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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호주노동자들.
 한글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호주노동자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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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과 다국적기업이 국경을 초월해서 투자하고 생산현장을 넓혀가듯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도 국가를 초월해서 연대투쟁을 하는 시대가 온 것일까?

"한국, 호주,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단결하라!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이유로 한국노동자들을 해고한 프랑스의 글로벌기업 라파즈(Lafarge)의 부도덕성을 규탄한다!"

10월 17일 오전 10시,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시멘트 회사 라파즈의 호주본사에서 열린 피켓시위 도중에 마크 레논 호주건설노조 NSW지부 사무차장이 행한 연설중의 한 대목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한국에서도 외진 곳인 강원도 옥계의 시멘트공장에서 해고된 11명의 노동자를 위해서 한국, 호주,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어깨를 걸었다. 유럽의 심장과도 같은 파리, 오세아니아의 수도 같은 시드니가 한국과 연결된 것이다. 한국 해고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전 세계 노동자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문득 1848년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값싼 노동시장으로 스며들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평등한 노사관계를 잠꼬대 정도로 치부하는 다국적기업들. 게다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기수익을 챙겨서 매몰차게 떠나버리는 '약탈적 자본주의'를 응징하기 위해서 21세기 만국의 노동자들은 과연 단결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독점적인 자본의 축적을 악용하여 세계를 분열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단한 마르크스의 진단이 현실로 다가온 21세기의 들머리에서 만국의 노동자들은 불공정 노사관계와 비정규직의 사슬을 끊고 마침내 전 세계를 얻을 것인가?

온갖 꽃들이 만발한 시드니의 봄날 이른 아침, 마루브라 해변 근처에 위치한 라파즈 호주본사 입구에 모인 호주노동자들처럼만 단결한다면 그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오전의 이른 시간에, 그것도 대중교통수단에 연결되지 않는 시드니 외곽지역에서 열린 이날 시위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서울-파리-시드니를 잇는 연대투쟁의 한 축이었다. 아시아-유럽-오세아니아 대륙의 삼각꼭짓점이 끈끈하게 연결된 것.

서울-파리-시드니 연대투쟁 중

기자가 예정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라파즈 NSW본부에 도착해보니 붉은색 시위용 깃발이 펄럭이고 각종 피켓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날 시위는 호주건설노조(CFMEU)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호주교원노조와 잡역부노조가 측면에서 지원했다.

또한 한인동포 노동운동가 신준식씨(시드니대학교 노동문제 박사과정, 시드니민족교육문화원 회장)와 한인노동자들도 시위에 가세하여 파리에서 힘들게 투쟁하는 3명의 한국노동자들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전달했다.

180년 역사를 자랑하는 라파즈그룹의 본사는 파리에 있으며 미국, 일본, 영국, 캐나다, 호주, 독일 등 70여국에서 시멘트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라파즈가 한라시멘트를 인수하게 된 것은 1998년 IMF사태 당시였다.

그 후 다국적기업 라파즈-한라 시멘트로 변신, 사내하청회사(in-house contractor) 우진산업을 이용하여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 노동착취를 해오다가 우진산업 옥계공장에서 노조결성을 시도한다는 이유로 23명의 노동자 중에서 11명을 해고했다. 라파즈-한라는 그 후 우진산업을 폐쇄하고 다른 사내하청회사를 설립했다.

해고된 11명의 노동자들은 라파즈 서울사무소에서 복직투쟁을 벌이다가 일부가 이탈하고, 현재까지 2년 가까이 버틴 해고노동자 중에서 3명이 프랑스로 날아가서 파리에 위치한 라파즈-한라 시멘트 본사에서 두 달 가까이 원정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8년에 발생한 IMF망령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메아리 없는 호주노동자들의 성토

시위는 예정된 시간에 라파즈 호주본사 앞에서 시작됐다. 마크 레논 호주건설노조 NSW지부 사무차장의 연설과 영국건설노조 간부의 연설 순서로 이어졌다. 시위 분위기가 고조되자 구호 제창과 깃발시위, 피켓시위 등이 회사를 향해서 벌어졌다.

그러나 회사의 반응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교원노조에 소속된 3명의 여성 교사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노동자들의 메아리 없는 성토가 이어지는 동안 라파즈 호주본사 소속 노동자들이 바깥쪽을 궁금한 눈빛으로 힐끔거릴 뿐이었다.

영국건설노조 간부의 지원연설.
 영국건설노조 간부의 지원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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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교사노조에서도 시위에 참가했다.
 호주교사노조에서도 시위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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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회사 앞을 지나던 차량에서 시위를 성원한다는 의미의 경적소리가 들렸고 일부는 차를 세워놓고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호주노동자들이 한인동포 노동자들이 들고 있는 한글 피켓의 의미를 물어보더니 자신들이 건네받아서 한글피켓시위를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시위가 끝나갈 무렵 라파즈 호주본사의 여성간부 한 명이 나타나서 시위대 리더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회사로 돌아갔다. 나중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아보니, 사전에 호주건설노조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것과 시위종료시간을 물은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문득 이날 시위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주건설노조 간부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NSW본사 측에서 현장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시위상황과 사전에 전달한 메시지 등을 프랑스 본사에 전달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라파즈 호주본사 앞에서 깃발시위를 벌이는 호주노동자.
 라파즈 호주본사 앞에서 깃발시위를 벌이는 호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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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즈 호주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호주노동자들.
 라파즈 호주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호주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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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호주-프랑스 노동자의 눈물은 똑같다

시위를 취재하는 도중에 레논 사무차장에게 "오늘의 시위를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라고 묻자 레논 사무차장은 "글로벌 시대의 노동자 시위는 글로벌세대에 걸맞은 시위가 되어야 한다, 오늘 보았듯이 한국과 프랑스, 호주 노동자의 연대는 아주 견고하다"고 답변했다.

레논 사무차장은 인터뷰 내내 다국적기업의 부도덕성을 규탄하면서 전 세계 노동자의 연대투쟁을 강하게 촉구했다. 특히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다국적기업의 행태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21세기 악마들의 저주'라고 규정했다. 다음은 마크 레논 사무차장과 나눈 일문일답.

- 시위를 준비한 이유는?
"글로벌시대의 전 세계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위기를 맞았다. 자본과 기업의 치밀하고 집요한 공략으로 노동자의 입지가 약화되고 생존의 위협까지 느낀다.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한국과 호주 노동자의 눈물은 똑같다. 그래서 호주노조는 우진산업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복직투쟁을 지지한다."

- 라파즈 본사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나?
"세계에서 가장 큰 시멘트 회사가 사내하청회사에서 노조를 결성한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하고 직장을 폐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우진산업의 해고노동자들의 프랑스 원정시위를 호주건설노조가 지지한다는 뜻을 라파즈 프랑스본사에 전달했다."

- 우진산업 노동자들이 해고된 것을 어떻게 알았나? 그리고 누구로부터 시위를 요청받았나?
"한국의 노조단체와 호주의 노조단체들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항상 정보를 공유한다. 우진산업의 해고사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시위는 프랑스 노동단체로부터 연대투쟁을 하자는 제의를 받아서 이루어졌다."

- 호주노동자의 현실은 어떤가?
"호주 노동현장의 실태도 아주 나쁘다. 존 하워드 총리가 11년 반 동안 집권하면서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을 끊임없이 약화시켰다. 그 결과 지금은 노조의 힘이 많이 약해졌고 비정규직의 비율도 그 어떤 나라보다 높다. 그야말로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다."

마크 레논 건설노조 NSW 사무부총장.
 마크 레논 건설노조 NSW 사무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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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세계화 시대, 노동의 국제연대는 필수
*다음은 이날 시위를 함께한 신준식씨(노동운동가, 시드니대 노동문제 박사과정)가 우진 노동자의 투쟁을 지지하며 보낸 글이다.

라파즈-한라 시멘트 우진 노동자들의 투쟁은 호주 노동자들의 투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호주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화, 생산의 지구화와 노동시장의 유연화, 하청 확대 등으로 호주에서도 발생하는 비정규직 노동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제가 곧 호주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청과 비정규직이 가장 많은 건설산업 노동조합이 제일 먼저 연대를 시작한 것은 노동운동이 제대로 자리 잡은 국가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선진국 노동조합은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곽민형 한국 화학섬유연맹 부위원장은 호주의 연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 호주의 연대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번 한국 노동자 투쟁의 핵심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다국적 기업의 노동시장 지배력 강화 속에서 단계가 늘어나고 있는 하청구조와 노동시장 유연화의 강화로 늘어나고 있는 비정규직(임시직) 노동자들의 문제다.

이런 문제들은 자본이 쉽게 이동하고 생산이 지구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쉽다. 특히, 한국정부가 만든 비정규보호법(실지는 비정규직 차별법)은 한라시멘트 같은 양질의 기업을 인수한 라파즈라는 다국적 기업에 불공정하게 자본축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청을 이용하는 자본의 생산 및 고용정책이 이런 문제를 발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힘겨운 투쟁을 해야 한다. 참으로 노동운동이 힘든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번 한국노동자의 투쟁은 밖으로는 다국적 기업에 대항하는 투쟁이고, 안으로는 노동악법과의 투쟁이다.

이런 형태의 힘겨운 투쟁은 호주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크게 차이나는 점이 있다. 그것은 호주에는 비정규직(임시직)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정책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정책은 그냥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노동조합들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본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대목을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이 배워야 한다.

이번 투쟁에 호주의 노동운동이 연대의 정을 보내지만, 그 정 속에는 한국의 노동조합들에 보내는 애정 어린 비판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충고도 깃들어 있다. 진정한 연대는 서로 애정을 품고 건설적인 비판을 할 때 가능하다.

호주의 임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시간당 임금을 약 25%(직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더 받는다. 이것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삶의 문제, 공정한 룰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실천적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에 호주 노동조합들은 연대할 것이다. 세계화와 생산의 지구화 시대에는 국제연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역사가 좀 더 오래된 호주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은 고맙고, 가슴 뜨거운 것이다.

한국의 우진 노동자들이 원하는 원직복직 쟁취, 비정규직 처우개선, 노동조합 활동 완전보장과 해고기간 임금지급이 이루어지기를 빈다. 호주에 사는 한인 노동자들을 비롯한 호주의 노동자들도 그 엄정한 투쟁에 함께할 것이다.


태그:#라파즈한라시멘트, #우진, #비정규직, #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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