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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훈자마을. 울로 만들어진 '훈자모자'를 쓴 할아버지들.
 파키스탄 훈자마을. 울로 만들어진 '훈자모자'를 쓴 할아버지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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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막의 오아시스, 퀘타 바자르에 폭탄이!

파키스탄 퀘타에 도착했을 때였다. 도시 초입에서부터 수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바리게이트가 쳐지고 사거리에는 탱크까지 나와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호텔(여관)까지 가는 사이에 기관총을 내건 군용 지프가 몇 대씩이나 지나갔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어디론가 바삐 달려갔다.

“어머! 무슨 일이야? 전쟁이라도 난 거 아냐?”

아내의 말과는 달리 사실 그때까지도 우린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하얀 콧수염이 덥수룩한 주인장에게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았다. 

“밖에 무슨 일이에요?”
“바자르(시장)에서 폭탄이 터졌어. 사람이 많이 다쳤대.”

그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오늘은 외출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니 걱정 말라, 고 덧붙였다. ‘폭탄’이라는 단어가 나의 신경을 잠깐 자극했지만 흐리멍덩한 머릿속까지 자극하진 못했다.

그날 우리는 딱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파키스탄 동쪽 끝의 훈자마을에서 이곳까지 무려 4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버스를 타고 달려온 것이다. 아내와 나는 저녁도 거른 채 씻는 둥 마는 둥 침대에 그냥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밖에 나갈 수 없다는 말만 했을 뿐, 누구 하나 자세히 얘기하려들지 않았다. “대체 뭔 일이야?” 궁금해지긴 했지만 우리에겐 해결해야할 민생고가 놓여있었다. 전날 저녁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배낭 안은 비스킷 한 조각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붉은 사막의 오아시스. 여행자들은 퀘타를 이렇게 칭송했다. 퀘타의 바자르는 색색의 채소와 과일이 넘쳐나는 총천연색의 경연장이라며 사막의 마른 침까지 삼키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난 미련 없이 비상식량까지 몽땅 버스 안에서 해치웠던 것이다.

살벌한 거리풍경. 2박3일 동안 갇혀 지내야했던 호텔 옥상에서 본 퀘타의 거리.
 살벌한 거리풍경. 2박3일 동안 갇혀 지내야했던 호텔 옥상에서 본 퀘타의 거리.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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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대신 '던지기 탕'으로 민생고 해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더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주인장을 바라보자, 그가 한 손으로 하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옆 건물과 마주 붙은 벽으로 난 구멍을 가리켰다. 역시!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옆집은 바로 빵 굽는 집이었다. 빵은 이미 동이 났지만 밀가루를 한 봉지 구할 수 있었고, 곧 라면 수프를 풀어 수제비를 끓였다.

“그게 뭐니?”
“던지기 탕!”

호텔에는 우리 부부 말고도 두 명의 외국인 여행자가 더 있었는데, 일본인 시사또와 요리코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던지기 탕’으로 민생고를 해결했다. 민생고가 해결되자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갔다. 2층 우리 방 앞 난간에 서서 호텔마당을 내려 보고 있자니 이건 감옥이 따로 없다.

길가 쪽으로 트럭도 들어설 만큼 크고 육중한 철문이 나있고 그 왼쪽으로 리셉션, 오른쪽으로 주방이 있다. 마당에는 듬성듬성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객실은 일이층의 ‘ㄷ자’ 모양으로 마당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당을 향해 객실마다 달랑 방문과 창문 하나씩 뚫려 있으니 정말 ‘감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행을 즐기는 건 우리 부부의 철학이다. 방 안에 영화관을 오픈했다. 관객은 시사또와 요리코. 시사또가 인도영화 DVD 한 장을 가져왔다. 제목은 '디스코 댄서'. 혹시 인도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특징이 있다. 스토리 전개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무대가 바뀌면서 화려한 복장의 무희들이 나타나 인디아 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꼭 몇 차례씩 들어있다. 그것도 춤을 위해 그 영화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듯,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역시 우리의 주인공 디스코 댄서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춤을 추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쾅쾅 두들겼다. 늙은 주인장의 목소리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스크의 미나렛.(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스크의 미나렛.(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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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의 자유' 브레이크 타임은 끝나고...

“안에 일본사람들 있어? 대사관이라는데!”

한국 배낭여행자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의 한·중·일·미 여행자들의 각기 다른 대처법이다. 미국여행자는 즉각 대사관에 연락하고, 일본여행자는 돈으로 해결하고, 중국여행자는 주변의 중국인들이 떼거리로 모여들어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여행자는? 오직 혼자의 힘만으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나…!

그런데 일본대사관에서 퀘타의 모든 호텔(우리가 묵고 있는 싸구려호텔까지도!)에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전화를 돌린 것이다. 그런데 시사또는 좀 침울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반군과 정부군이 대치중이어서 상황이 좀 길어질 것 같다고 했으며 다른 조치가 있을 때까지 호텔을 벗어나지 말라는 당부까지 받았다고 했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또 다시 주인장이 문을 두드렸다. 아니, 이번에는 한국대사관에서?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반가운 소식, 일명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시민들이 식량을 구입할 수 있도록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 1시간 동안 브레이크 타임을 합의했다는 것이다.

호텔의 모든 숙박자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식료품점에는 벌써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온 걸까. 라면에 통조림에 생수에 비스킷에… 거스름돈을 챙겨 받을 새도 없이 ‘1시간의 자유’는 끝이 났다.

어느새 식료품 가게의 셔터가 내려지고 거리는 다시 군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도 먹을 걸 잔뜩 짊어진 사람들의 얼굴은 조금 여유가 생긴 듯 했다. 어차피 그들의 말처럼 모든 것은 ‘인샬라(신의 뜻대로)’ 아닌가.

또 다시 지루한 오후가 이어졌다. 시사또와 요리코와 함께 호텔 마당에 나와 방콕에서 사서 매달고 다니던 ‘대나무공’ 놀이를 했다. 우리 네 명의 웃음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는 여행자들이 용감했던 것일까.

브레이크 타임. 1시간의 휴전시간, 붐비는 식료품점.
 브레이크 타임. 1시간의 휴전시간, 붐비는 식료품점.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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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타임2. 유일하게 거리를 걸었던 1시간, 바쁘게 찍은 사진 한장.
 브레이크 타임2. 유일하게 거리를 걸었던 1시간, 바쁘게 찍은 사진 한장.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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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지금 이 상황이 즐거워요?”
“…….”

덩치가 큰 아저씨가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썹까지 치켜 올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우린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현 퀘타의 상황은 이랬다. 우리 부부가 도착한 날이 ‘무하람’의 마지막 날이었다. 무하람은 마호메트의 사위 알리의 암살과 외손자 알-후세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애도기간인데, 그 열 번째 날에 대규모 군중이 모여 자신의 몸을 때리며 수난극을 상연한다. 오직 마호메트의 직계자손만을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이슬람 소수파 ‘시아파’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이 날 퀘타에서도 1만 명이 넘는 추모행렬이 바자르(시장)를 행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정부군으로 보이는 무장괴한들이 총을 긁어댔다는 것이다. 곧 군대가 출동했지만 그 사이에 하늘에서 폭탄을 안고 떨어지는 자살테러까지 더해지면서 바자르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해 60여명의 희생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다고 했다.

아!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머물다 떠나면 그만인 철없는 나그네의 모습에 얼마나 기가 찼을까. 그러고 보니 호텔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아침과는 달리 많이 굳어져 있었다. 때 맞춰 “탕 타탕 탕탕” 총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는 모양이었다.

'호텔 감옥' 마당에서 열린 평화 콘서트

물론 죽을상을 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진 않겠지만, 우리들끼리 낄낄대고 노는 건 분명 아니리라. 네 명의 여행자는 잔뜩 풀이 죽어 말없이 잔디마당에 앉았다. 그때 아내가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시사또! 너 가수라고 했지? 평화 콘서트를 여는 거야!”

그날 저녁, 우리 네 사람은 ‘호텔 감옥’ 잔디마당에서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시사또는 런던이나 시드니 등지의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고, 얼마간의 돈이 모이면 떠나는 식으로 3년 6개월 동안 기타 하나 들고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는 친구였다.

'무슬림호텔'에서 가수 시사또와 무함마드
 '무슬림호텔'에서 가수 시사또와 무함마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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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타 선율이 흐르자 마당에 드리워진 회색 밤공기에 가녀린 파문이 일었다. 구슬프면서도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분명 처음 듣는 일본노랜데… 이 친숙한 느낌은 뭘까? 그가 하모니카를 입에 물었다. 아, 김광석이다. 그는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첫 곡이 끝나고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자 2층 난간에 서서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닫혔던 방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고개를 내밀었다. 노래는 사람들을 불러내는 힘이 있었다. 어느새 마당은 정말 콘서트장이 되어갔다. 더러는 잔디에 앉고 더러는 팔짱을 끼고 섰다. 그때였다.

“비틀즈 노래도 불러줄 수 있어요?”

좀 전 우리들에게 무안을 줬던 덩치 크고 까무잡잡한 아저씨, 무함마드다. 시사또가 인사를 하고 ‘예스터데이’를 부르자 사람들이 흥얼거리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찌릿, 고압전류가 팔다리를 타고 내 온 몸으로 스며든다. 팔뚝에는 소름까지 돋아났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곡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다는 사실, 강렬한 느낌이었다.

노래가 끝났다. 내가 재빨리 모자를 벗어 관람료를 받는 시늉을 했다. “와하하하!” 이틀 만에 ‘무슬림 호텔’ 감옥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처음으로 터져 나왔다.

……………

3주일이 흐른 어느 날, 이란을 여행 중이던 아내와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안녕 친구들! 나, 100달러에 당나귀 한 마리 샀다. 이놈을 타고 훈자마을까지 다녀왔어. 이제 인도국경을 넘어가볼 생각인데, 과연 가능할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 퀘타에서의 그날 밤을 기억하며 시사또가.’

장수마을, 훈자. 장수의 비결은?
 장수마을, 훈자. 장수의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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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훈자마을. 파란하늘과 설산... 그리고 순박한 사람들.
 아, 훈자마을. 파란하늘과 설산... 그리고 순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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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파키스탄여행, #퀘타, #비틀즈,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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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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