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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30분 모닝콜, 6시 30분 아침식사다. 어젯밤 회식으로 반이나 나올까 했는데, 한 명 빼고 다 나와 아침을 먹었다. 입맛 까다로운 손님들이라 특별히 순천에다 맞췄더니 역시 효과 만점, 국을 두 그릇씩 해치웠다. 출발은 7시 10분. 순천에서 보성까지는 1시간 남짓.

 

순천에서 벌교 쪽 2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성에서 18번 국도로 갈아타는데, 그 앞에 보성 차밭 이정표가 있다. 지난 추석 선상 살인사건이 있었던 율포가는 길이다. 우리가 가는 곳은 고개 넘기 전의 대한 다원. 기사님이 안다고는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켜본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지나칠 기세. "기사님! 이리로 들어가야지요." 기사, 움찔하면서 뒤로 조금 후진 방향을 튼다. 이럴 땐 요령이 필요하다. 절대 기사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 많은 인원의 안전을 책임지는 게 대형버스 기사다. 그리고 그들도 존중받아 마땅하므로, 난 최대한 존중해 주려고 애쓴다.

 

오전 8시 조금 넘은 시간, 차밭은 고요하다. 지난여름은 비에 젖은 날들이었다. 차밭에서 햇살을 처음 본 느낌으로 상쾌하게 삼나무 길을 걷는다. 오랜만이어선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매표소를 향해 가던 나, 두리번두리번 찾는다. 그런데 매표소 창구가 없다. 대신 커피 자판기 같은 입장료 자판기가 떡 버티고 있다.

 

 

이 흉물스러움이란? 내가 아날로그 세대여서선가, 도무지 낯설다. 도심지 대형 공원에서는 본 것 같은데 이런 관광지에서는 처음이다. 불과 3개월만인데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정말 우리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구나, 새삼 깨닫는다. 인간적인 냄새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우리 단체 관광객들은 몇 명만 빼 주세요' 하면서 매표창구 직원과 입씨름이 대단했는데, 이젠 기계가 다 알아서 한다니, 참.

 

 

고개 너머에도 차밭은 많다. 그리고 차밭 하면 보성을 떠올리는데, 영암 월출산 밑에도 태평양 녹차 밭이 있고 제주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녹차 밭이 있다. 이곳 대한 다원은 각종 CF로 유명한 관광농원. 사실 드라마나 광고를 찍는 것도 홍보 차원이지 싶다.

 

 
 

이른 아침이라 정말 분위기 만땅이다. 여러 번 와본 중 최고의 분위기. 관광지의 분위기는 시시때때로 달라진다. 아침·점심·저녁이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고 날씨에 따라 다르다. 그 때문에 내가 아주 좋게 본 풍경을 추천해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처럼 여행 자체를 즐긴다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삼나무 길을 걷는다. 러시아 작품에 주로 나오는 삼나무 숲. 난 소설을 읽으면서 삼나무의 키가 작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삼나무숲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나무는 키가 대단히 크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삼나무, 그 가운데로 걸어가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단풍은 아직 수줍은 새색시 수준, 그래서 더 예쁘다. 햇님은 계단식으로 된 녹차 밭에 햇살을 골고루 뿌려준다. 녹색과 햇살이 어우러져 녹색의 향연이 벌어졌다. 나무들은 시샘이라도 하듯 길게 그림자를 드리워 훼방을 놓는다.

 

녹차 밭을 한 바퀴 돌고 우전차(천원) 한 잔을 사들고 차로 온다. 나는 녹차를 마시지 않지만 기사에 대한 예우로 늘 그렇게 해왔다. 기사님, 맛이 아주 기똥차단다. 다행이다. 아직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딱해 보였는데.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같을 때가 제일 힘들단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구요? 아니요. 직업에는 분명히 귀천이 있어요' 하면서 열변을 토하던 기사님. 백번 이해가 간다. 젊을 때 시를 썼지만 너무 많은 기간 방황하다 보니 지금 이렇게 고생하며 산단다. 나는 '요즈음 고생스럽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느냐'고 위로 차원에서 말해 주었다.

 

시간이 돼도 손님들은 올 생각을 안 한다. 오늘은 분위기가 좋아 아무래도 시간을 넘길 것 같다. 재촉하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죽녹원에서 시간을 좀 적게 주기로. 너무 강행군이라고 불만인 손님들이 많았다. 힘들겠지, 나도 힘드니까.

 

그러나 일정을 느슨하게 해서 한 군데쯤 빼면 모객이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은 줄줄이 엮어서 여러 군데를 한꺼번에 갔다 오는 걸 좋아한다. 외국 여행도 그래야 손님이 모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왕이면 세 군데보다는 네 군데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제 죽녹원이다. 대나무 숲을 걷고 담양천변의 관방제림을 산책하는 시간이다. 대나무 숲은 축축하다. 대나무가 습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빼곡히 들어서서 하늘을 막아 버리니 해가 들어올 자리가 없어 더 습하다. 대나무는 하루에 2∼30cm씩 자란단다. 그야말로 쑥쑥 자라는 것이다. 나는 늘 앞장서서 가고 조금 일찍 나와서 기다린다.

 

 

이번에는 단체팀인데다 인원이 적어서 수월한 편이었다. 점심은 대통밥이었다. 대나무에다 영양밥처럼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한 밥이다. 점심을 끝으로 일정은 다 끝나고 이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장성까지는 국도로 가고, 장성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진입, 그다음 논산에서 민자도로로 간다. 논산 접어들 때쯤, 분위기맨이 나타났다. 수다만으로 여행을 끝맺고 싶지 않다는 것. 동창회장님 나서서 수습하느라 진땀을 뺀다.

 

"왜 이래. 다 와 가는데, 조금만 참아."

 

이럴 때 난 마음을 비운다.

 

"놔 두세요. 막판인데. 하지만 이 차에는 노래방도 없고 마이크도 못 드려요. 알아서 신나게 놀아보세요."

 

그 대신 뽕짝 음악을 틀어준다. 처음 출발하면서부터 술 잔치가 벌어졌었다. 기사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적잖이 걱정을 한 모양인데, 여태까지 참아준 것에 대한 보답인지 음악을 크게 틀어준다. 버스 뒤쪽을 차지한 분들은 아주 난리가 났다. 나는 그저 바깥 풍경에만 취해 있는데.

 

놀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두렵다. 우리 여행사는 조용한 여행을 추구하므로 음주가무는 엄격하게 금지한다. 그러나 단체일 경우만 약간 눈감아 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놀게 해 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여행 내내 노는 것 때문에 시달려야 한다.

 

요령이 필요하다. 처음에 놀게 해주다가 나중에 못 놀게 하면 한 번도 놀지 못한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처음에는 금하다가 마지막에 놀게 해주면 계속 신나게 놀았다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 30분만 놀게 해주면 집에 가려고 버스에서 내리는 손님들 얼굴이 활짝 펴져 있다. 원숭이의 조삼모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단 단체손님의 경우다. 모객 손님은 절대 놀게 해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서 1박 3일의 여행이 끝났다. 하룻밤 꼬박 새고 외도로 소매물도로 다녀온 여행, 후유증이 일주일이나 갔다. 그래도 행복한 이유는 늘 자연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10월 14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보성녹차밭, #삼나무, #죽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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