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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한 하천과 주변의 잔디
 복개한 하천과 주변의 잔디
ⓒ 이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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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파리를 경유해 출발 하루만인 9월 14일 저녁 빌바오 공항을 거쳐 15-18일 스페인북부 인구 270만의 바스크 자치주 기푸스코아 지방의 혼드리바 유스호스텔에서 개최된 GAIA(세계 반소각/소각대안연맹) 2007년 세계 대회 참석 후 하루 시간을 내서 몬드라곤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을 출발하기 몬드라곤협동조합복합체 홈페이지(www.mondragon.mcc.es)에서 자료를 살펴보기는 했지만 그룹연수 위주의 사전 방문신청이라 사전 요청 없이 그냥 배짱으로 출발했다.  출발 전에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몬드라곤을 방문했거나 방문했음직한 분들께 사전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되었거나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장님 코끼리 더듬는 듯한 수준일 수 있지만 이런 방문기회도 별로 없는 것 같아 방문기를 소개한다.  

유스호스텔에서 행사를 마치고 9월 19일 아침 일찍 어둠을 뒤로 하고 배낭을 챙겨 시내로 내려갔다.  스페인 환경운동 활동가가 가르쳐 준대로 시내버스를 타고 산세바스티안으로 향했다.  1시간을 달리다가 도노스티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근처에 있는 매표소에서 7.6유로 버스표를 구입하고 오전 9시 발 사라사테/몬드라곤행 시외버스를 타니 승객은 3명뿐이다.  

뒷좌석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MCC에 대해 물으니 산자락에 있다는 설명을 해 준다. 한참을 달리며 산길임을 실감하는데 MCC 소속 에로스키 생활협동조합 대형매장이 보이면서 10시 조금 지나 도착하니 작은 도시인데 여기저기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눈에 뜨이는 여행사를 찾아 길을 물으며 가다가 자그마한 아라사테 호텔에 들러 2002년판 몬드라곤 지도를 구해서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물으니 깔깔거리면서 단편적인 길안내를 한다. 

애들은 역시 애들이야! 마침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이 유창한 영어로 같은 방향을 걸으면서 길안내를 해 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길을 걷다보니 하천을 복개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한 토막을 걷어내고 정원처럼 나무와 잔디를 심고 주변에 벤치가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사람들이 쉽게 하천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천을 복개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길이 갈라지는 로터리 가운데 서 있는 기계 톱니가 공업지역임을 보여준다. 울산시내로 들어가는 로터리 풍경과 흡사하다. 로터리 정면에 있는 주상 복합고층 아파트에 붙어 있는 MCC(Mondragon Corporacion Cooperative) 마크가 눈에 들어오는데 여간 반갑지 않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영어를 가르치는 초보 수준의 그림 판넬이 붙어 있는 것이 마치 영어학원 같다. 인구 2만5천명의 몬드라곤에서 처음 만나는 MCC 이미지다. 영어 붐이 한창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계속 산자락으로 길을 찾아가니 노인들이 정류장에 앉아 담소를 즐기고 투명한 정류장 벽과 거리의 벽에는 각종 포스터가 붙어 있다.  얼굴을 보자기로 씌운 결박된 나체 남성포로의 사진 등이 담긴 포스터인데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으로도 보이고 바스크 분리주의에 대한 탄압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한 장을 떼어서 챙겼다. 

파고르(울고의 변경명칭) 연구소가 눈에 들어온다. 길을 찾다가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봐 두었던 동방용(몬드라곤은 용산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중국집에서 혼자 이른 점심을 먹었다. 슈퍼마켓에 들러 짐을 맡기는 코너에서 큰 배낭을 열쇠고리에 걸어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 며칠 후 귀국길에 빌바오 공항을 다니는 버스에 마주 앉은 젊은 부부에게 바스크 지방 분리독립 문제를 물어 봤더니 여론상 반반이라고 하며 자신들은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협곡에 자리 잡은 몬드라곤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하천을 살펴보니 대부분 바닥은 콘크리트화 되어 있었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낮 시간이라 엄마들이 학교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모습, 그리고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니었다!)가 손주를 유모차에 태워 거리를 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실제로 2006년 보고서에서도 지난 10년간 일자리가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산을 깎아 도로를 내거나 아파트를 짓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대부분의 기존 아파트가 5층 정도였고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10층 내외였다. 도시의 활력이 느껴졌다. 지방이 쇠락해 가는 모습을 겪고 있는 한국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다시 길을 물어서 되돌아 가다보니 언덕 입구에 그림표지판이 나오고 이어서 MCC 본부와 이켈란 기술연구소 노동인민금고 건물이 보인다.  먼저 이켈란 기술연구소 건물에 들어가니 호세 마리아 아르멘디아리에타 신부의 흉상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 

로타리 기계탑과 어학원
 로타리 기계탑과 어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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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목적을 설명하고서 영문보고서를 구한 후 “신부와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농담을 했더니 눈치 빠른 아가씨가 웃으며 카메라를 잡고 사진을 찍어 준다.  얼마나 먼 길을 달려서 여기까지 왔던가. 그의 사후 31년 만이다. 경의를 표했다.

2006년 전체 보고서에는 이켈란을 포함해 기술연구소가 12개인데 645명이 근무중이다. 전체적으로 MCC 산업분야의 고용이 50.8%나 된다. 스페인 전역과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많은 기업체들에 필요한 기술 지원을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MCC가 소비자협동조합이 아닌 몬드라곤의 공업지역 전통의 터전위에서 노동자생산협동조합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언덕을 더 올라가니 사진으로만 보았던 몬드라곤협동조합그룹 본부 건물이 보인다. 늦은 점심시간이라 입구 언덕에서 아르멘디 신부가 이 언덕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하며 한동안 앉고 누워서 생각했다.
 
꽤 오래전에 사북 태백 지역을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탄광촌의 산자락과 중턱에 판잣집으로 조밀하게 자리 잡은 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시간 후 MCC본부 사무실에 들러 한국에서 왔는데 가이아 국제대회 참석 후 여기를 사전 예고 없이 방문한 사정을 설명하고 소개와 자료를 요청했더니 200명 정도의 전문기술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에너지 분야에 관심이 크다고 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기업체들에 필요한 기술 지원을 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기본적인 안내 자료만 받을 수 있었지만 말로만 얼핏 들었던 기술 연구소를 직접 방문해 보니 실감이 났다. 이어서 언덕을 더 올라가니 사진으로만 보았던 몬드라곤협동조합 그룹본부 건물이 보인다. 들어가니 점심시간이라 다시 나와 언덕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켈란 연구소 입구에 있는 아르멘디 신부 흉상
 이켈란 연구소 입구에 있는 아르멘디 신부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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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담당이 세계 각국의 사업체들과 국제회의를 하느라 출장중인데 다음 주에 도착할 예정이라면서 요청한 2006년 영문보고서를 주는 것 아닌가.  고마운 일이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비디오를 구입하고 싶다고 했더니 홈페이지에 있는 동영상과 동일할 것이라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내려오다 CL(Caja Labour)로고의 옥상입간판이 서 있는 노동인민금고(협동조합은행)에 들렀다.  영어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스페인어 자료로 만족해야 했다.  내려오다 특이한 조각상이 건물 모서리에 자리한 라군-아로 복지사업체 사무실에 들렀다가 몬드라곤의 역사를 기록한 단행본 책자를 부탁해서 얻었다.
 
몬드라곤은 19세기 말부터 소비자협동조합이 조직된 이래 협동조합의 전통이 강했던 지역이었고 스페인 내전 후 인민전선 정부를 격파하고 집권한 프랑코 군사정권의 각종 탄압 속에서 나름의 철강산업지역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해야 했던 상황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른바 바스크 민족주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멘디 신부 주도로 시작된 기술직업학교에서 1956년 졸업생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ULGOR라는 작은 난로 공장으로 시작하여 스페인 7위의 기업군으로 자리 잡은 몬드라곤 노동협동조합 복합체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왔다.

소개된 책자에는 2000년 현재 세계 각국으로 수십 개의 기업체를 확산시키고 있는 또 다른 세계화의 모습까지 사진을 포함하여 연도별로 개략적인 설명이 담겨있다.  놀라운 것은 70년대부터 세계 각국으로 사업체를 확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몬드라곤에서 바스크 자치주를 넘어 스페인 전역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갔고 마침내 일찍 세계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그것은 15세기 콜럼버스의 대 항해로 상징되듯이 세계로 나아갔던 스페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베네수엘라를 방문하고 온 분들로부터 스페인의 바스크지역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보급되었다고 하면서 교류와 지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여름 쿠바를 방문했을 때도 미국의 금수 조처에 상관없이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으로부터 지원과 교류가 이어졌던 것이 1990년대 쿠바의 생존과 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던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이켈란 기술연구소 MCC본부 노동인민금고 라군-아로(복지협동체) 네 곳을 들른 셈이니 사전 연락도 하지 못한 채 찾은 것에 비하면 적지않은 성과라고 만족하면서 사무실을 나왔다.  아쉬워서 맞은편 산언덕에 올라 본부가 있는 산 중턱을 바라보며 아르멘디 신부를 다시 떠올리다가 사진 몇 장을 찍고 내려왔다. 기념될만한 물건들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구할 수가 없었고 행정기관을 찾다가 늦어져 발걸음을 돌려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한국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중심의 협동조합과 달리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인민노동금고 에로스키 소비자협동조합 라군아로 사회복지 협동조합 등 수백 개의 다양한 협동조합의 그룹화, 사업체의 세계적 확산의 성공은 독특한 사례에 해당한다.  한국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를 본 것으로 일단 만족하면서 다음에 구체적인 준비를 거친 방문연수기회가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MCC 입구 안내 표지
 MCC 입구 안내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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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역사가 짧고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탄압과 왜곡으로 얼룩져 온 한국의 협동조합 역사와 비교해 생각하게 된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베스트 10 협동조합에 등재될 정도로 성공한 협동조합인 MCC는 협동조합도 세계화 시대의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MCC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 실체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자본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대안 세상에 대한 꿈을 가진 많은 협동조합 활동가들이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인데 엄두가 나지 않아 한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사전 답사하는 심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여행의 큰 성과였다.

스페인은 반도국가이고 내전과 군사독재를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회 닿는 대로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방문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대수 기자는 자원순환거버넌스포럼 사무처장입니다.



태그:#몬드라곤, #생활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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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에 거주하면서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군포시민신문,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역사NGO포럼,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 시민아카데미 등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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