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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작가가 맘에 들 수도 있고, 장르가 맘에 들 수도 있고, 배우가 맘에 들 수도 있다. 드라마를 선택하는 데 있어, 배우는 무척 중요하다.

 

배우가 '비호감'이면 스토리가 아무리 좋아도 외면을 당하고, 배우가 호감형이면 이야기가 조금 엉망이더라도 드라마를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SBS드라마<로비스트>(수목 밤9시 55분 방영)는 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일단, 호감형 배우 송일국과 장진영이 투 톱으로 나온다. 아직 둘 다 로비스트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지만 드라마로써는 꽤 든든한 병력이다. 그래서 보는 눈이 즐겁다. 이야기나 편집이 조금 삐끗거려도 다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처음에 나도 송일국 보는 재미로 드라마를 봤다. 그러나 눈이 즐거운 것도 한계가 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로비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 12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들었다고 한다. 자동차를 부수고, 택시 추격전도 벌이고, 미국에서 촬영하고, 할리우드 액션영화처럼 총들고 두두두두 싸우고….

 

이 드라마를 보면 돈 많이 들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외형은 그럴듯한데 속 내용은 허점 투성이다. 음식이 먹기에는 좋은데 막상 먹어보니 싱거운 것이다.

 

문제는 주인공 해리(송일국)에게 있다. 미국에서 인력거꾼을 하는 해리, 그는 도박에 미쳐있다. 특히 카지노에서 룰렛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대박을 노리기 때문이다. 그가 대박을 기대하는 이유는 동생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이쯤 되면 '어?'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해리의 목적이 너무 평범하다. 목적 없는 인간들, 우리 주변에 많지만 얼마나 재미가 없는가. 그러니깐 해리가 마피아 부인의 비서가 되든, 한국으로 가서 마리아(유소영)를 만나든 별반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해리는 애초부터 야망도 없고, 로비스트가 될 생각도 없다. 그런 사람이 상황에 휩쓸려 로비스타가 된다면? 생각하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없는 상상이다.

 

이에 비해 마리아(장진영)는 일단 분노가 있고 행동에 목적이 있다. 그녀의 언니가 한국을 돕다가 죽음을 당했다. 마리아는 차가 폭발하면서 언니가 죽는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했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미국의 FBI는 이 사건을 그냥 단순 사건으로 묻으려고 하고, 마리아는 이에 분노한다.

 

어수룩한 해리에 비해 마리아의 성격은 극 초반에 잘 드러난 편이다. 그녀는 씩씩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다. 미국이라는 낯선 도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여자라면 누구나 질색하는 지렁이도 척척 잘 잡아낸다. 그런 그녀였다. 언니 죽인 사람들 찾겠다며 한국으로 무작정 온 강한 여자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오더니 갑자기 온순한 양으로 변한다. 강태혁(한재석)을 만나면서부터다. 강태혁이 누군가? 마리아의 언니 에바(유선)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 에바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괄괄하고 활달한 성격의 마리아, 태혁을 만나더니 갑자기 요조숙녀가 된다. 자신의 언니 에바는 죽었고 태혁은 버젓이 한국에 살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마리아라면 태혁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비스트>의 마리아는 태혁과 커피숍에서 잠깐 이야기하더니 모든 오해를 풀고, 마치 대단한 동료를 만난 듯 그와 함께 에바를 죽인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참으로 이상한 전개다.

 

이쯤 되면 <로비스트>에서 극적 리얼리티라는 이름이 초라해져 버린다. 로비스트라는 전문적인 직업과 너무 안 어울리는 부분이다. 허점투성이인 건 태혁도 마찬가지다. 태혁은 분명 에바의 죽음에 여러 정부관리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에바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보이는 제임스 리(허준호)를 찾아가 다짜고짜 따진다.

 

마구 울분을 토해내는 태혁을 보면서 제임스 리가 딱 한마디 한다.

 

"넌 이 일을 알아낼 수 없어. 넌 너무 감정적이야."

 

제임스 리의 말이 맞다. 이 드라마는 시종일관 너무 감정적이다. 마리아도 해리도 태혁도….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감정적으로 일 처리를 하고 있으니, 실수도 많고 우연적인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담 채(김미숙)와 제임스 리가 눈에 띄는 건 당연하다. 이들은 일종의 목적이 있고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깐.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보면 대한민국 시청자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제 한국 시청자는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를 소화할 수 있는 수용력을 지니게 되었다. 눈높이가 더욱 높아졌다는 것이다.

 

'감성적인 등장인물'과 '우연한 사건의 남발'이 90년대에는 먹혔을지 모르지만, 2000년대는 먹히지 않는다.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면서 열광하는 시대에 목적 없는 주인공을 내세워서 우연적인 만남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는 건 너무 하지 않은가? 이러니 <로비스트>가 재미없고 <태왕사신기>의 시청률은 점점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해리가 로비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이 생겨야 한다. 밍숭맹숭 술에 물 탄듯 제임스 리의 말만 고분고분 잘 듣는 해리는 이제 그만…. 송일국의 '포스'에 걸맞는 해리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리아는 태혁과 헤어지기를…. 태혁 옆에서는 마리아의 캐릭터가 죽을 수밖에 없다. 낯선 미국에서도 초연했던 마리아가 그 모습을 되찾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블로그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로비스트, #송일국,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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