화주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 수준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야 주목받기 시작한 공화주의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요소가 결합된 개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에 비해 공화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한국 사회에서 전무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지난 99년에 펴낸 책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공화주의 전통이 자리 잡은 프랑스라는 거울에 비추어 전혀 역사성을 띠지 못한 허울뿐인 공화국의 옷을 입은 한국 사회를 질타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최근 정치학계 내에서 한국 정치의 위기 해소 방안으로 공화주의에 주목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2002년에 펴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초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공화주의를 재조명했고,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경제적, 이념적 양극화의 해법으로 ‘시민적 공화주의’ 구축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공적 민주의식을 갖는 시민적 공화주의의 구축을 통해 자유주의와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고 현재의 사회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모리치오 비롤리의 <공화주의>를 함께 번역한 김경희 경희대 NGO대학원 연구교수와 김동규 박사도 공화주의를 한국 정치에 접목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경희 교수는 특히 독선과 배제의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 인간관계의 예속화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진보적 대안으로서 공화주의에 주목하고 있다.

경희대 이동수 교수의 경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정치사상가 상탈 무페의 이론을 끌어와 공화주의 논의에 뛰어들었다. 그는 최근 ‘민주화 이후 공화민주주의의 재발견’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철저한 심화가 아니라, 민주의 토대에 ‘공화’의 가치를 접목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치학계뿐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탈민족주의 사관을 펴온 김기봉 경기대 교수와 항일독립운동 및 정치사상을 전공한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민족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공화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주로 정치 영역에서만 논의되던 공화주의의 가치를 경제 영역에 접목시켜 ‘시민경제’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소개된 적도 있다. <시민과 세계> 10호(2007년 상반기호)에 번역·소개된 리처드 대거의 논문 ‘신공화주의와 시민경제’가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맹위 속에서 공화주의가 현대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경제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 논문의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공동체주의 vs 공화주의 vs 사회적 공화주의

앞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단지 학계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아 보수주의 세력과 진보주의 세력이 제각기 공화주의를 통해 한국 정치의 새로운 프레임 구성을 도모하고 있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를 비롯한 뉴라이트 진영은 그들의 이념적 지향인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구현태로서 공화주의에 주목하고 있다. 박세일 교수는 개인주의적 전통에 있는 자유주의는 정치적 공동체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기 때문에 공화주의의 이타주의적 요소를 적극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공화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적 해석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이념으로서 공화주의의 가치에 주목하는 김성호 연세대 교수도 자유주의의 자유와 법치가 대신할 수 없고, 민주주의의 평등과 참여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민적 미덕의 담론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시민적 미덕의 강조도 공화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적 해석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이다.

한편, 안병진 창원대 교수는 <창작과 비평> 2007년 봄 호에 실린 ‘대한민국 ‘레짐 체인지’ - 현 정치질서의 특성과 향방’에서 “2007년 대선에서는 향후 대한민국의 전반적 모델을 두고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 간의 거대한 패러다임 충돌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여기서 안병진 교수가 파악하는 공동체주의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체제를 구축하면서도 그에 따른 양극화, 사회해체의 부작용을 기업, 교회, 가족 등 시민사회조직을 통해 사후적으로 보완해나가는 모델이고, 공화주의는 국가의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의 강화를 지향하는 모델이다. 이는 앞서와 달리 공화주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보주의적 해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선진화 담론’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는 공동체주의가 공화주의의 오른편에서 보수주의적 흐름을 대표하고 있다면, 공화주의를 진보적으로 전유하여 그 왼편에 새로운 경향을 만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한다.

지난 9월 6일에 개최되었던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의 책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 토론회 모습
▲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토론회 지난 9월 6일에 개최되었던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의 책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 토론회 모습
ⓒ 한국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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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사회적 공화주의’다.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가 최근에 펴낸 책인 <사회적 공화주의>(박종철출판사, 2007.8.)에 그 얼개가 들어 있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10년을 통해 국민 공통성이 철저히 해체된 한국사회에서 과거의 박정희 식의 억압적 공통성의 대두를 예방하고 새로운 국민 공통성을 수립할 필요성에서 사회적 공화주의의 문제의식이 싹텄다.

사회적 공화주의란 쉽게 말해 국민의 공통성이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보장되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 형성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극적 형성 의무란 쉽게 말해 국민 모두가 국민답게 살 수 있도록 국가가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공화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공화국’은 참정권과 사회권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복지를 통해 실질적인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공화국이다. 이는 외형적으로 복지국가의 형태를 띠지만,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그 틀이 무너지고 있는 기존의 복지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회적 공화주의는 단순히 복지강령으로 축소될 수 없는 포괄적인 국가 리모델링 프로그램일 뿐 아니라 복지를 단순히 국가 목표로 지향하는 것을 넘어서 역진 불가능한 적극적 형성의 의무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들이 실질적인 참정권을 확보해 진짜 주권자로 거듭날 수 있는 공화국의 상을 제시한 사회적 공화국은 헌법의 몇몇 주요 조항들을 개정해 만들어질 수 있는 제7공화국보다 훨씬 본질적인 국가 지향을 담고 있다.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논해야 할 대선

대선을 앞두고 경제 프레임을 둘러싼 각축 뿐 아니라 정치 프레임 논의가 활성화되고, 정치와 경제의 선순환에 대한 적극적 사고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대선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 발전 방향을 논하는 공론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은 아닐 것이다.

내년 총선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국가 운영의 향배를 결정하는 이번 대선에서 이러한 논의의 단초라도 마련되지 않으면 총선을 전후하여 한국 정치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올해 대선에서 앞서 안병진 교수가 말한 ‘레짐 체인지’의 가능성을 전망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한 정치 프레임 자체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행하는 말로 ‘여의지앵’이나 ‘여의도 정치계급’이 역사적 안목을 갖고 이러한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 새로운 정치 프레임 구성에 뛰어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허울이 아닌 현실의 ‘민주공화국’을 위한 정치 프레임 논의가 지금부터라도 시작되었으면 한다. 물론 각 정당들이 주도적으로 논의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논해야 할 대선에서 한 유력 대선 주자가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었다. 우울한 소식이다. 공동체의 미래에는 별 관심 없다는 신앙고백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한국사회당 대변인으로, 현재 금민 한국사회당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본부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금민, #한국사회당, #민주노동당, #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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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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